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2-2
2.
집안 어른들이 대화하고 있을 때 은우경의 연락을 받은 은우연이 뒤늦게 도착했다. 은우연의 양손에는 커다란 설표 둘이 목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왔다.
“우연아, 무슨……. 이채랑 채연이?”
“설명해.”
우연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둘을 가운데 집어 던졌다. 떨어지기 전에 인간화한 채연과 이채는 저희에게 집중된 시선에 쭈뼛대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별 얘기 안 했어요. 그냥 장난친 건데.”
“성장통이 엄청 아플 거라고 그랬더니 현채가 놀랐나 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변명하는 모습을 팔짱 낀 채 지켜보던 은우경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겨우 성장통 때문에 현채가 도망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지금 막내가 혼자 나가서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말 안 해? ”
은우경의 서릿발 같은 목소리에 채연과 이채가 서로를 바라봤다. 낭패란 얼굴로 눈을 질끈 감은 둘이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다 크면 정략결혼 시킬 거라고…… 이미 상대도 다 정해졌다고, 그 말만 했어….”
“진짜 장난으로 농담한 거야. 현채가 믿을 줄은 몰랐어.”
철없는 둘의 답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머리를 짚었다.
“숨기는 거 더 있으면 지금 말해라. 나중에 막내한테 들으면 너희 둘 다 일 년간 외출 금지당할 줄 알아.”
“일 년이나?”
“은이채가 막내한테 고릴라랑 결혼할 거라고 했어!”
“야! 은채연! 그러는 너는 엄마 아빠가 은현채 빨리 보내 버리고 싶어서 실험 시작한 거라고 거짓말했잖아!”
“지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듣다 못한 최세경이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호통쳤다. 그러자 은채연과 은이채도 분위기를 읽고 시무룩해져 입을 다물었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나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무뚝뚝하고 감정 없던 막내가 성장 연구를 받기 시작하자 처음으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게 신기해서 살짝 장난치려던 것이 조금 격해졌을 뿐인데.
은회장과 최세경은 그 나름대로 머리가 복잡했다. 첫째인 우경이와 둘째 우연이 이미 정혼 상대가 있었기에 현채가 장난을 믿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어쩌다 일찍 연이 닿은 상대가 있었을 뿐, 강제한 게 아니건만.
채신호의 턱짓에 은우연이 은채연과 은이채를 데리고 방을 나갔다. 은우경이 말했다.
“제가 신호 형이랑 어디 있는지 찾아볼게요. 두 분은 너무 걱정 마세요.”
“하아…. 가주님 귀에 들어가지 않게 조용히 움직여. 이 일 아셨다간 경을 칠 거다.”
“네.”
“아까 말했듯, 찾으면 접근 말고 보고부터 해라. 채연이랑 이채 말을 믿고 도망친 거라 괜히 억지로 잡으려 했다간 더 탈 날 수가 있어.”
이상한 것에 꽂히면 여간 고집이 아닌 막내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자리에 모인 넷이 동시에 깊은 한숨을 뱉었다.
* * *
꼴이 엉망인 녀석을 차마 그대로 두고 올 수가 없어 선우는 재킷을 벗어 고양이를 조심히 감싸 올렸다. 많이 지쳤던 건지 고양이는 별 반항 없이 들려 집에 오는 동안 눈을 감고 잠들었다.
집에 도착해 세면대에 따듯한 물을 받고 나오니 녀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조그만 게 어디로 숨었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던 선우는 바닥에 찍힌 까맣고 작은 발자국을 보고 작게 웃다 이어진 길을 따라갔다. 고양이는 옷방에 숨어 있었다.
“캬앙!”
“그래, 그래. 알겠어. 그래도 씻어야 해.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어린 게.”
제 손을 깨물려고 하는 것을 요리조리 피하며 다시 목덜미를 잡아 욕실로 데려갔다. 고양이는 물을 싫어한다고 해서 조금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녀석은 따듯한 물이 기분 좋은 듯 세면대 끄트머리에 턱을 괸 채 그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흙바닥에서 얼마나 뒹군 건지 구정물이 계속 나왔다. 생각보다 단단한 몸을 주물러 몇 번이나 씻기자 드디어 원래 털이 드러났다. 새하얀 은빛 털에 흐리게 얼룩무늬가 있는 멋진 녀석이었다. 처음엔 얼룩을 보고 뭐가 묻은 줄 알고 박박 씻겼는데 짜증스레 옹알대는 것을 보고서야 원래 지니고 있던 무늬라는 것을 알아챘다.
데리고 나가 털을 말려 줄 때까지는 가만히 고롱대던 고양이는 드라이어를 내려놓고 복슬한 털을 쓰다듬자 갑자기 펄쩍 뛰어 거리를 벌리더니 조그만 미간을 한껏 구겨 이를 드러냈다. 위협치고는 쌀알 같은 이빨이 귀엽기만 했다.
