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2-13
13.
이후로도 미행은 계속됐다. 제가 어딜 가나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나 그가 아니면 정장을 입은 날카로운 분위기의 사람들이 두셋씩 보였다. 제 차 뒤를 쫓는 검은 세단의 번호는 이제 외울 지경이었다.
늑대 구역에서까지 대놓고 따라다니는 통에 오히려 가문 간의 마찰이라도 생길까 제가 눈치 보여 웬만하면 늑대 구역을 벗어나 다니기에 이르렀다.
참다못해 직접 연락해 볼까 했지만 최근 활동을 시작한 현채의 연락처를 아는 이가 드물어 그마저 요원했다.
테라스로 나간 선우는 난간에 팔을 걸친 채 느린 한숨을 뱉었다. 시선을 내리자 바로 앞 공원 벤치에 며칠째 앉아 있는 인영이 보였다.
“끈질기긴…….”
바로 곁에서 빙글빙글 맴도는 현채에게 신경이 쓰였다. 아주 많이.
저게 설표의 사냥법인 건가.
계속 따라다녀서 어쩔 건데. 번호 알면서 연락은 왜 안 하고.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지 않나? 저렇게 눈에 띄는 얼굴로 늑대 구역까지 쳐들어오면 어쩌자는 거야.
평소 잔소리를 하는 성격이 아닌데도 답답한 마음이 치밀었다. 당장 아래로 달려가면 잡을 수 있겠다만 의도가 뻔히 보이는 고집에 저도 괜히 화가 나기도 하고 유치한 승부욕이 생기기도 했다.
피곤하면 알아서 들어가겠지.
선우는 그를 모른 척하고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씻고 나온 선우는 툭, 투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침실로 향하던 발을 멈췄다. 창밖을 보니 빗줄기가 꽤나 두꺼웠다.
집에 갔겠지?
당연하게 드는 현채 생각에 입술을 깨물었다. 테라스에 나가 보면 쉬이 확인될 일이었지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면 제가 정말 은현채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확인받는 느낌이라. 지금까지 애써 모른 척 눈 돌리고 있던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인정해야 할 것 같아서.
창가로 향하는 눈을 애써 잡아 돌린 선우는 침실로 몇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결국 참지 못하고 테라스로 발길을 내뻗었다.
당연히 없겠지. 시간이 몇 신데. 비도 쏟아지는데 그렇게 바보 같을 리가…….
그사이 해가 져 하늘이 어두컴컴해진 통에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몸을 기울인 선우가 현채가 앉아 있던 자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새카맣기만 한 암흑뿐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을 놓으며 몸을 들이던 순간, 도로변에 차 한 대가 지났다. 공원 한편을 길게 비추고 지나는 라이트 불빛에 검은 우산이 드러났다.
마냥 어둡던 그 자리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 선우는 테라스 문을 닫는 것도 잊고 급히 신발을 꿰어신고 일 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공동 현관에 다다라서야 제가 우산을 챙겨 오는 것을 잊었다는 걸 알았지만 그보다 그 자리에서 기다리던 게 누구인지 확인하는 게 더 급했다.
굵은 빗방울을 맞으며 도로를 건너자 점점 뚜렷이 보이는 인영에 점차 발걸음이 느려졌다.
급히 달려오는 소리를 듣고 옆을 돌아본 현채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선우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다가왔다.
“선우, 왜 비 맞고 있어. 우산 없어?”
“……은현채 너, 누가 여기서 기다리래.”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에 현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눈치를 살피듯 입술을 달싹이다 넌지시 말했다.
“기다린 거 아닌데. 공공장소는 아무나 올 수 있잖아.”
“기다린 거 아니야? 그럼 헛걸음했네. 난 이만 가 볼게. 공공장소에서 잘 놀아.”
선우가 등을 돌리려 하자 현채가 급히 팔을 붙잡았다.
“기다린 거 맞아! 선우가 나왔으면 하고 기다린 거 맞아. ……화났어?”
울컥해 쏘아붙이려던 선우의 눈에 현채의 젖은 머리가 보였다. 천천히 모습을 훑자 우산을 썼음에도 모두 피하지 못한 머리며 옷자락이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선우는 혼내려던 입을 다물고 현채의 팔을 잡아끌었다.
“일단 집 가서 얘기해.”
오랜만에 온 집이 반가운지 현채는 눈을 굴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밝은 곳에서 보니 영락없이 비에 젖은 생쥐 꼴이라 헛웃음을 흘린 선우는 수건을 가져와 소파에 앉은 현채의 머리를 닦아 주며 물었다.
“저녁 먹었어?”
“……응.”
“거짓말하면 혼나. 먹었어?”
그제야 동그란 뒤통수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마저 물기를 훔쳐 내며 뭘 먹여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힐끔 위를 올려다본 현채가 말했다.
