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1-7
7.
뭘 하든 모두 사랑스럽고 애탔다. 축 늘어져 따끈따끈한 손을 만지작거리다 입가로 가져갔다. 쪽, 가볍게 입 맞춘 네 번째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씹었다. 다 씹어 삼키고 싶어.
선배는 왜 이렇게 빛이 나서. 다른 사람들 눈길을 끌어서 날 힘들게 하는 걸까.
“하지 마요. 진짜 짜증 나니까.”
제게서 선우를 빼앗아 가려는 것들은 다 싫었다. 은우연도 채신호도, 그리고…….
* * *
머리를 붙잡고 앓는 선우에게 후다닥 달려가 얼음이 동동 뜬 맑은 황금빛의 액체를 건넸다.
“왜 그렇게 많이 마셨어요. 여기요. 마셔요.”
“……고마워.”
꿀물을 들이켜며 크게 움직이는 목울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현채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 차리고 선우를 바라봤다.
“네?”
“어제 서정진 호텔 데려다준 거 현채 너야?”
“서, 뭐요? 아……. 그 사람. 네. 기사님한테 부탁했어요.”
“내가 챙겼어야 하는데……. 현채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다음부턴 그렇게 많이 마시지 마요.”
“응. 알겠어요.”
앉은 채로 허리를 껴안은 선우가 애교 부리듯 배에 볼을 부볐다. 얼굴을 붉힌 현채는 손을 움찔대다 선우가 제게 하듯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었다.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숨기지 못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랜만에 진탕 마신 탓에 선우는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씻고 나와서도 꾸벅꾸벅 조는 선우를 대신해 셔츠 단추를 끼워 주던 현채가 갑자기 멈칫했다.
멈춘 손길을 느낀 선우가 졸린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현채의 모습에 의아하게 ‘왜?’ 하고 묻자 쑥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결혼한 것 같아서요.”
실없는 대꾸에 피식 웃었다. 이 정도면 사실혼이지 않나 생각했지만,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냈다간 현채가 코피라도 흘릴 것 같아 속으로만 되뇌었다.
차가 회사 근처에 매끄럽게 멈춰 섰다. 선우는 내리기 전에 현채에게 짧게 입 맞췄다.
“저녁에 보자. 형님이랑 누님한테 안부 전해 줘.”
“네.”
오늘 은우경과 은채연을 만난다는 현채에게 잘 다녀오라 인사한 선우가 현채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 차에서 내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현채는 순간 스치는 생각에 서둘러 달려 나갔다.
“선배, 선배!”
“현채야?”
선우가 의아하게 뒤돌았다. 보기 드문 잘생긴 미남의 만남에 주변의 시선이 힐끔힐끔 둘을 향했다.
“선배. 억제제 놓고 갔어요.”
작게 속삭인 현채가 주머니 깊이 약 봉투를 넣어 줬다.
억제제는 인턴십 마무리를 앞두고 저번 주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오늘 워낙에 정신없던 터라 챙기는 걸 깜빡 잊었다. 예정된 러트 사이클 주기를 미루고 있기에 꼭 먹어야 하는데 현채가 아니었다면 곤란할 뻔했다.
“오늘 완전 정신없네. 고마워. 현채야.”
“……일 열심히 하고 와요.”
항상 마지막 인사를 하고 난 뒤엔 자연스레 입 맞추던 습관을 이성을 잡고 애써 참아 낸 현채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잠시의 침묵에 스쳐 지나간 어색함을 느낀 선우가 웃음을 흘렸다.
“이따 보자.”
볼을 살짝 두드리곤 뒤돌아 회사로 향했다.
먼저 와 있던 팀원에게 인사를 하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빠듯하게 도착하던 정진이 오늘만큼은 저보다 일찍 도착해 있었다.
인원수에 맞춰 음료를 사 두었는지 하윤이 한쪽에 놓여 있던 커피를 건넸다.
“선우 넌 아이스아메리카노 마시지?”
“네가 사 왔어?”
“아니. 정진이가 사 왔어. 아침부터 시간이 남았다나.”
네가 웬일이냐며 돌아보자 서정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남선우. 안 버리고 가서 고맙다…. 어제 나 많이 취했냐?”
“글쎄……. 나도 마지막은 잘 기억이 안 나서. 바로 잤을걸?”
고개를 젓는데 쭈뼛쭈뼛 다가온 서정진이 슬쩍 물었다.
“어제 네 애인분이 데려다주신 거라며. 계산도 다 되어 있던데, 호텔비 어떻게 드려야 하냐?”
“아아, 괜찮아. 마음대로 데려다 놓은 건데 네가 왜 내.”
“뭐? 아니, 거기 비싼 데던데…….”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저은 선우는 하윤에게 받은 커피를 입에 대며 자리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빈과 윤영, 재연까지 줄지어 들어왔다. 다들 평소보다 조금씩 늦은 게 어제의 여파가 남아 보였다.
