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2-10
10.
선우 몰래 나쁜 짓을 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토할 것같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선우가 먼저 뽀뽀 안 해 줬으니까.
속으로 변명하며 다시 누운 현채는 잠든 선우 품에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잠결에 익숙한 온기를 느낀 선우가 팔을 뻗어 현채를 꼭 끌어안았다.
너무 좋아. 선우랑 결혼할 거야.
모조리 내가 가지고 데려갈 거야.
* * *
혹시 비라도 오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화창하고 좋았다. 팔을 길게 뻗어 슬쩍 통창을 열어 확인하던 선우는 아직도 가슴팍에 딱 붙어 자고 있는 설표를 보고 웃음을 흘렸다.
분명 손만 잡아 준다 했는데 언제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졌는지 모르겠다. 내가 습관적으로 안은 건가? 이래서 따로 자려고 한 건데…….
포근한 침구와 적당히 뜨끈한 온기. 햇살까지 모두 기분 좋아 더 누워 있고 싶었지만 어제의 약속을 잊지 않은 선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늘어져 있던 현채가 졸린 눈을 깜빡였다.
“……선우?”
“놀러 가기로 했잖아. 일어나야지. 씻고, 아침 먹고 가자.”
막 일어나 눈에 졸음이 가득한데도 현채는 착하게 선우를 따라 일어섰다. 먼저 씻고 나와 젖은 머리를 털던 선우는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현채를 보고 놀란 눈을 깜빡였다.
보드라운 머리털이나 선이 얇은 미형의 얼굴 등은 그대로였으나 묘하게 높아진 콧대나 단단해진 턱선,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손등을 다 가리던 소매가 손목으로 제 자리를 찾아갔고 가볍게 걸터앉았음에도 바닥에 가뿐히 닿는 발을 차례로 훑었다.
“현채…… 키 컸어?”
저걸 키 컸다고 해도 되는 걸까. 진화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얼떨떨한 제 물음에 그제야 제 몸을 둘러본 현채는 대수롭지 않은 낯으로 ‘응.’ 하고 대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씻고 올게. 선우.”
옆을 지나치는 현채의 보송보송한 머리칼이 코끝을 스쳤다. 어젠 어깨까지도 오지 않았는데…….
꼭 꿈이라도 꾸는 기분에 선우는 느리게 얼굴을 쓸었다.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밥을 먹다 힐긋 현채를 살폈다. 아직 어린 건 마찬가지였지만 애기 같던 전과 달리 지금은 젖살도 빠지고 예쁘던 이목구비가 한층 깊어졌다. 동그랗고 귀여운 귀가 없었더라면 누구냐고 물어볼 정도라 이젠 실수로라도 애기 소리는 하면 안 되겠다 싶었다.
“하루 만에 키가 십 센티는 큰 것 같다. 꼬리도 없어졌고.”
“설표는 원래 한 번에 커.”
“지금 몇 살인데?”
생각해 보니 새삼 여태껏 현채의 정확한 나이를 모르고 있었다. 궁금해 귀를 기울이는데 양 볼을 발그레하게 붉힌 현채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 스무 살은 안 됐어.”
“그거야 당연하잖……. 아하하.”
스무 살 얘기를 왜 하는지 모르지 않는 선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질리지도 않는지 곧바로 이어지는 결혼 타령으로 나이 얘기는 어영부영 넘어가고 가벼운 아침 식사를 마쳤다.
아침까지도 어디로 놀러 가야 할지 고르지 못한 현채 대신 선우가 선택한 곳은 최근 지어져 큰 인기를 누리는 테마파크였다. 한 시간 거리밖에 되지 않는 데다, 수영장부터 운동장까지 수인들을 위한 시설도 잘 조성되어 있다고 해 현채와 함께 가면 좋을 듯했다.
차 키와 휴대폰을 챙겨 나오자 옷을 갈아입은 현채는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제가 가진 옷 중 조금 작은 것을 줬더니 현채에게 넉넉하게 잘 맞았다. 덩치는 산만 해졌어도 여전히 말 잘 듣는 아이 같은 모습에 미소를 걸친 선우가 다가가 머리에 모자를 얹었다. 캡 모자 사이로 귀가 쏙 숨겨졌다.
설표라는 사실을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나니 도톰하고 동그란 귀나 통통한 꼬리의 무늬가 너무도 설표 그 자체라 그대로 드러내고 나갈 수가 없었다.
“잘 어울리네.”
모자를 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가자.’ 하고 말하니 현채가 일어나 손을 잡았다.
주말이 아닌데도 테마파크에는 사람이 꽤나 많았다. 가볍게 둘러보며 다섯 가지 구역을 모두 둘러볼 예정이었는데 현채가 스릴 있는 놀이기구 타는 것을 재밌어해 첫 번째 구역에서 예상보다 오래 머물게 되었다. 보여 주고 싶은 게 많아 이만 다음 테마로 갈까, 하고 말하려 할 때면 롤러코스터를 가리키며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데…….
차마 말 못 한 선우는 연달아 다섯 번을 기다려 타고야 놀이공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바로 앞 햄버거 가게로 가 가볍게 끼니를 때웠다. 각자 두 개씩 주문했는데 먹지 않고 꾸물대는 게 이상해 바라보니 몰래 양상추를 빼내고 있었다.
“현채 뭐 해?”
“먹을 거야.”
