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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억제제를 먹지 않은 즉시 러트 사이클이 오는 것도 아니고 조금 딜레이가 있을 거라 괜히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벌써 몇 주째 참고 있는 건지. 하지만 현채 말처럼 조금의 가능성도 위험한 게 사실이다.
“현채야아……. 형 힘들다.”
현채의 무릎을 베고 장난스레 앓는 소리를 내던 선우는 머리 위로 내려앉는 나직한 중얼거림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못되면 어떡하죠.”
“잘못되는 게 어디 있어.”
“그래도, 각인 안 되면 어떡해요.”
입꼬리를 올린 선우가 현채의 허리를 당겨 눕혔다. 저와 시선이 맞는 옅은 눈동자를 마주 바라봤다.
“각인 안 돼도 바뀌는 게 있어? 우리가 사귀는 것도 나중에 결혼할 거란 사실도 다 그대론데. 이번 일이 효과가 없으면 다른 방법 찾아서 계속 노력해 보면 되는 거고.”
“……네.”
“현채 네 치료가 중요한 거니까. …아프지만 마.”
“안아 줘요.”
현채는 꾸물꾸물 선우의 품에 파고들어 눈을 감았다. 선우의 위로에 조급하고 초조하던 마음은 조금 진정됐지만 불안하게 뛰는 심장과 이상하게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한 감각은 그대로였다.
* * *
드디어 마지막 출근이었다. 마지막 날인 만큼 업무는 간단한 작업뿐이었지만 선우와 동기들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끝까지 방심하지 마. 앤드류 출근하면 또 지랄할걸.”
“내말이.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안 오지? 또 지각인가?”
“저번에 보니까 지각 처리도 안 하는 것 같던데. 아휴, 됐다. 무슨 상관이람.”
평소에도 몇 번 늦는 모습을 보였던 앤드류라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그러나 각 팀을 돌며 6주간 함께했던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주어진 업무를 일찍 끝낸 후, 팀장들과 이번 기수 인턴들이 모두 모여 단체 사진을 찍을 때까지도 앤드류는 출근하지 않았다.
쉬는 날이겠거니 하고 별생각 없이 넘겼지만 점심시간이 끝난 후 소식통인 수빈이 달려와 상황을 전했다.
“얘들아! 앤드류 교통사고 났대!”
“뭐? 진짜?”
“어. 옆 팀에 내 동기 있댔잖아. 거기서 들었는데 어젯밤에 집 가다 사고 났나 봐. 다른 차가 와서 박았는데 대포차라 범인도 못 잡았대.”
“뭐야, 어쩌다……. 많이 다쳤대?”
“입원했대. 말하는 거 들어 보니까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던데. 근데 앤드류 저번 달에 차 새로 뽑았잖아.”
“미친, 보상 못 받으면 어떡하냐.”
재연과 윤영이 동정하며 대화하는 사이 악감정만 남은 정진은 자업자득이라며 이죽댔다.
동기들이 앤드류의 사고로 떠드는 동안 선우는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나올 때 현채의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아 걱정돼 연락했는데 몇 시간 전 보낸 메시지를 아직까지도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이라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전화도 해 봤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아직 자나? 그럴 리가 없는데.
고민에 빠져 있는 선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하윤이 손을 저으며 크게 이름을 불렀다.
“남선우!!”
“……어.”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동기들이 모두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길래 넋을 빼고 있어.”
“선우야, 너 오늘 시간 안 된다고 했지? 그럼 언제 돼?”
예전부터 인턴십 끝나면 한번 모이자는 말을 했는데 그 날짜를 잡는 중이었나 보다. 선우는 잠시 일정을 되짚어 보곤 답했다.
“다다음 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뭐? 그렇게 멀리?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쁘냐?”
“그럼 아예 개강 전에 보는 걸로 하자. 금요일 어때?”
“난 가능.”
“나도 차라리 그때가 좋아.”
“선우 때문에 미룬 거니까 빠지면 안 된다?”
“그럼, 당연하지. 너희 다 못 와도 나는 무조건 갈게.”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선우는 답장이 오지 않은 화면에 시선을 한 번 더 뒀다.
