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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Footprint (수인물 au)

1.
화려한 장식 사이로 한껏 꾸민 사람들이 모여 웃는 낯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어 있던 선우는 옆을 지나는 하승빈을 발견하고는 자연스레 무리를 빠져나왔다.
오늘은 코모도왕도마뱀 일족의 창립 80주년 행사였다. 늑대 일족을 대표해 참석한 이원을 따라왔다가 혼자 남게 되어 꽤나 곤란했는데 하승빈을 핑계로 벗어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승빈.”
다가가 어깨를 툭 치자 놀라 펄쩍 뛴 승빈이 선우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했다.
“뭘 그렇게 놀라.”
“김여진인 줄 알았다고. 걔 오기 전에 나가야 돼.”
안 좋게 파혼했다는 소리가 진짜였는지 하승빈은 두리번대며 전 약혼자가 왔는지 안 왔는지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모순적이게도 그 모습이 뱀 수인인 김여진의 취향을 그대로 빼다 박아 놓은 꼴이라 선우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여진 누나 이런 데 잘 안 오지 않아?”
“누나네 코모도랑 친해. 넌 최이원이랑 왔냐?”
이원을 찾는 눈빛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원인 일 있어서 먼저 갔어.”
“너는 언제 갈건데.”
“글쎄. 곧?”
조금만 얼굴 비치다 오랬으니 이쯤 하고 가도 될 거다. 시계를 보는 선우의 손목을 덥석 잡은 하승빈이 저도 데려가라며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차 가져왔지? 그럼 나 좀 데리고 가. 진짜 빨리 인사하고 올게. 알겠지? 약속했다? 같이 가는 거야!”
가지 말고 기다리라며 징징대는 소리에 선우가 결국 알겠다 답하고 나서야 하승빈은 안쪽으로 향했다.
선우 역시 알코올이 들어 있지 않은 잔을 하나 들고 내빈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파충류 수인들을 피해 인적 드문 테라스 쪽 자리로 향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지만 파충류는 함께 있으면 불편하단 말이지…….
이원이 본격적으로 승계를 다투기 시작한 이후 이런 자리가 많아져 조금 피곤했다. 잔만 홀짝이며 승빈을 기다리던 차, 가림막 너머로 다른 이들의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못 가. 그때 설표 일족 소개식이잖아.”
“정말요? 전 초대장 못 받을 것 같은데… 오빠, 저도 데려가면 안 돼요?”
“고민해 볼게. 같이 가자는 애들이 하도 많아서.”
“부탁해요. 정말 가 보고 싶다구요.”
“거기 막내도 나온다냐?”
“아직까지 얘기 없는 거 보면 안 나오지 않을까?”
“누구요? 은이채 말하는 거예요?”
“아니, 은이채 밑으로 한 명 더 있어. 그런데 여태 밖에 보인 적 없다나 봐. 아무도 본 적 없어. 이름도 몰라.”
“어떻게 그래요?”
얘기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순간 줄어들었다.
“어디 모자라단 소문이 진짜인가 봐. 신비주의에 감춰져서 그렇지 다른 일족이었으면 이미 스캔들로 난리 났을걸.”
“듣기로는, 인간화를 못 한다던데…….”
졸지에 엿듣는 꼴이 되어 버린 선우는 미간을 찌푸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역시 설표 일족의 소문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으나 이런 식으로 듣는 건 불편했다. 제가 어느 가문을 평가할 위치도 아니고.
자리를 피한 선우는 밝은 곳으로 나오자마자 누군가를 맞닥뜨렸다.
“선우 안녕.”
“누나. 오셨네요.”
하승빈이 그렇게나 피해 다니던 김여진이었다. 머리를 깔끔히 넘긴 여진이 호선을 그린 눈으로 선우를 훑었다.
“선우는 점점 잘생겨지네. 오늘은 어쩐 일로 혼자야? 맨날 늑대랑 짝처럼 붙어 다니더니.”
“이원이는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갔어요. 저도 곧 가려고요.”
“바쁜데 안 잡을게. 조심히 가.”
선우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누나도 오늘 유독 예쁘세요. 그리고…….”
선우는 아까부터 거슬리던 푸른 깃털 하나를 떼어 주며 눈을 찡긋했다.
“승빈이는 제가 데려갈게요. 부탁을 받아서.”
“……여우 같긴.”
어이없는 한숨을 뱉는 여진을 뒤로하고 아까 승빈이 간 방향으로 움직였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수많은 방이 늘어선 복도에 옅게 퍼진 술 냄새를 따라가자 테이블에 엎드린 채 자고 있는 하승빈을 발견했다.
“야. 일어나.”
“으응. 누나…….”
