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1-6
6.
첫 주에 바빴던 것은 애들 장난이었다. 주말에 현채와의 짧은 드라이브나 새로 나온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시간도 사치였음을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거의 매주 새롭게 시작되는 프로젝트에 열정 넘치던 팀원들도 활기를 잃고 빠르게 초췌해져 갔다. 꼭 원하던 업무라며 첫날부터 파이팅 가득하던 정진의 눈에 총기가 사라졌고, 항상 힘내자며 모두를 독려하던 다정한 재연의 입술에선 쌍시옷 소리가 잦게 흘렀다.
선우 역시 조금 줄었던 담배가 다시 늘어 하루에 한 갑씩 비워 대니 영혼이 오염되는 느낌이었다.
‘현채야, 미안. 오늘도 늦을 것 같은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
– ……알겠어요. 먼저 갈게요.
퇴근 후에도 회사 내부나 근처 회의실을 빌려 업무를 이어 가다 보니 퇴근 시간이 들쭉날쭉했다. 회사 앞까지 데리러 왔었던 현채를 보내는 일도 몇 번이나 반복되자 이제는 아예 데리러 오지 말아 달란 말까지 나왔다.
“전 기다려도 상관없는데요.”
“내가 미안해서 그래. 저번엔 차에서 세 시간 넘게 기다렸잖아.”
“…….”
“말 들어. 현채야. 형 한 번만 봐주라. 응?”
눈썹을 뚝 떨어트리고 연거푸 입 맞추며 애교 부리는 선우에게 지고 만 현채가 입술을 삐죽이며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간이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달이 바뀌고 인턴십이 열흘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선우는 난감한 눈으로 휴대폰과 앞의 동기들을 번갈아 바라봤다. 눈이 시뻘게진 정진과 윤영 주위로 수빈과 재연, 하윤이 둘러싸고 그를 위로하고 있었다.
한숨을 삼켜 낸 선우는 현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이 울리기도 전에 곧바로 연결됐다.
– 네. 선배. 퇴근했어요?
“현채야. 나 오늘 늦게 들어갈 것 같은데.”
– 오늘도 일 많아요? …언제 끝나는지 알려 주면 데리러 갈 건데.
“아니. 퇴근은 했어. 더 할 일은 없는데…… 동기들이랑 술 마시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 …….
역시나 싫어한다.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훤히 그려졌다.
저희 팀은 회식도 하지 않은 터라 술자리를 핑계로 귀가가 늦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자 뒤늦게 기죽은 목소리가 물어 왔다.
– 많이 늦어요?
“모르겠어. …오늘 좀 힘든 일이 있어서. 그래도 막차 전엔 갈 것 같은데.”
– 알겠어요.
“응. 현채야.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선우는 동기들에게로 향했다.
내일도 출근해야 했지만 한 시간 동안 쌓인 초록색 병의 개수에서 오늘만큼은 먹고 죽겠단 의지가 엿보였다. 술자리 대화 대부분은 저희 팀장인 앤드류에 관한 욕이었다.
오늘은 메인 프로젝트 제출 날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번 일만 끝나면 한가해진단 소리기도 했다.
이번 결과물로 워크숍 대상자를 뽑는다는 소리가 이미 공공연히 퍼져 있었다. 워크숍에 별 뜻이 없던 선우는 한가해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가망 없다 생각했던 건 저 혼자였다.
별 기대 없는 줄 알았던 동기들이 막상 프로젝트가 시작하자 사활을 건 것이다. 시간을 쪼개 미리부터 준비하고 밤낮없이 노력하는 모습에 선우 역시 덩달아 밤을 새우고 기획안을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해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선정되는 거 아닌가 싶어 이후를 상상해 볼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알게 된 거다. 저희 팀이 뽑힐 가능성은 애초에 전무했다는 것을. 사내 정치니 낙하산이니 들리는 말은 많았지만 확실한 건 이미 워크숍에 가기로 내정된 팀이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내정된 팀을 포함해 다른 팀들은 업무를 배우며 이번 메인 프로젝트를 한 달 동안 준비했는데,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은 겨우 일주일이었다. 그 전에 진행했던 네 개의 프로젝트는 팀장인 앤드류의 개인 지시였다. 저희가 죽어라 노력한 한 달이란 시간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개새끼, 자기 거면서 지금까지 협박을 해?”
“허구한 날 정색하고, 이딴 식으로 하면 마이너스 반영됩니다-. 이러더니. 정작 중요한 건 알려 주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냐? 이래도 되는 거야?”