팀과 동기들에게까지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나왔다. 그동안 조금씩 늘어난 짐은 어제 미리 가져간 덕에 두 손이 가벼웠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한 시간가량 일찍 끝나 선우는 바로 집에 들어가려다 행선지를 바꾸었다.
아침부터 저기압이었던 현채가 마음에 걸려 전에 맛있게 먹었던 한정식 집에서 도시락과 와인을 포장하고, 동네 꽃집에서 꽃다발까지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이른 귀가에 놀랄 현채를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양손 무겁게 도착한 선우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현채야! 나 왔…….”
문을 열자마자 물씬 풍기는 짙은 레몬 향 페로몬에 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과 종이 가방들이 현관 바닥에 떨어졌다.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예감이 들어 선우는 신발을 벗어 던지고 급히 안으로 달려갔다.
직감적으로 침실이 아닌 옷방으로 향했다. 살짝 열린 문틈에서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쌓인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침을 꿀꺽 삼킨 선우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내부는 온통 엉망이었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옷들이 죄다 끄집어내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바로 아침까지 덮고 있던 이불과 시트는 구겨진 채로 말려 있었다. 그것들 사이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쓰러진 현채가 있었다.
“현채야. 현채야!”
상기돼 붉은 얼굴로 가쁜 숨을 뱉던 현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천천히 눈을 뜬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선배?”
얼마나 물어뜯은 건지 입술에 피가 비쳤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몸을 추슬러 안았다.
“응. 현채야. 나 왔어. 왜 그래. 어디 아파? 언제부터 이랬어.”
선우가 오기 전까지 생명줄처럼 붙잡고 있던 그의 옷들과 체향이 남은 이불을 그제야 놓은 현채는 선우의 품에 파고들며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생각보다 옅은 페로몬에 어서 더 내어 달라 애원하듯 얼굴을 부볐다.
“몰라, 모르겠어요……. 선배 페로몬 왜…….”
러트 사이클과 비슷한 모습에 선우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페로몬을 풀어 진정시키려 했지만 억제제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선배, 흐으, 왜…. 왜 안 해 줘.”
계속해 타고 오르며 입 맞추려는 현채를 꼭 끌어안은 채 휴대폰을 들어 서둘러 오준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난 검진 때 그가 강조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억제제 한 달 치입니다. 일주일 이상 복용하다 멈추면 바로 사이클 시작되니까 이용해서 주기 맞추세요. 현채 님 건 조금 더 맞춰서 제가 이번 주 내로 약 보낼게요. 그사이엔 원래 복용하던 걸로 계속 드시면 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사이클 전까지는 관계를 자제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페로몬 균형이 깨질지도 모르니까요.’
현채에게 러트가 온 것 같다는 말에 당황했던 오준일은 선우의 러트 사이클이 시작될 때까지 절대 응하지 말고 참으라고 신신당부했다.
-힘드시겠지만 꼭 좀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답하긴 했지만 열에 들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듯 애원하는 현채를 거부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겨우 침대에 눕히고 흐른 땀을 차가운 물수건으로 닦아 줬지만 겨우 이런 걸로 우성 알파의 러트를 진정시킬 수 있을 리 없었다.
“윽, 선배. 선우…. 제발. 흐으…… 저 못 참겠어요.”
페로몬 관련 약은 줄 수 없어 해열제를 먹이고 차가운 이온음료를 먹여도 몸 안쪽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열을 어쩔 수 없었다.
자꾸 사라지는 선우가 마음에 안 드는지 현채는 두 팔로 끌어안고 놓아주질 않았다. 뒷목과 귓바퀴를 핥아 대며 아래를 문지르고, 그를 못 하게 하니까 끙끙대며 ‘아파요…….’ 하고 속삭이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는데 차라리 등을 돌리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할 무렵, 등허리를 쿡쿡 찌르는 단단한 성기의 양감에 숨을 들이켰다. 현채뿐 아니었다. 계속해 쏟아지는 현채의 페로몬에 이미 제 성기도 한껏 부푼 지 오래라 견디기가 힘들었다.
계속해 치대는 현채 역시 온 힘 다해 참고 있었다. 선배가 하지 말랬으니까. 참으랬으니까. 선우와 각인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새는 울음은 막아지지 않았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섰고, 제 페로몬을 받아 주지 않고 무시하는 선우에게 서럽고 애탄 마음만 들었다.
“선배, 저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