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1-4
4.
현채의 유전병이 알파와 오메가 두 개의 페로몬을 모두 지녀 생기는 것임을 알게 된 후 저희는 오메가 형질을 없애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다.
하지만 특이 케이스인 탓에 정보를 찾기 힘들었고 그렇다고 현채에게 위험한 방식을 쓰고 싶지도 않았기에 여러 달 지지부진하던 차, 김지석 교수가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없애지 못한다면 파트너인 제 페로몬으로 제어라도 해 보는 게 어떠냐는 것이다.
아무리 오메가 형질을 가지고 있다 하나 우성 알파인 현채를 일반 알파인 제 페로몬으로 어떻게 제어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최근엔 현채의 페로몬을 안정시키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오준일이 준비가 된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허벅지 위에 바르게 놓인 현채의 손을 찾아 쥔 선우가 오준일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지금 임시방편으로 현채 님의 페로몬 균형을 세밀하게 맞춰 놓은 상태입니다. 알파 형질이 훨씬 강해서 억제제를 많이 써 둔 상태라 오래가진 못해요. 이 사이에 오메가 형질의 각인을 마쳐야 합니다. 선우 씨.”
“예? 각인이라고요?”
“김지석 교수가 말한 방법이란 게 결국 알파 페로몬을 억눌러 숨겨진 오메가 형질이 드러난 사이 선우 씨와 각인시키자는 건데……. 두 분이서 러트 사이클을 함께 보내시면 됩니다. 만약 효과가 있다면 선우 씨 러트 사이클 끝나자마자 현채 님 러트가 시작될 겁니다. 이젠 그를 상쇄할 오메가 페로몬은 선우 씨한테 묶인 상태일 테니까요.”
오 교수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던 선우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각인이라니. 현채와 제 사이에는 영영 없을 줄 알았던 단어였다. 현채의 치료가 중요한 시점에 이런 것 가지고 설레니 괜히 찔리는 기분이라 더욱 표정을 감췄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현채 님이 온전한 알파로는 처음 맞는 러트 사이클입니다. 얼마나 갈지 모르니 두 분께서 상의하셔서 러트 날짜 잡는 게 좋을 거예요. 되도록 두 달 내로요. 마침 방학이시죠?”
오준일이 두툼한 약 봉투를 꺼내 선우의 앞에 밀어 건넸다.
“억제제 한 달 치입니다. 일주일 이상 복용하다 멈추면 바로 사이클 시작되니까 이용해서 주기 맞추세요. 현채 님 건 조금 더 맞춰서 제가 이번 주 내로 약 보낼게요. 그사이엔 원래 복용하던 걸로 계속 드시면 됩니다.”
이후로 몇 가지 주의 사항을 더 듣다 연구실을 나왔다. 한 손엔 약 봉투를, 다른 손엔 현채의 손을 잡은 선우는 가볍게 인사한 후 연구실 문을 닫았다. 오준일 교수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가능하면 사이클 전까지는 관계를 자제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페로몬 균형이 깨질지도 모르니까요.’
음, 어려운데.
받아야 하는 건 억제제가 아니라 촉진제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며 뒤도는데 현채가 가슴께에 손을 올린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현채야, 왜 그래?”
어디 아픈가 싶어 놀라 다가가자 온통 붉어진 얼굴이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수줍게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선우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따라 눈을 맞췄다.
“왜. 각인이라니까 숨 쉬기 힘들 정도로 떨려?”
“당연하잖아요.”
순식간에 오른 열이 이제 겨우 진정이 되는지 현채가 손부채질하며 선우의 기색을 살폈다.
“선배는 괜찮아요? …저랑 각인하는 거.”
“그럼. 당연하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어진 대답에 현채가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어느 하나 고를 수가 없던 탓이다.
눅눅하게 젖어 끈질긴 시선이 제 앞의 연인을 깊이 응시했다.
“안 놔줄 거예요. 저는 각인 해제 같은 거 몰라요. 절대 못 물러요. 평생……. 그래도 괜찮아요?”
온몸으로 보이는 초조한 기색에 선우는 피식 웃었다. 뒤에 숨기고 있던 손을 잡자 역시나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대로 잡아당겨 허리를 감싸 품에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착각하나 본데 잡힌 건 너야. 은현채.”
“……선배.”
“그래도 괜찮겠어?”
네에, 멍하니 끄덕이는 얼굴을 귀엽게 바라보다 턱을 당겨 입 맞췄다.
* * *
학원에 갔다면 이 주면 땄을 면허를 선우에게 배우기로 한 순간 그 기간이 기약 없이 늘어나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운전을 가르쳐 준단 핑계로 근교 데이트를 하며 이곳저곳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동시에 선우의 첫 출근 준비도 차근차근 이뤄지고 있었다.
