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1-5
5.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선우는 테이블을 치우다 문득 생각나 말을 꺼냈다.
“맞다, 오늘 들었는데 인턴십 끝나면 워크숍도 있다더라. 4주간 해외에서…….”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공기를 울렸다. 흘러넘친 물이 바짓단을 적셔도 현채의 시선은 놀라 일어나는 선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외국에 간다고요? 왜요?”
“내가 간다는 게 아니라 인턴 중에 몇 명 뽑힌 애들이 가는 거야.”
“……아.”
“유리 조심해서 옆으로 천천히 나와. 아니다, 내가 치울 테니까 여기 슬리퍼 밟고 나와.”
“그거 얘기 더 해 주세요.”
“워크숍? 뭐…. 뽑혀서 가면 본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라는 소문도 있더라고. 진짠지 모르겠지만. 취업계 낼 수 있는지 물어보긴 하더라. 아마 팀별로 평가 들어갈 것 같은데…….”
깨진 조각을 치우다 옆에 선 현채가 조용한 게 이상해 고개를 들었다.
“현채. 괜찮아?”
“네.”
무표정한 얼굴에 차분한 목소리가 외려 미심쩍어 양 볼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 봤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하긴, 컵이야 잡다가 미끄러졌을 수도 있고. 현채도 성인인데 제가 너무 아이처럼 대하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이후였다. 아까 들어간 침실에서 한참이나 나오질 않아 찾으러 가자 커다란 몸이 등을 보인 채 엎드려 누워 있었다.
“현채야, 자? 오늘 축구 안 봐?”
“……피곤해서요.”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눅눅하게 젖은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린 선우는 침대 가까이 다가갔다.
“은현채.”
얼굴 좀 보자고 어깨를 두드리니 꾸물거리며 더 감추기나 했다. 눈썹을 꿈틀하곤 단번에 어깨를 잡아 돌리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베개에 찍힌 눈물 자국. 머리맡의 태블릿엔 한국대 홈페이지에 휴학을 검색한 화면이 그대로 떠 있었다.
“휴학?”
황당하게 되물으며 돌아보자 눈가가 붉어진 은현채가 잘못한 줄은 아는지 시선을 슬슬 피했다. 턱을 잡아 돌리며 물었다.
“혼자 숨어서 울고, 몰래 휴학할 생각이나 하고. 또 뭐.”
“그냥 찾아본 거예요.”
“말 안 해 줄 거야?”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입이 일자로 다물렸다. 젖은 눈가를 쓸던 손이 깨문 입술을 잡아 지분댔다. 한층 더 몸을 붙여 가까이 다가앉으니 그제야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싫을 수 있잖아요.”
“뽑힌 사람만 가는 거야. 내가 간단 소린 안 했는데.”
“그게 그거잖아요. 선배가 제일 눈에 띌 텐데 어떻게 안 뽑혀.”
확신에 가득 차 내뱉는 투정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낸 건 정말 저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뽑힐 가능성이 없기도 했거니와 혹여 뽑히더라도 취업계를 낼 정도로 회사와 맞지는 않았다.
겨우 일주일로 판단하긴 이르지만 대외적으로는 자유롭고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기로 유명한 회사였는데 막상 들어가 직접 겪은 곳은 생각보다 보수적이었다. 특히 불친절한 설명에 더해진 과중한 업무, 바로 옆 팀과도 확연히 차이 날 정도로 배타적인 팀 내부 분위기 같은 것들은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동기들끼리 더 빠르게 친해진 것도 어쩌면 그래서인지 몰랐다. 들어간 첫날 바로 알람을 꺼 둔, 아마 지금도 새로운 메시지들이 오갈 단체 채팅방을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안 가.”
단호한 말에 물기 어린 속눈썹이 위로 들렸다.
“안… 간다고요?”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었으면 그렇게 가볍게 얘기 안 꺼냈을 거야. 나 혼자 결정할 일도 아니고.”
허락 맡아야지. 애인한테.
몸을 겹치며 속삭이자 현채가 달뜬 숨을 뱉으며 팔을 둘러 안았다.
“선배…….”
살짝 고개를 틀어 입 맞추려는 것을 피하자 앓는 소리가 흘렀다. 어느새 화가 다 풀려 말랑해진 얼굴을 내려보다 코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런데 현채 너는 상의도 없이 휴학이나 알아보고.”
“……정말 검색만 했어요.”
“휴학하고 따라오기라도 하려고 그랬어?”
“저도 허락 맡았을 거예요. 애인한테.”
당당히 답하는 모습이 못내 사랑스러워 킥킥 웃음을 흘리다 입술을 포갰다.
