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2-14
14.
은현채를 향한 관심을 인정하고 단순히 길 잃은 고양이였던 그에게 연애 대상이 될 수 있단 가능성이 덮어씌워진 순간, 선우는 더 고민 않고 행동했다.
휴대폰 번호를 알아내고 몇 가지 약속을 정했다. 예를 들면 미행하지 않기라든가, 몰래 따라오지 않기, 사람 붙이지 말기 같은 것들.
현채 역시도 재빠르게 선우의 조건마다 제 바람을 붙여 놓았다. 전화하면 받아 주기, 같이 밥 먹기,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하지 않기, 저 말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기.
마지막은 당연히 기각당했으나 선우는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었다.
아직 사귀지도 않는 사이라기엔 꽤나 친밀하고 가까운 약속들이었다. 애초에 결혼하잔 말부터 나와 그런지 둘 모두 딱히 이상함을 느끼진 않았다.
현채의 휴대폰에 직접 제 번호를 입력해 주던 선우는 그의 배경화면을 보고 놀라 물었다.
“이 사진 어떻게 가지고 있어?”
다름 아닌 저와 현채가 테마파크를 갔을 때 직원의 권유에 함께 찍었던 사진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현채의 얼굴은 반쯤 잘려 있었고 환히 웃는 선우의 얼굴이 중앙에 보이도록 크롭된 사진이었다.
“옆에 다른 사람 연락처 써서 전달받았어.”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한 메일에 첨부된 제 막내아들의 사진을 보고 최 사장이 놀람 반 기쁨 반으로 까무러쳤다는 사실은 숨긴 채 현채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선우는 제 휴대폰과 현채의 것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일 년 넘게 하고 있었겠네? 내 얼굴 닳겠다.”
“응…….”
“자, 여기.”
선우가 휴대폰을 건넸다. 배경화면엔 그날 테마파크에서 선우의 휴대폰으로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뺨을 붙이고 찍은 덕분에 선우를 크게 보겠다고 현채의 얼굴이 잘릴 일도 없는 사진이었다.
찍기만 하고 보는 건 처음인 현채가 신기하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를 보며 웃은 선우가 손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를 헤집듯 쓰다듬었다.
“나중에 어디 놀러 가서 업데이트 좀 해야겠다. 이제 봄이니까 꽃도 많이 필 거고.”
“다 좋아.”
현채는 슬쩍 선우의 어깨에 기대며 속삭였다.
밤이 너무 늦기 전에 선우는 칼같이 현채를 데리고 신발을 신겼다. 예쁜 얼굴로 ‘진짜 가?’ 하고 속삭였을 땐 선우 역시 크게 흔들렸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말했다.
“현채 아직 어리고, 연애도 안 해 봤잖아. 처음부터 외박하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우리 연애해?”
“…….”
“……나 안 가.”
단단히 삐진 얼굴로 신발을 벗고 다시 들어오려는 현채를 잡아 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현채야. 그게 아니라……. 너무 빠른 것 같아서 그러지, 난.”
“결혼도 안 해 주는데 뭐가 빨라. 거짓말.”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입술에 시선이 갔다. 유독 매끈하고 말랑거리는 모양이라 저도 모르게 마른 입술을 핥았다. 현채를 허리를 감싸 안고 몸을 붙인 자세 역시 너무 가깝다는 위기감이 찾아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몰라 순진한 눈의 현채는 별생각 없어 보여 미미한 자괴감이 그 자리를 덮어씌웠다.
선우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현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하하…. 진짜 애 데리고 무슨…….”
“스무 살 넘었어. 애 아니야.”
“응. 현채 애 아니지.”
놀리듯 허리를 두드린 선우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덧붙였다.
“세 번만 데이트해 보자. 그리고 괜찮으면 그때 연애해. 네가 원하는 대로 결혼 전제로 하는 연애.”
선우 입에서 먼저 나온 결혼 이야기에 현채의 얼굴이 화사하게 펴졌다.
* * *
제가 말한 세 번이란 횟수를 빨리 깨야 하는 무언가로 생각했는지 현채는 바로 다음 날 연락해 오늘 데이트하자고 당당히 얘기했다.
한참을 웃던 선우는 오늘은 학교에 와 있으니 내일은 어떻냐고 물었고, 현채가 수락하며 그렇게 둘의 첫 데이트 날짜가 정해졌다.
정석적인 데이트 코스였다. 맛있는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을 산책했다가 영화를 보러 이동했다.
어두운 내부에 나란히 앉은 선우는 스크린에 따라 빛나는 현채의 얼굴을 구경하다 슬쩍 팔걸이 너머로 팔을 뻗어 손을 잡았다.
피부가 맞닿자 흠칫 놀란 현채가 옆을 돌아봤다. 앞을 보고 영화에 집중한 선우의 모습에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가볍게 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마주 잡은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선우가 손을 깍지 껴 잡으며 가볍게 흔들었다.