초인종 소리에 밖을 나가 보니 며칠 전 맞춘 슈트가 도착했다. 회사 규정이 자율 복장 출근이라는 것을 알기 전 미리 맞춘 거라 한동안 입을 일이 없어 보였다.
상자를 열자 잘 개어진 슈트 위로 무언가가 작게 따로 포장되어 있었다. 종이봉투를 뜯자 옷 위로 툭 떨어지는 셔츠 가터에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또 언제 껴 놨어.”
옷을 맞춘 테일러샵은 현채의 둘째 형인 이채에게 소개받은 곳이었다. 현채와 함께 방문했는데 제가 치수를 재는 동안 피팅룸 옆을 얼쩡대며 이것저것 들춰 보길래 뭐 하나 했더니만 귀여운 짓을 해 놨다.
미안하지만 뜻대로는 해 주기 싫은데.
저보단 현채에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울상을 할 얼굴로 흰 셔츠 아래 가터를 한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여간 실없는 행동이 아니라 멋쩍어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옷장 안쪽에 정장을 잘 걸어 두고 문제의 가터는 아래 서랍에 봉투째로 넣어 뒀다. 정리를 다 마친 뒤에야 침실에서 저를 찾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 여기 있어. 갈게.”
현채에게 들리도록 소리친 선우는 작은 한숨과 함께 옷장 문을 닫았다.
출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 * *
첫 출근 날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었다. 이후 5일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예상보다도 더 바쁜 나날에 장점이라곤 현채와 보낼 시간이 거의 없어 굳이 성욕을 자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 딱 하나였다.
높이 솟은 건물들 사이 사람들이 퇴근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선우 역시 동기들과 함께 막 정문을 나섰다. 6주란 기간 동안 팀워크란 이름하에 강제로 묶이게 된 같은 팀 동기들이었다. 다들 나이가 비슷한 데다 성격 역시 열정 넘치고 밝은 터라 일주일이란 짧은 기간에도 순식간에 친해졌다.
“어으, 드디어 금요일이다. 이게 오긴 오는구나.”
“버스 온다, 난 먼저 갈게!”
“하윤아 잘 가라. 남선우 너는 오늘도 가냐?”
“선우는 근처 산다지 않았어? 같이 저녁 먹고 가.”
“맞아. 내일부턴 다시 일해야 하잖아.”
같이 저녁 먹고 가자는 제안에 선우는 고개를 저었다.
“애인이 기다리고 있어서 가 봐야 돼.”
“오늘도? 맨날 만나면 질리지도 않냐.”
“글쎄. 매일 새롭던데.”
태연한 답에 야유가 쏟아졌다. 시원스레 웃은 선우는 가볍게 인사하며 등을 돌렸다.
“먼저 간다. 월요일에 보자. 아, 자료는 정리 마치는 대로 클라우드에 올려놓을게.”
며칠 새 눈에 익은 골목에 다다르자 익숙한 세단이 보였다. 뒷좌석 문을 열자 앉아 있던 현채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선배.”
옆자리에 앉자마자 깍지 껴 손을 잡더니 목에 얼굴을 묻고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좀 늦었지. 오래 기다렸어?”
고개를 젓는 현채의 머리칼이 턱을 간질였다.
현채는 매일같이 데리러 왔다. 이 시간에는 오히려 대중교통이 빠르다거나 눈에 띄기 싫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첫날 탔던 대중교통이 화근이었다. 학교 앞 자취방에서 편하게 등교하던 선우는 출퇴근길 러시아워를 처음 겪어 봤고 아무런 대책 없이 몸을 부대끼며 겨우 집에 돌아왔다. 기다리던 현채가 퇴근한 선우를 반기며 품에 안긴 순간, 몸에 덕지덕지 묻은 여러 페로몬을 맡고 그대로 속을 게워 냈다.
보통 형질자들이 이런 일에 대비해 탈취 용품들을 지니고 다닌다는 사실은 뒤늦게서야 알았다. 약을 먹어 페로몬을 조절 중이던 현채라 더욱 민감했던 것도 있지만 이 일을 빌미로 데리러 오겠다 말하는데 막을 도리가 없었다.
“오늘은 어땠어요?”
“으음, 조금 바쁘긴 했는데 괜찮았어.”
눈을 감고 답하는 선우의 목소리에 피곤이 묻어났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채는 손끝으로 조심스레 볼을 쓰다듬었다.
“저녁은 그냥 집에서 먹어요.”
“오늘 갈비 김치전골 먹기로 했잖아. 먹고 싶다며.”
“선배 피곤해 보여서요. 빨리 들어갈래.”
그렇게 티 났나. 아니라고 해도 들어 먹지 않을 고집이 낯에 띄워져 있었다. 선우는 마른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현채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럼 포장해서 집에 가서 먹자.”
“그럴까요?”
“응. 그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