스치듯 맞물린 입술 사이로 탄식과 같은 숨결이 뱉어졌다. 잇새를 파고드는 살덩이가 미치도록 달게 느껴졌다. 유혹하듯 배어 나오는 페로몬에 눈앞이 순간 흐려졌다. 아주 찰나간 혀를 섞다 선우가 먼저 입술을 뗐다. 앓는 소리가 절로 흘렀다.
“조금만 더 하면 안 돼요?”
“……그럼 못 참을 것 같아.”
뜨거운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애원하는 현채의 시선에 점점 마음이 약해져 입술을 깨물고는 몸을 일으켰다.
“잠깐 나갔,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선배.”
붙잡는 현채의 손을 모른 척하고 뒤돌았다.
위험할 뻔했다. 침실 문에 등을 기댄 선우는 토해 내듯 숨을 뱉었다.
담배를 물고 싶었지만 흥분해 힘이 들어간 아래로 밖을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입술을 깨물고 가까스로 참아 내던 그때였다. 문 뒤에서 작게 현채의 신음이 넘어왔다. 제 이름을 부르며 자위하는 애인의 소리였다. 문틈으로 새어 나와 코끝을 스치는 레몬 향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 은현채 진짜…….”
마른 얼굴을 쓸어내린 선우 역시 다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 * *
선우는 주말에도 프로젝트로 받을 연락이 많았다. 그가 중간중간 노트북을 열거나 휴대폰을 잦게 확인할 때면 현채도 휴대폰을 들어 달력을 살폈다. 짜증 나는 인턴십이 끝나는 날 디데이를 세는 것이었다. 아직 한참 남았지만 인턴십이 끝나는 주에 맞춰 선우의 러트 사이클을 계획하기도 해서 어서 8월이 오기만을 빌었다.
일요일 오전엔 그래도 잠깐 짬을 내 점심도 먹을 겸 드라이브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선우가 내어 준 오른손을 만지작거리던 현채가 말했다.
“다음 주엔 면허 시험 보려고요.”
“언제? 데려다줄게.”
“토요일 아침이요. 근데 선배 일 바쁘면 혼자 다녀와도 돼요.”
앞으로 더 바빠질 게 뻔해 제가 꼭 데려다주겠다 장담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현채가 먼저 말을 꺼내게 만든 게 미안해 닿은 손을 꼭 쥐었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선우의 휴대폰에 알람이 떴다. 메시지를 확인한 선우는 다시 몸을 일으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일주일 사이 일련의 과정에 익숙해진 현채는 별말 없이 허브티를 두 잔 타 와서 하나는 선우 옆에 두고 다른 하나는 제가 홀짝이며 읽던 소설책을 펼쳤다.
급하게 부탁받은 자료 정리를 마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돌린 시선에 소파에 불편하게 걸쳐진 장신이 들어왔다. 작게 들썩이는 가슴팍이 뭐라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참을 다정한 눈으로 응시하다 침실에서 이불과 베개를 가져왔다.
이불을 덮어 주고 조심히 머리를 들어 베개에 괴는데 얕게 잠들었던 현채가 깨어나 커다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의문을 담은 시선에 손끝으로 뺨을 쓰다듬다 이불 끝을 들쳐 나란히 눕자 커다란 몸이 꿈틀대며 자리를 내어 줬다. 넓은 소파임에도 현채와 제가 나란히 누우니 틈 없이 꽉 들어찼다. 자는 사람 특유의 따끈따끈한 체온이 기분 좋았다.
가슴팍을 두드리며 다시 자, 하고 속삭이자 현채가 팔을 뻗어 몸을 끌어안았다.
“이제 다 끝난 거예요?”
별것 아닌 질문에도 죄책감이 들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이 눈을 마주한 게 몇 번이더라.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겨우 첫 주로도 이렇게 마음 쓰이는데 남은 날들은 어떻게 버티지.
선우는 느린 한숨을 뱉으며 현채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 이렇게 바쁠 줄은 몰랐는데.”
“많이 힘들어요?”
“인턴이라고 만만히 본 내 잘못이지. 할 만해.”
“재미있어요?”
“재미없어도 해야지. 우리 현채 먹여 살리려면.”
관성적으로 뱉어진 대답에 선우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현채가 중얼거렸다.
“저는 선배 하고 싶은 거 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거? 그게 뭔데.”
뜬금없는 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멀거니 저를 향한 투명한 시선을 귀엽게 바라보며 몸을 돌리려던 때 귓가에 확신에 가득 찬 대답이 들렸다.
“스키요.”
두꺼운 팔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리를 휘감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왜 안 해요?”
“졸업하면 안정적인 직업 찾아야지.”
어둠 속에서 둘의 시선이 얽혔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 눈을 마주치자 왠지 모르게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를 내어 적시자 현채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현채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안정이 왜 필요하지? 내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