다시 주섬주섬 빵을 벌려 넣으려 하기에 킥킥 웃으며 손을 잡아 멈췄다.
“먹기 싫으면 안 먹어도 돼. 아직 맛없지?”
“……연습할게.”
“착하긴.”
식사를 끝낸 둘은 호수 크루즈를 타고 옆 구역으로 넘어가 장미로 가득 채워진 정원을 꼬마기차를 타고 돌아보고, 액티비티 구역에서 집라인과 카트를 타기도 했다.
현채를 놀아 줄 생각으로 고른 테마파크인데 제가 더 재미있게 즐긴 느낌이다. 어느새 익숙하게 손을 잡고 걷던 선우와 현채는 아이스크림과 추로스를 사 들고 근처 벤치에 앉았다.
코끝에 아이스크림을 묻히고 먹는 현채의 모습에 웃으며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찍던 차,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쭈뼛대며 다가와 물었다.
“저기, 뭐 좀 물어봐도 돼요? 그 머리띠 어디서 살 수 있어요?”
“머리띠요?”
“네. 이쪽 분이 쓰신 거요. 설표 머리띠죠. 너무 예뻐요!”
학생이 가리킨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현채의 동그란 머리와 뾰족 솟은 귀가 있었다.
……모자 어디 갔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쓰고 있던 모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현채의 뽀얗고 도톰한 귀가 드러난 상태였다. 현채 역시 이제야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뜨곤 제 머리에 손을 올렸다. 더듬는 손끝에 탄력 있게 퉁기는 귀를 보고 학생들이 탄성을 흘렸다.
“와, 진짜 같아.”
“새로 나왔나? 우리 저걸로 다 맞추자.”
그들의 대화에 선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테마파크 내에서 동물 귀 머리띠를 쓰고 다니는 사람이 많긴 했다. 설표는 흔히 볼 수 없는 수인이라 머리띠라고 확신하는 듯싶었다. 수인이란 사실을 들키지 않은 게 다행이긴 했지만 더한 실망감을 안겨 주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미안한데 이건 여기서 파는 게 아니야. 집에서 가져왔거든.”
“아…… 정말요?”
“인터넷으로 따로 주문했구나. 내가 말했잖아. 그게 훨씬 싸고 종류 많다고.”
“그래도 와서 사는 게 낭만이지.”
“근데 혹시, 연예인이에요?”
“야, 하지 마! 알려 줘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인사한 학생들이 왔던 것처럼 후다닥 사라졌다. 현채는 괜히 신경 쓰이는지 아직도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미안. 모자 잃어버렸어.”
“괜찮아. 누가 주워서 잘 쓰고 다니겠지. 그보다…… 신경 쓰여?”
“조금….”
귀를 만지는 손을 잡아 내린 선우는 주위를 둘러보다 기념품점을 발견하고 현채를 잡아 이끌었다.
이것저것 모자를 써 보는데 대부분 테마파크용 귀여운 디자인인 데다 갑자기 골라야 해서 그런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옆에서 사진이나 찍으며 킥킥대던 선우는 슬쩍 옆 코너를 보고는 다가가 머리띠를 하나 골라 왔다.
“이건 어때?”
선우의 머리에 검고 뾰족한 귀가 얹어져 있었다. 그를 본 현채가 입술을 깨물었다.
“……선우랑 하나도 안 똑같잖아.”
“그렇지? 아무래도.”
강아지 머리띠는 아래로 축 늘어진 갈색밖에 없길래 늑대 머리띠를 골라온 거라 제 본체와 다르긴 달랐다. 작게 웃은 선우가 벗으려 하자 현채가 팔을 잡아 말렸다.
“아니야. 잘 어울려.”
“그럼 써야겠다.”
선우와 현채는 나란히 동물 귀를 달고 나왔다. 이후 남은 구역을 구석구석 돌면서도 현채는 선우를 힐끔힐끔 돌아봤다. 선우가 사진을 찍던 것처럼 저는 두 눈에 꼭 담으려는 듯이.
이후로도 이것저것 타고 구경하며 놀러 다닌 둘은 어느덧 마지막 테마 구역에 다다랐다.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원체 테마파크가 넓은 탓에 어느덧 어스름히 해가 지고 있었다. 파크 곳곳에는 조명이 들어오며 밤 테마로 바뀌었다.
마지막 구역은 수인들이 본체로 돌아가 체험하고 놀 수 있는 어드벤처가 있는,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었지만 현채가 본체로 변하는 건 둘 다 원치 않아 구경만 했다.
왠지 그냥 가긴 아쉬워서 나무 모양 전망대에 올라가 야간 조명이 들어온 테마파크를 구경했다. 목에 사진기를 맨 직원이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다. 저희에게도 다가와 ‘사진 찍어 드릴까요?’ 하고 묻는데 괜찮다고 거절하려던 선우는 넌지시 현채에게 물었다.
“찍어 달라고 할까?”
현채의 하얀 귀가 쫑긋 섰다.
“……어떻게 알았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찍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알았느냔 뜻이었다. 선우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현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냥. 다 알아.”
밤의 테마파크를 배경으로 둘의 사진을 남겼다. 휴대폰 번호를 알려 주면 링크를 보내 주겠단 말에 선우는 명단에 제 번호를 써넣었다. 선우가 사진에 대한 값을 치르는 사이 슬쩍 움직인 현채는 펜을 들고 선우의 번호 옆에 무언갈 적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