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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때랑 지금은 다르잖아요. 그리고 급한 건 선배면서.”
불만스레 덧붙여진 한마디에 선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현채는 제가 취업 준비를 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너무 이르다거나 바빠지는 게 싫어서라는 것도 있었지만 아마도 제가 심진에 가지 않겠다 말해서이지 않을까 싶었다.
서울로 돌아온 뒤에 은우경과 채신호, 심지어 은 회장님에게까지 함께 일해 보는 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딱히 무엇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이유에서였다.
서운해하는 속내를 모르지 않아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오른손을 뻗어 허벅지 위에 올리자 곧 커다랗고 따듯한 손이 손 틈 사이를 꾸물꾸물 파고들어 깍지 꼈다.
“할 수 있을 때 다른 경험도 해 보고 싶어서 그래. 좀 봐줘.”
마주 잡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한참 후에야 현채는 보일 듯 말 듯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본격적인 여름휴가 시즌이 아닌데도 주말의 공항엔 사람들이 넘쳐났다. 카페나 식당, 라운지 할 것 없이 복잡해 겨우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앉은 선우가 주위를 둘러보다 말했다.
“삼십 분 남았네. 마실 거라도 사 올게.”
“같이 가요.”
“앉아있어. 금방 다녀올게.”
따라오겠다는 현채를 자리에 앉히고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어제 이 시간에는 학교에 있었는데 오늘은 전혀 다른 공간 다른 분위기에 와 있다는 게 괜히 재미있었다.
종강한 지 하루 만에 공항으로 온 것은 현채의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친가 쪽 사촌 누나가 외국에서 만난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하와이에서 식을 올리는데, 다들 일이 바빠 시간을 내기 힘들어 고민하던 차에 저희에게 대신 가 줄 수 있냐고 부탁한 것이다. 마침 선우 역시 인턴십 전 비는 시간이라 바빠지기 전에 현채와 여행도 할 겸 흔쾌히 수락했다.
양손에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돌아오니 현채는 전화를 받고 있었다. 맞은편에 조용히 앉자 빤히 바라보던 현채가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알겠어. 이제 비행기 타. 끊어.”
“급하게 끊을 필요 없는데.”
상대의 말이 끝나지 않은 것 같아 턱짓하자 현채가 휴대폰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얘기 다 끝났어요. 은우경이 갔다 오면 한번 보자고….”
“큰형님께서? 언제 보자셔?”
“나중에요. 안 가도 돼요.”
현채는 귀찮다는 듯 말했지만 은우경은 사소한 일로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나중에 따로 연락해 봐야겠다 생각하며 잔을 밀어 건넸다.
“자. 마셔.”
컵을 쥔 현채는 뚜껑을 열기도 전에 멈칫하더니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이거 레몬티죠.”
“아이스로 사다 줄 걸 그랬나?”
말을 돌리며 빨대를 물자 말없이 뚜껑을 열어 본 현채가 선우를 슬쩍 흘겼다.
“진짜 이상한 거 알죠.”
“아, 좋다.”
공기 중 퍼지는 레몬 냄새를 깊이 들이켜며 웃는 선우의 모습에 현채가 어이없는 한숨을 흘렸다. 둘만 있을 때 실컷 맡으면서 왜 밖에서 이러는 건지.
저를 향한 장난기 어린 눈빛에 현채는 컵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다음엔 제가 사러 갈래요. 선배 커피 말고 페퍼민트티만 사다 줄래요.”
“잠깐, 현채야. 그건 아니지. 민트는 심하잖아. 그리고 내 페로몬이랑 비슷하지도 않은데…….”
말을 잇던 선우는 현채의 얼굴에 그려진 특유의 고집에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 * *
“결혼 축하드립니다.”
선우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현채도 짤막하게 축하를 건넸다.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틀어 올린 여자는 어깨가 드러나는 새하얀 드레스가 굉장히 잘 어울렸다. 환한 웃음 뒤로 느껴지는 특유의 옅고 여리여리한 분위기가 확실히 현채의 가족이다 싶었다.