“처음부터 이상했어. 다른 팀은 환영 회식도 다 했잖아.”
“나 선배한테 들었는데, 내정된 팀에 앤드류 조카 있대. 이번 워크숍에 지도 같이 갈 건가 봐.”
저보다 더 간절했던 동기들을 알아 별말 없이 들어 주고만 있었지만 선우 역시 처음 겪은 부조리에 입안이 쓰긴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위로하다 들어가겠단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선우는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너무 빠르게 마셨나. 취기가 올랐다. 얼마나 마신 건지 시야가 조금 흐려지며 다른 사람이 현채로 보일 지경이었다.
별안간 현채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주머니에 넣어 둔 담뱃갑을 더듬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가장 먼저 막차가 끊기는 하윤이 맞춰 놓은 알람이었다.
전화인 줄 알고 귀에 가져다 댔던 하윤은 제가 취하기 전 설정한 알람임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미치겠다, 늦었어……. 나 먼저 갈게!”
“조심히 가.”
“응! 내일 봐!”
뒤이어 윤영도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자 정진이 남은 셋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넨 다 근처니까 막차까지 마시는 거다. 특히 남선우 너! 맨날 도망가기나 하고. 오늘은 절대 도망 못 간다.”
“알겠어. 너네 다 보내고 갈 테니까 걱정 마라.”
“선우야. 너 애인은 괜찮대? 요즘 바빠서 못 만났을 거 아니야.”
가끔 친목을 다질 때에도 애인 핑계를 대며 빠져나가던 선우였다. 같이 사는 줄은 모르는 재연이 의아하게 묻는 말에 선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우리 애기 보고 싶다.”
“웁, 우웨에엑.”
“야, 서정진! 여기가 토하지 마!”
결국 막차 시간이 지나서까지 술자리가 이어졌다. 마지막까지 정신 줄을 붙잡은 건 꼭 집에 들어가 봐야 하는 선우였다.
“가자. 다 일어나.”
“그냥 밤새우고 출근하자. 뭐 어때?”
“미친 새끼…….”
다 무슨 소용이냐고 호기롭게 말하면서도 다들 비척비척 일어났다. 내일 아침의 숙취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재연과 수빈을 택시 태워 보내고 가장 많이 취한 정진 차례였다. 그새 테이블에 엎어져 자고 있는 걸 둘러메는데 누군가 다가와 다른 쪽 팔을 부축했다.
“누구…….”
의아하게 고개를 든 선우가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남자의 얼굴에 멍하니 중얼거렸다.
“……기사님이 여기 왜 있지?”
“앞에 차 주차해 뒀습니다. 일행분은…… 주소 알려 주시면 제가 태워 보내겠습니다.”
“현채가 보냈어요?”
남자가 뭐라 답할지 고민하다 문밖을 바라봤다. 가게 밖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현채와 눈이 마주쳤다. 홀린 듯 발을 움직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손을 뻗어 현채의 볼을 감싸니 아직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취해서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진짜였네.”
“……왜 그렇게 많이 마셔요.”
“얼마 안 마셨는데.”
“선배 소주만 네 병 마셨어요. 맥주는 두 병.”
그랬나? 기억이 나질 않아 반박할 수도 없었다. 할 말 없는 선우는 팔을 뻗어 현채를 꽉 끌어안았다.
“걱정돼서 찾아왔어?”
“……짜증 나요.”
“미안해. 응, 미안…….”
익숙한 품에 미미하게 남은 페로몬. 선우가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얼굴을 비비적댔다. 빨리 집으로 가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던 현채에게 만취한 정진을 부축한 기사가 다가왔다.
“이분은 어떻게 할까요? 선우 도련님께 주소를 아직 못 들었는데…….”
“근처 호텔에 데려다 놔요.”
“네. 알겠습니다.”
현채는 선우를 데리고 차로 이동했다.
꽉 둘러 안은 팔을 풀지 않으려 하는 선우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리다 겨우 차에 태웠다. 떨어지지 않으려 할 때는 언제고 막상 자리를 잡자 편하게 시트에 기대 눈 감은 모습이 괜히 서운해 굳이 몸을 당겨 제 무릎을 베고 눕게 했다.
긴 다리가 접힌 게 불편한지 조금 뒤척이던 선우는 페로몬을 조금 풀어 주자 훨씬 편해진 얼굴을 했다.
현채는 잠든 선우의 얼굴을 한참이나 빤히 바라봤다. 동그란 귓바퀴나 짙은 눈썹을 만지작거리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장난치듯 조몰락거렸다.
“으음…….”
“선배가 일 안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