Al - 2-8
8.
돌아가는 길에 병원에 들러 이제는 고양이가 아주 조금은 먹는다고 말하여 그에 맞는 약을 새로 받아 왔다. 서둘러 집에 올라가 문을 여니 계속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앞에 누워 있던 고양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끙끙거리며 중문을 긁는 모습에 약 봉투도 내던지고 몸을 숙여 끌어안는데 고양이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로 울부짖더니 몸을 크게 뒤틀었다.
“애기야!”
품에서 벗어난 고양이가 바닥을 긁으면서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놀라 다가가던 선우는 순간 스치는 생각에 뻗던 손을 멈췄다.
설마 늑대 페로몬 때문에 그런가?
겉옷을 벗어 버리고 온몸이 젖을 정도로 탈취제를 뿌렸다. 집 안의 창을 모두 열고도 모자라 유일하게 문이 닫혀 있던 침실로 고양이를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가쁜 숨을 내쉬는 고양이의 흰 가슴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들썩였다. 제 무관심함을 후회하며 욕을 짓씹은 선우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 휴대폰을 꺼냈다.
병원에 데려갈 수 없으니 의사라도 불러야 했다. 고양이의 가슴팍을 도닥이며 병원에서 전화 받기를 기다렸다. 짧은 기다림 후, 드디어 전화가 연결되고 선우가 입을 열며 손 아래 고양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보세요. 저 아까 들렀던 남선웁니다. 다름 아니라…….”
말을 잇던 선우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제 손 아래에 있던 고양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웬 소년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힘이 풀린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졌다.
얼룩무늬의 하얀 털이 사라진 자리엔 매끈하고 뽀얀 피부가 자리했고, 푸른 눈이 아름답던 복슬복슬한 머리는 천사 같은 얼굴로 변해 있었다. 충격받은 선우가 흔들리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열대여섯 살이나 됐을까.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 위로 쫑긋 솟은 두 개의 두툼한 귀와 옆에 살랑거리는 통통한 꼬리가 아니었다면 눈앞의 소년이 제 고양이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거다.
제가 지금까지 보호 중이던 고양이가 수인이었다고?
옅은 복숭앗빛으로 물든 새하얀 뺨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찌푸린 채 감겨 있던 눈이 서서히 뜨이며 수인일 때보다 조금 어두워 차분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선우….”
멍하니 중얼거리던 소년은 제가 말을 했다는 것을 알고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라 울 것 같은 눈을 하는 아이의 모습에 작게 웃은 선우는 다정히 미소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선우야.”
“……선우.”
고양이가 사실 수인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선우는 얼굴을 가까이하며 걱정스레 속삭였다.
“아픈 데 어디야. 지금은 괜찮아? 밥은 왜 안 먹어. 병원 좀 같이 가 주면 안 돼?”
안아 달라는 듯 뻗어 오는 손에 몸을 숙여 꼭 끌어안자 아이가 눅눅히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 쫓아내?”
“왜 그런 걸 물어봐.”
“저번에 그랬잖아. 수인이면 집에 보낸다고.”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수인인 거 숨긴 거야? 쫓아낼까 봐?”
소년이 얼굴을 뚝 떨궜다. 속내가 빤히 보이는 모습에 웃음을 삼켜 낸 선우가 몸을 물리며 그와 시선을 맞췄다.
“고양아. 이름이 뭐야.”
분홍빛 입술을 달싹거리던 고양이는 속눈썹이 풍성한 눈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은현채.”
* * *
생각지 못한 정체에 동물 병원이 아닌 수인 병원으로 전화를 다시 걸어야 했다.
현채가 쓰러진 건 역시나 이원의 페로몬 때문이 맞았다. 수십 년간 익숙해진 저도 받아 내기 힘든 것을 아직 성장기인 현채가 견디기엔 무리였던 거다.
다행히 실수로 잠깐 노출된 경우는 걱정할 필요 없고 발작과 같은 증상도 일시적인 현상일 거라고, 더 지켜보다 상태가 나빠지면 그때 내원하시라는 말에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현채와 마주 앉은 선우는 그 앞에 머그컵을 내려놨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제 머그컵과 선우를 번갈아 보던 현채는 컵을 쥔 채 테이블을 빙 돌아 선우 바로 옆 의자를 빼내 앉았다. 엉덩이를 꼭 붙여 앉는 모습에 웃음이 절로 터져 고양이가 아닌 줄을 알면서도 머리를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쫑긋 솟은 동그란 귀가 기분 좋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컵을 만지작거리는 손의 뼈대가 희고 단단했다. 인간화해서도 귀와 꼬리를 채비하지 못하는 모습이 어리다 싶었다. 그를 내려보며 커피로 입술을 적신 선우는 아까 병원에 전화하느라 흐지부지됐던 이야기를 마저 꺼냈다.
