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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손 아래 닿는 고운 모래와 구겨져 엉망이 된 슈트 사이로 파고든 모래 알갱이. 현채는 몸을 일으키려다 맥이 풀려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선우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아예 드러누운 채 소리 내 웃고 있었다.
“이거 반칙이에요.”
퉁명스레 말하자 선우가 웃음기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며 손을 잡았다.
“내 애인 예뻐서 안아 주는 게 어떻게 반칙이야.”
“……일어나요. 머리에 모래 다 들어갔어요.”
“그러게. 씻는 데 한참 걸리겠다.”
선우는 실없이 웃기만 하고 일어날 의향이 없어 보였다. 어스름한 불빛에 그림자 진 얼굴을 내려보던 현채는 선우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싶어 옆에 함께 누웠다. 모래 위에 누워 등에 닿는 익숙지 않은 느낌이나 몸 곳곳을 파고드는 작은 낱알들이 불편했지만 선우와 함께라면 몇 시간이고 이대로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이 마냥 좋았다.
* * *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그사이 스노쿨링을 하며 거북이와 열대어들을 실컷 보고 헬기를 타고 섬 전체를 둘러보기도 했다. 차를 렌트해 좋다는 곳들은 모두 가 보고 열대우림과 사화산 트래킹까지 하며 바쁘게 돌아다니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게 빠르게 지났다.
귀국을 하루 앞둔 오늘은 아무 일정 없이 비워 두어 여유로웠다. 커피 향기를 맡고 느지막이 눈을 뜨니 현채가 테이블에 커피와 빵을 올려 두고 있었다. 호텔 근처 유명하단 카페의 봉투가 보였다.
“혼자 갔다 왔어? 나 깨우지.”
“……피곤할 것 같아서요.”
슬쩍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양심은 있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몸을 일으키다 허리에 번지는 통증에 낮은 신음을 흘리자 서둘러 침대로 달려와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맞췄다.
“선배, 많이 아파요?”
애타는 목소리와 맹목적인 눈망울.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아래 걱정이 가득했다. 손을 뻗어 뺨을 쓰다듬었다.
“다음엔 깨워서 같이 가. 별일 없었지?”
“……네. 그냥 바로 앞 카페라서.”
대답하는 현채의 시선이 묘했다. ‘왜?’ 하고 물으니 고개를 저었다. 내리깐 속눈썹 아래 그늘진 얼굴이 왜인지 기분 좋아 보였다.
커피와 빵으로 허기를 달래고도 또 한참을 소파에 누워 빈둥댔다. 현채의 무릎을 베고 누운 선우는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흐린 적 없던 하늘을 올려보며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실컷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돌아가려니까 왜 이렇게 아쉽지.”
“더 있을까요?”
곧바로 묻는 모습에 눈을 들어 현채를 바라봤다.
“안 돼. 약 없잖아.”
“며칠 안 먹어도 돼요. …아!”
손을 뻗자 순순히 가져다 대는 볼을 꼬집었다.
“혼날래. 치료 열심히 받기로 했잖아.”
“아파요…….”
세게 쥐지도 않았는데 아프다며 눈썹 끝을 뚝 떨어트리는 모습에 킥킥 웃다 몸을 일으켰다.
“저녁에 차 가지러 온다는데. 반납하기 전에 어디 놀러 갔다 올까? 먹고 싶은 거 없어?”
“햄버거 먹을래요.”
안 나가겠단 소리였다. 선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온종일 호텔에서 쉬는 것도 여행의 마무리로 꽤 괜찮았다. 먹고 싶다던 햄버거는 룸서비스와 빅맥 중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했는데 막상 먹으니 물리는 탓에 하나도 겨우 해치웠다. 힘겹게 봉투를 접어 버리며 둘은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한식을 먹자 약속했다.
몸이 찌뿌둥해 호텔 앞 해변가를 따라 조깅하고 들어오는 길에 한나와 이나에게 줄 인형까지 사니 어느덧 해가 져 어둑했다.
선우는 주머니를 뒤적이며 현채에게 손짓했다.
“먼저 들어가.”
“같이 가요.”
“인형에 냄새 배면 애들한테 죽어. 금방 갈게. 먼저 씻고 있어.”
담배 냄새에 예민한 한나와 이나를 떠올렸는지 현채 역시 입술을 달싹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선우는 담뱃갑을 열었다. 아직 세 개비 남아 있었다. 줄일 생각이긴 했다만 일주일 동안 한 갑도 다 안 비웠다니. 이러다 정말 금연에 성공하는 게 아닐지, 실없는 생각에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방으로 올라가자 현채는 씻는지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고 있었다. 기척을 느꼈는지 물소리가 멈추더니 안에서 울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선배 왔어요? 잠깐만요, 저 금방 나갈게요.”