“야옹아.”
“……캬악!”
슬금슬금 다가가 몸을 말고 있는 고양이의 엉덩이를 쿡 찌르자 매섭게 이빨을 드러내 보이더니 쌩 구석으로 도망쳤다. 소파 밑 공간에 몸을 숨기곤 저를 노려봐 어둠 속에 푸른 눈만 빛났다. 제 품에 안겨서 시중을 받을 땐 언제고 지금은 적이라도 상대하는 듯 한껏 적대적인 모습이었다.
고양이가 상자를 좋아한댔나…….
머리를 긁적이던 선우는 공연히 창고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와 보란 듯 거실 한가운데 놓아 뒀다. 옷을 걸치고 현관으로 가자 고양이는 궁금한지 근처에 다가와 기웃거렸다.
“편하게 있어.”
다정히 말한 선우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나왔다. 밤거리를 걷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온통 집에 놔두고 온 고양이 생각뿐이었다.
처음엔 길 잃은 어린 수인이지 않을까 의심했는데 말을 걸어도 답이 없고 페로몬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면 수인은 아닌 모양이다. 예쁘게 생겼던데. 누가 키우던 고양이인가.
나름 매섭게 이를 드러내던 고양이를 떠올리곤 킥킥 웃었다. 제가 개 수인인 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건가.
밤이 늦었으니 오늘 밤만 재우고 내일 주인을 찾아봐야겠다.
집 근처 편의점에 가서 고양이 사료와 우유를 구매했다. 들어가기 전엔 담배를 피우려다 고양이가 싫어할 것 같아 다시 주머니 깊숙이 집어넣었다. 여기서 더 미운털 박힐 순 없지.
적당한 그릇을 꺼내 우유와 물, 사료를 각각 부어 줬다. 배고플 텐데 고양이는 사료를 본 척도 않고 소파 밑에 숨어 푸르른 눈만 빛내며 선우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알아서 먹겠지 싶어 그냥 두고 저 역시 냉장고 안에 있던 갈비탕을 꺼내 데웠다. 얼마 전 어머니가 갖다준 것으로, 이대로 뒀다간 또 상해 버릴 것 같아 생각난 김에 저녁으로 먹을 생각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냄새를 맡으니 꽤나 입맛이 돌았다. 다 준비하고 먹으려던 때 침대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이원의 전화일 것 같아 곧바로 일어나 다가가자 역시나 그가 맞았다.
“이원아. 어. 잘 끝났지. 하승빈 만나서 같이 왔…….”
오늘 어땠냐 물어보는 물음에 대충 있었던 일을 답하는데 밖에서 와장창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무슨 소리야?
“……별일 아냐. 그릇 떨어졌나 보다. 저녁 먹으려던 중이었거든.”
– 조심해야지. 내일 일정 없으면 만나자.
방을 나간 선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황당한 숨을 삼켰다. 제가 먹으려던 음식들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방금 전까지 뽀송했던 털이 흠뻑 젖은 고양이가 놀란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원래도 두툼한 꼬리가 두 배가량 부풀었다.
한 발 다가가자 놀라 펄쩍 뛰어오르더니 이리저리 튀어 다니다 부엌 밖으로 뛰쳐나갔다.
– 남선우?
“어…. 이원아. 뭐라고 했지?”
– 왜 이렇게 정신이 없어? 내일 일정 없으면 만나자고.
“아, 내일은 어렵겠는데. 할 일이 있어서.
– 뭔데?
“이원아.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밖에 난리라… 좀 치워야겠다.”
대충 둘러대고 끊은 선우는 허리를 굽혀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릇이 깨지진 않아 다행이었다. 떨어진 음식들을 대강 치운 선우는 부엌에서부터 길게 이어진 발자국을 따라갔다.
어두운 옷방에선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와.”
“…….”
아까 숨었던 곳에 있는 고양이를 들어 안으려 하자 매섭게 이빨을 드러내며 진심으로 물려 하길래 하는 수 없이 저도 본체로 변했다. 시야가 낮아지고 윤기 나는 까만 털이 몸을 뒤덮었다.
한순간에 날렵하게 생긴 검은 개로 변한 선우를 본 고양이는 많이 놀랐는지 입을 작게 벌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코로 옷가지들을 헤치곤 고양이의 목덜미를 물어 들어 올렸다. 팔다리를 아래로 쭉 뻗은 채 늘어진 고양이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어쩌면 아기 고양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소파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두 다리 사이에 놓은 채 젖은 털을 혀로 핥으니 고양이는 당황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봤다.
– 두 번이나 씻기면 화낼 것 같은데. 예쁜아. 좀 봐줘. 응?
– …….
– 근데 맛있다. 꼭 육식 동물 된 느낌이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