“현채야.”
머그컵을 꾹 쥔 현채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봤다. 어떻게 얘기해야 상처를 덜 받을까 고민하며 단어를 고르는데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채가 툭 말했다.
“……쫓아내려고.”
“아니야, 쫓아내는 게 아니라.”
황당한 웃음을 뱉은 선우는 의자를 돌려 앉아 현채를 마주 봤다.
“현채 수인이잖아. 내가 더 데리고 있다간 문제 생겨.”
“쫓아내는 거 맞잖아.”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법적으로…….”
애써 달래듯 말을 잇던 선우와 현채 사이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선우의 시선이 현채의 배로 향했다. 얼굴이 붉어진 녀석이 황급히 제 배를 가렸다.
여기서 웃으면 성질을 낼 것 같아 입꼬리에 힘을 줘 겨우 표정 관리 한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야기했다.
“우선 밥부터 먹자.”
이번에도 먹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현채는 순순히 부엌으로 따라 들어왔다. 테이블에 앉지 않고 제 옆을 맴도는 모습이 고양이일 적과 비슷해 자꾸 웃음이 나왔다.
“여기 앉아서 구경해.”
의자를 끌어다 옆에 놔 주자 현채가 얌전히 앉아 저를 바라봤다. 입고 있던 작은 옷 대신 제 셔츠를 빌려줬는데 그건 또 사이즈가 컸다. 긴 소매에 가려진 손을 힐긋 바라본 선우는 저 애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수인인 줄 알면서 여태까지처럼 끼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꼭 버려진 것 같아 보이던 첫 만남이나 집에 돌아가기 싫어하는 태도 등이 마음에 걸려 무작정 집으로 돌아가라 할 수도 없었다. 제 곤란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채는 그저 저를 구경하듯 쳐다볼 뿐이었다.
“밥은 왜 안 먹었어?”
“……별로 안 먹고 싶어서.”
“왜? 어디 아팠어? 아니면 혹시 다른 거 먹고 싶었어? 내가 사료 줬을 때 놀랐겠다.”
그간 생각만 했던 이유들을 이것저것 꺼내 물었다.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던 현채는 시선을 내린 채 모두 아니라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참 길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돌연 속눈썹이 들리며 감춰져 있던 푸른 눈이 드러나 선우를 응시했다.
“데이트 간다고 했잖아.”
“혼자 집에 있을까 봐 걱정해서?”
“아니. 내가 선우 좋아하니까.”
선우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고백에 넋이 나간 선우를 두고 현채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나는 선우랑 결혼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만 더 크면 되는데 선우는 다른 수인 만난다고 하니까 마음이 너무 아팠어.”
“……이럼 형 진짜 잡혀가는데.”
곤란하게 웃은 선우는 모른 척을 택하고 뒤돌았지만 현채가 멀어지는 옷깃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선우. 나랑 결혼해.”
“으응, 안 돼.”
“왜?”
“아직 결혼 생각 해 본 적 없는데. 안 할 수도 있고.”
“하지만 선우는 데이트 나가기로 했잖아. 데이트만 하고 결혼은 안 한다고?”
“…….”
애초에 지성이라는 게 결여된 대화였다. 현실적으로 설명해 봤자 소용없을 걸 깨닫고는 현채를 의자째로 들어 식탁 앞에 데려다 놓은 뒤 접시를 옮기며 설명했다.
“원래 데이트만 하고 결혼은 안 해도 되는 거야. 그리고 나는 웬만하면 같은 개 수인을 만날 생각이라.”
“선우 순혈주의자야? 순혈주의는 나쁘댔어.”
저부터가 여러 수인이 섞인 혼혈인데 그럴 리가. 취향 하나 얘기했다가 졸지에 순혈주의자로 매도당한 선우는 왠지 모를 억울함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취향 얘기한 거야.”
“더 얘기해 줘. 취향.”
고개를 끄덕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눈을 보다 괜히 짓궂은 마음에 복슬복슬한 머리를 누르며 장난쳤다.
“나보다 키가 커야 하고, 나이도 많으면 좋겠고.”
“……안 들을래.”
쫑긋거리던 귀가 어느새 시무룩해져 아래로 축 처졌다. 애기한테 너무했나 싶어 선우는 현채의 앞에 고기를 놓아 주며 덧붙였다.
“나중에 커서 와.”
“얼마나?”
“스무 살 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