“난 침실에서 씻을게. 천천히 해.”
선우는 안쪽 욕실로 향했다. 간단히 씻은 뒤 젖은 머리를 털며 나오자 어느새 머리까지 예쁘게 말린 현채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뽀얀 얼굴에 양 뺨이 살짝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귀여워 몸을 겹쳐 눕히며 연거푸 입 맞추자 작게 웃으며 두 팔로 몸을 끌어안았다.
가볍게 포개진 입술 사이로 응석을 흘렸다.
“이대로 있고 싶어요.”
“더 있을까?”
웃음기 어린 물음에 현채가 눈을 흘겼다.
작정하고 조르면 넘어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힐긋 바라본 선우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었다.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그대로 끊으려던 선우는 순간 스치는 생각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맞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선우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는 것을 의아하게 올려보던 현채는 참지 못하고 통화가 끊기자마자 물었다.
“누구예요?”
“됐다, 현채야.”
“뭔데요?”
“저번에 말한 인턴 말이야. 합격했대.”
방금 연락 온 곳은 외국계 IT 기업이었다. 선우가 넣었던 곳 중 제일 규모가 크고 연락을 가장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다.
사실 전혀 예상치 못한 회사에 뜬금없는 직무이긴 했으나 명현과 관련 있는 그룹과 계열사, 여태껏 최이원의 곁에 있으며 친분을 나눴던 곳들까지 모두 제외하니 남은 곳이 많지 않았다.
먼저 입사해 일하고 있는 선배 말로는 인턴십 때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꽤나 실속 있어 추후 포트폴리오에도 도움이 될 거라 했다. 정규직 전환까지 기대하지는 않아도 좋은 기회임은 분명했다.
한시름 놨다는 생각에 현채를 두 팔로 꽉 끌어안고 목에 얼굴을 묻었다. 기분 좋은 한숨을 뱉자 목덜미에 스치는 바람에 현채가 살짝 몸을 움츠렸다.
“축하해요. 그럼 진짜 하는 거예요?”
“응. 나중에 우리 현채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해야지.”
실실 웃으며 답하는 얼굴에 현채는 그만 싫은 티를 낸다는 것도 잊고 따라 웃고 말았다.
* * *
평소 검진은 심진 본사 내의 병실에서 진행했지만 이번엔 정기 검진이라 남양주에 있는 의료 센터까지 가야 했다.
시간이 남아 근처 식당에 들러 닭갈비를 먹는데 옆자리 등산객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을 부딪쳤다. 시원하게 술을 들이켜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본 현채가 넌지시 물었다.
“저도 면허 딸까요?”
“응? 면허는 갑자기 왜. 운전하고 싶어서?”
“그냥…… 항상 선배가 데려다주니까. 같이 하면 안 피곤할 거 아니에요. 운전 때문에 술 못 마시는 일도 없고.”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눈치챈 선우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운전기사가 있어 그동안 면허 딸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던 현채가 저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다니 귀엽기도 하고 왜인지 모르게 마음 깊이 충만한 만족이 피어났다.
“안 힘들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뭐. 그리고 술은….”
다시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는지 잠시 말을 멈췄던 선우가 현채의 손끝을 툭 쳤다.
“너랑 집에 빨리 가고 싶어서 안 마신 거지. 나만 마시면 무슨 소용이야. 재미없게.”
“아님 말고요.”
“그런데 면허는 따자. 운전할 줄은 알아야지. 내가 알려 줄게. 학원 가지 말고 나한테 배워.”
현채는 이번에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개인 연구실 문을 두드리자 오준일 교수가 나와 문을 열어 줬다.
“오셨습니까. 들어오세요.”
이제는 순서마저 외운 익숙한 검사들이 이어졌다. 익숙하게 기다리던 선우는 안쪽에서 나오는 현채의 모습에 고개를 들었다.
“끝났습니까?”
“네. 검사는 다 끝났고요, 선우 씨도 이리 와 보세요.”
벌떡 일어나 현채의 옆으로 가자 오 교수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저번에 받은 약은 용법 맞춰서 다 드셨죠?”
“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 챙겼습니다. 제가 감시했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현채 옆에서 선우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답했다. 오준일은 사이좋아 보이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차를 들어 마르는 입을 적시고 입술을 뗐다.
“현채 님 페로몬 수치 보니까 슬슬 치료 준비해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선우와 현채의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