팀원 중 그나마 제일 상태가 멀쩡한 선우와 하윤이 올라가 데이터 전달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오가는 길에 평소와는 다른 시선이 느껴졌다.
뒤돌면 속삭이는 소리라든가 직접적으로 말은 걸지 않았지만 수군대는 느낌이 들어 내심 의아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들어왔다.
그 이유는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됐다.
“선우야. 오늘 애인이 데려다줬어?”
뜬금없는 수빈의 물음에 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떻게 알았어?”
“양 대리님이 오늘 너 출근하는 거 봤나 봐. 같이 온 사람 완전 잘생겼다고, 선우 네 애인이냐고 물어보길래 모른다고 하고 들어왔어. 다른 사람들도 난리던데.”
“남선우보다 더 잘생겼다고?”
재연이 빼꼼 고개를 들어 물었다. 옆에 있던 정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불공평하다고 중얼거렸다.
그제야 수군거리던 분위기의 이유를 알게 된 선우가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현채야 워낙에 예쁘니 눈에 띄는 게 당연하지만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뭐라고 소문났는데?”
“음, 아! 한국대에서 유명했다며? 아는 사람도 있나 본데. 연기과라던데 정말이야?”
“진짜? 남선우 너 CC였냐?”
선우는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점심시간에는 같은 사무실을 쓰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받기도 했다. 겨우 회사 앞에서 잠깐 만났을 뿐인데 퍼진 소문이 가관이었다.
소문 속에서 현채는 연기과를 졸업하고 현재 유명한 소속사에 속한 신인 배우이며 어느새 천만 영화에도 조연으로 출연했던 인물이 되어 있었다. 영화에서 본 적 있다는 사람이 속출했고 선우 저도 모르는 현채 SNS 팔로워도 등장했다. 생각보다 구체적인 소문에 황당했던 선우는 당연히 모든 사실을 부정했지만 그동안 애인이 있음을 숨기지 않은 탓에 다들 완전히 의심을 거두진 않는 눈치였다.
사람들이 현채를 한국대에 다른 유명한 연기과 남자로 오해했다는 것을 이후 시간이 지나고 알게 되었다.
* * *
잠시 한가하다 생각했던 건 팀장 앤드류가 연차라 하루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었다. 그가 돌아오자 다시 분위기가 전처럼 바뀌었다.
“마지막 프로젝트 끝났다고 이딴 식으로 할 거야? 그럼 하지 마. 빈둥빈둥 시간이나 때우다 인턴 마쳐.”
“아닙니다. 다시 해 오겠습니다.”
묵묵히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앤드류가 집어 던진 서류를 정리하는데, 같이 낱장을 줍던 재연이 머리카락을 가림막 삼아 입 모양으로 욕설을 내뱉는 게 보였다.
조금만 더 버티자 싶어 딱딱하던 입매가 누그러지던 때 삐딱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연애질이나 하니까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지.”
“……저한테 하신 말씀이십니까?”
몸을 일으켜 물었지만 눈썹을 치켜든 앤드류가 시간 많냐며 비꼬는 탓에 재연과 쫓겨나듯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 지랄이네……. 선우 네가 참아.”
“하하, 참아야지.”
겨우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간 저도 모르게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끝나는 날을 헤아리거나 오늘 무슨 일 없었냐는 현채의 물음에 푸념하기도 했다.
침대에 등을 대고 앉은 현채의 허리를 감싸 안고 누워 하루 있었던 일들을 말하다 보면 다 괜찮아지는 느낌이라 선우는 그 시간을 ‘현채 테라피’라 부르며 퇴근하면 밥도 먹지 않고 그를 끌어안기 바빴다.
“오늘도 서류 던졌어요?”
“응. 그런데 오늘은 아예 엮어 갔어. 매번 한 장씩 줍던 것보다 덜 퍼져서 확실히 편하더라. 회사 다니니까 이런데 잔머리만 는 것 같아.”
“뭐야, 이상해…….”
조금 뿌듯해 보이는 표정에 현채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예쁜 얼굴을 타고 흩어지는 웃음을 빤히 올려다보던 선우는 혀로 입술을 적시곤 말했다.
“목요일에 마지막 날이라고 일찍 끝난다는데.”
“몇 시요? 데리러 갈게요.”
“아마 네 시쯤? 근데 확실한 건 아니니까 데리러 오지 마. 늦을 수도 있어. 그보다…… 그날 억제제 먹지 말까?”
이어진 말에 현채가 눈을 크게 떴다. 입술을 달싹이는 그 짧은 사이에 양 뺨이 복숭앗빛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안 돼요. 혹시 밖에서 문제 생기면 어떡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