어깨를 잡아 세우자 허리를 잡고 안기는 게 징그러워 손끝으로 이마를 쭉 밀어냈다. 립스틱이 번져 붉어진 입가와 주위에 날리는 푸른 솜털이 가관이었다. 작은 한숨을 뱉은 선우는 하승빈의 한쪽 팔을 들쳐 메고 부축해 밖으로 나왔다.
꿈뻑꿈뻑 조는 놈을 겨우 차에 태우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앓는 소리를 냈다. 술 냄새가 지독해 말없이 창문을 열었다.
“아으, 취한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
“인사하러 들어갔는데 김여진이 있잖아. 야, 근데 내가 웃긴 거 알려 줄까? 김여진이 요즘 만나는 사람 있다고 그랬다? 존나 웃기지. 파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남자를 만나냐? 진짜 아니겠지? 나 신경 쓰라고 일부러 거짓말한 거겠지?”
“글쎄. 누나가 그런 거 가지고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지 않나. 여진 누나도 후계자니까 슬슬 결혼 압박 받을 거 아니야. 급할 때 됐으니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누나 그런 사람 아니야. 말조심해.”
“…….”
버럭 화내는 하승빈의 반응에 선우가 헛웃음을 뱉었다.
커플 싸움엔 끼는 거 아니라더니.
하지만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다. 후계 구도와 거리가 먼 하승빈은 아직 실감을 못 하는 듯했으나 각 가문의 후계자들은 일찍이 정해진 정략혼 상대가 있거나 슬슬 결혼 준비를 서두르는 중이었다. 이원 역시 늑대 일족의 먼 친척 중 한 명과 결혼을 전제한 만남을 이어 가고 있었고, 오늘 먼저 자리를 비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미련 가득한 하승빈의 한탄을 들어 주며 집까지 데려다준 선우는 다시 차에 올라타려다 멈칫하곤 휴대폰을 들었다.
담배를 꺼내 물며 신호음을 기다렸지만 이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선우는 잘 끝났다는 메시지를 보내 두고는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한 대 피우고 갈 생각에 입술에 걸친 담배를 까딱이며 인적 드문 골목으로 향했다. 가로등도 없는 곳에서 라이터 불을 켜는데 아래서 삐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작아 잘못 들었나 하다 혹시 몰라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불빛이 비친 자리에 꼬질꼬질한 무언가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었다. 흙탕물과 먼지로 뒤덮여 형체를 알기 힘든 털 뭉치는 몸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간 선우는 그것의 목덜미를 단번에 잡아 올렸다. 몸을 바둥거리며 경계하듯 이빨을 드러냈지만 힘이 없는지 쉭쉭거리는 쇳소리만 흘렀다.
네 다리를 아래로 쭉 뻗으며 노려보는 푸른 눈을 마주한 선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고양이?”
* * *
저택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현채가 뭘 어째?”
“회장님…….”
은 회장과 최세경, 함께 있던 채신호까지 소식을 듣고 본가로 달려왔다.
“실장님,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보고하세요.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은우경의 독촉에 머뭇대던 양 실장이 어렵게 입술을 뗐다.
“막내 도련님의 성장 검사를 진행 중이었는데 오늘 점심 이후에 갑자기 검사를 받지 않겠다며 저택을 나가셨습니다. 동네 입구에서 본체의 모습으로 발견된 것이 마지막으로…….”
“뭐라고?”
“아아, 현채야…….”
최세경이 아득한 표정으로 휘청거렸다.
설표 수인은 다른 수인들과 다르게 성장기가 짧고 굵다. 성장기를 맞으면 빠르게 자라나지만 그 전까지는 같은 나이의 다른 소동물보다도 체구가 작고 감정이나 관계를 받아들이는 속도도 더디다.
그 때문에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도 높아 유년기엔 일족을 벗어나지 않고 지내다 성장기를 맞이한 후에야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다. 설표 일족이 신비롭다고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중 막내인 현채는 유독 그 속도가 느려 아직까지 성장기를 맞지 못한 채였다. 인간 나이로는 성년에 가까워져 가는데 본체는 고양이보다도 작으니…….
기다리다 못해 잘못될까 걱정되어 인위적으로 성장기를 맞게 하는 연구를 이제 막 시작한 터였다. 현채와도 대화를 끝마친 지 오래고 그 역시 동의한 일이었는데 왜 이제 와서 집을 나간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족들에 비해 유독 작고 여린 막내가 혼자 있다 생각하자 끔찍한 상상만이 이어졌다.
“여보, 우리 현채가 왜……. 어떡해. 우리 현채, 그 작은 것이 잘못되면…….”
“말도 않고 도망갔다는 게 이상하군. 그럴 애가 아닌데.”
“혹시 검사에 상처라도 받은 걸까?”
“제가 애들 풀어서 찾고 있습니다. 연락 닿는 대로 바로 데려오라 하겠습니다.”
“신호야, 어디 있는지 파악만 하고 접근하지 말라고 해. 내가 얘기해 보아야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