“옛날 선우 같아.”
“……넌 옛날 현채 안 같아. 말도 안 듣고 바보같이 굴기나 하고.”
선우의 타박에 현채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궜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귀가 축 처진 것처럼 느껴져 어느새 보송하게 마른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밥부터 먹자.”
냉장고를 뒤져 봤지만 영 먹을 만한 게 없었다. 냉동실 깊숙한 곳에 미처 버리지 못했던 고기를 발견하긴 했지만 너무 오래되어 현채에게 줄 수는 없었다.
배달을 시키고 돌아오는데 현채가 문이 열린 게스트룸 앞에 서 있었다.
“거긴 청소 안 했어.”
뭘 보는 건가 싶어 다가간 선우는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고양이 용품을 보고 당황해 멈칫했다.
“하나도 안 버렸네.”
“…….”
“꼭 선우도 나 기다린 것 같아.”
솔직한 감상을 뱉은 현채는 미련 없이 뒤돌아 거실로 나갔지만 선우는 한동안 방 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분명한 예감이 심장에 내리꽃혔다.
아…. 은현채를 집에 들이면 안 됐는데.
그리도 바라 마지않던 선우의 체향 가득한 둥지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현채는 마냥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롱댔다. 그와 달리 선우는 조금 거리를 벌리고 떨어져 아름다운 침입자를 관찰하기 바빴다.
단단하고 선이 뚜렷해 남자다운 얼굴은 그의 성장을 뚜렷이 보이고 있었지만 촘촘하고 여리여리한 속눈썹과 얼음같이 맑고 푸른 눈, 분홍빛 입술 등은 어릴 때 그대로였다.
진짜 예쁘네. 반칙 아닌가.
현채는 다른 설표보다도 유독 더 예쁜 것 같았다. 제가 본 고양이 중, 아니 그 어떤 수인보다도 더.
선우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 내고 있던 현채의 새하얀 뺨이 점차 발그스름해졌다. 제게 집중한 선우가 좋았다. 말을 걸면 또 제게 관심 없다 거짓말을 할 것 같아 손가락을 꾸물대며 참았다.
선우가 제 청혼을 거절했지만 괜찮았다. 우리는 결혼하게 될 거니까. 선우는 제 평생의 반려니까.
선우가 제게 ‘결혼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땐 그 자리에서 울고 싶었지만 겨우 참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선우가 제게 마음을 열어 주는 그때를.
……바로 지금처럼.
따듯하고 간지러운 정적을 깬 건 초인종 소리였다.
“…아, 음식 왔나 보다.”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현채는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몰래 배달원을 노려보기도 했다. 토끼 수인인 배달원이 안에서 흐르는 적대감을 느끼곤 화들짝 놀라 빠르게 사라졌다.
선우는 이미 간단히 저녁 식사를 한 후라 현채의 것만 차려 주고 저는 맥주를 한 캔 따 맞은편에 앉았다. 함께 나온 샐러드를 꼭꼭 씹어먹는 현채를 본 선우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제 야채 잘 먹네?”
“연습했어. 먹고 빨리 크려고.”
현채가 선우를 빤히 바라봤다. 칭찬을 바라는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며 ‘잘했네.’ 하고 말해 주자 그제야 흡족하게 접시로 시선을 내렸다.
밥 먹는 모습까지도 조용하고 예쁜 현채를 구경하며 맥주를 홀짝이던 선우는 순간 캔에 입술을 댄 채 멈칫했다.
집, 어떻게 보내지.
“현채야. 운전기사 같이 왔지? 맨날 같이 다니던 안경 쓰신 분.”
“먼저 갔어.”
“……술 마시지 말 걸 그랬다. 그럼 내가 데려다줄 수 있었을 텐데. 갈 땐 택시 타고 가도 되지?”
그러자 현채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시위하듯 내보이는 불만에 선우 역시 입꼬리를 올렸다.
“자고 가는 건 안 돼.”
“맨날 잤는데 왜 안 돼. 자고 갈래.”
“형 곤란하게 할래? 안 된다니까.”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눈을 내리깔고 입을 꽉 다문 얼굴이 어찌나 고집스러운지. 그럼에도 전혀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자고 가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애써 잡아 누르며 입술을 뗐다.
“그땐 어렸고 지금은 다 컸잖아. ……우리 사이에 같이 자는 건 곤란한데.”
“그때도 다 컸고 지금은 더 컸어. 맨날 쫓아내면서 선우랑 내가 무슨 사인데.”
서운한 투로 중얼대는 현채를 웃는 낯으로 바라보던 선우가 녀석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흠칫 놀라 말을 멈추는 현채를 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서로 엄청 신경 쓰는 사이.”
“…….”
“그러니까 오늘은 집 가자. 현채야.”
말문이 막힌 듯 얼떨떨한 얼굴을 하던 현채는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재촉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