“영화 봐야지.”
제게만 들리게 속삭이는 낮은 음성이 목뒤가 오싹할 정도로 좋았다. 선우의 감시에 하는 수 없이 정면의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현채는 마디 사이사이 얽힌 느낌을, 가벼운 힘으로도 꽉 잡아 풀리지 않을 것 같은 모양이 좋아 선우 몰래 깍지 낀 손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같은 건물에 있는 오락실에 들어가 게임을 하고 또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식사를 했다.
하루 종일 찰싹 붙어 있었는데도 해가 지니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그저 아쉽기만 했다.
현채와 제집에 모두 향하는 버스를 타고 각자 귀가하는 것까지가 마지막 계획이었는데 일곱 정거장 더 가야 하는 현채가 냅다 선우를 따라 내려 버렸다.
“왜 내렸어.”
“헤어지기 싫어서. 선우랑 더 같이 있고 싶어서…….”
손을 꼭 잡고 시무룩하게 말하는 모습에 차마 단호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오늘 손잡아 준 게 좋았는지 틈만 나면 손을 얽고 만지작대는 모습마저 예뻤다.
“자꾸 이러면 어떡해. 그래도 집은 못 간다니까.”
“같은 아파트로 이사할래.”
“늑대 가문이랑 설표 가문끼리 싸울 일 있어?”
현채 역시도 말이 안 된다 생각했는지 입술을 삐죽이고 말았다.
현채가 기사에게 연락하고, 기사님이 도착할 때까지만 함께 있기로 약속하고는 선우는 현채와 함께 그가 항상 저를 기다렸던 공원 벤치에 앉았다.
막상 앉으니 가로등도 비껴 나가 조금 어두웠다. 이런 곳에서 항상 기다린 건가 싶어 속상한 마음이 일어 괜히 타박하듯 팔을 툭 쳤다.
“차라리 전화라도 하든가. 아니면 집에 찾아오기라도 하지 그랬어. 어딘지 알잖아. 왜 미련하게 기다려.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타이밍을 찾고 있었어.”
“무슨 타이밍?”
현채의 푸른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이 났다. 빤히 바라보던 현채가 말했다.
“선우를 잡을 수 있는 타이밍. 그런데 잘 안 보여서 그냥 기다렸어.”
설표다운 대답에 선우가 작게 웃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면 어떡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선우 포기 안 해.”
“사냥 실패야. 결국 못 잡았잖아.”
“응……. 선우는 어려워서. 그런데 그럴 줄 알고 있었어. 너무 멋있고 갖고 싶어서, 쉽게 잡히지 않을 줄 알았어.”
조곤조곤 말을 잇는 현채를 가만 바라보다 선우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에 맞닿은 선우의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가 이내 틈에 꼭 맞게 다시 맞물렸다. 눈을 크게 뜬 채 얼어붙어 있던 현채는 쪽,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입술이 멀어지자 머리가 터져 버릴 정도로 열이 올랐다.
입술만 뻐끔대는 현채를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의 선우가 마주 봤다. 아무 말 없이 허공에 맞붙던 시선에 어느 때보다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술이 재차 맞닿았다. 눈을 질끈 감고 요령 없이 꾹 입술을 눌러 오자 낮은 웃음을 흘린 선우는 혀로 입술을 가르며 파고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를 끌어안고 따듯하고 말랑한 혀를 감싸 문질렀다. 겪어 본 적 없던 쾌감에 현채가 움찔대며 얕은 신음을 흘렸다.
멀리서 차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선우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제 소매로 반질반질하게 젖은 입가를 닦아 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이렇게 잘 느껴. 나중엔 큰일 나겠네.”
선우가 하는 말이 반만 닿고 반은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미소가 어린 선우의 얼굴에 푹 빠진 현채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 * *
인생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데이트 역시 그러했다.
애초에 나중으로 예상했던 키스를 데이트 첫날 저질러 버렸을 때부터 톱니바퀴가 어긋났을지도 모른다.
당일치기로 수원에 가려고 했던 두 번째 데이트는 완전 엉망이었다. 만나자마자, 그리고 틈날 때마다 차에서 입술을 부딪친 탓에 수원은커녕 서울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키스가 처음인 현채와 그렇다 쳐도 선우 역시 겨우 키스에 이렇게 정신 놓고 열중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헤어질 때 퉁퉁 부은 서로의 입술을 보고 한참을 웃다 질리지도 않고 다시 입술을 맞댔다.
현채는 하루라도 빨리 그다음 데이트를 잡고 싶어 했지만 하필 늑대 일족의 만월과 일정이 겹쳐 선우는 일주일을 통으로 집을 비우게 됐다. 일족의 일이니 현채 역시 어쩔 수 없이 선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