서연은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선우와 그 곁에 선 현채를 번갈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사실 큰아버지네에서 현채가 올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네요. 멀리까지 와 줘서 고마워요.”
“다 준비해 주셔서 몸만 왔는걸요. 하와이는 처음인데 덕분에 여행 오게 되어 제가 더 감사하죠.”
“맞다, 며칠 더 머무신다고 했죠. 제가 아는 사람 소개해 드릴게요. 여기 산 지 오래돼서 좋은 데 많이 알아요.”
“아니, 필요 없어.”
“흐응, 그래도 편할 건데.”
“필요 없…….”
허리를 툭 치자 멈칫해 눈을 깜빡거리던 현채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은우연이랑 은채연이 오고 싶어 했는데 못 왔어. 다들 보고 싶어 하니까 다음에 한국 오면 연락해.”
“어머……, 현채 너 다 컸네.”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던 서연이 활짝 웃음 지었다.
“그래, 가서 꼭 연락할게.”
* * *
눈부시도록 환한 햇살과 살짝 후덥지근하게 부는 바람. 바다 위 절벽 위에서 은서연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가까운 가족과 친한 친구들의 축복 속에 예식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근처 레스토랑에서 피로연이 이어졌다. 모르는 이들과 다 함께 어울려 대화하며 즐기던 것도 잠시, 어느샌가 선우는 현채와 구석진 자리로 가 머리를 맞대고 대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핑할 거야 말 거야.”
“선배가 서핑 슈트 입는다고 약속하면요.”
“겨우 며칠 배울 건데 슈트까지 사라고? 벗고 하자, 그냥.”
“안 돼요. 사 줄게요.”
조금 취한 틈을 타 물어본 건데 갑자기 눈에 총기가 돌더니 단호한 거절이 돌아왔다.
사실 현채가 서핑에 그닥 관심이 없어 보여 이미 타지 않기로 결정한 지 오래지만 하는 짓이 귀여워 아직 말하진 않았다. 영 제 취향이 아닌 서핑 슈트를 입을 바에야 아예 안 타고 말지.
그를 모르는 현채는 제 거절에 혹시 선우가 마음 상하기라도 했을까 걱정인지 입술을 달싹이다 물었다.
“그냥 평범하게 거북이 보고 용암 보면 안 돼요?”
“그럼 스노클링 할 땐 벗어도 돼?”
“……진짜 싫어.”
틈을 놓치지 않고 묻자 현채가 진저리쳤다. 고개를 돌린 탓에 보이는 귀 끝이 살짝 붉어진 채였다.
“마음대로 해요. 그땐 프라이빗 보트 예약할 거니까.”
초저녁이라 선선해진 바람을 기분 좋게 맞으며 호텔로 돌아갔다. 어스레한 하늘 아래 일렁이는 파도와 해변가에 줄지어 늘어진 야자수, 그 뒤로 보이는 호텔들에서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한국에 돌아가면 바빠질 것임을 알았지만 지금은 이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행복해 보이더라.”
문득 들려온 말에 현채가 고개 돌려 선우를 바라봤다. 제게 꽂힌 시선을 익숙하게 받으며 선우는 낮의 결혼식을 회상했다. 서로를 마주 보던 신부와 신랑의 두 눈빛과 미소 같은 것들을.
“결혼 같은 거 조금 큰 이벤트에 불과하다 생각했거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인 점이 중요한 거니까, 뭐 다를 게 있냐고.”
“…….”
“그런데 정말 아름답더라. 결혼식 처음 와 보는 것도 아닌데 이번엔 이상하게…….”
말을 잇던 선우는 뒤늦게 제 말의 의미를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이래서야 꼭 현채에게 청혼이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옆을 돌아보자 역시나 현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는 빨라도 좋아요.”
눈을 반짝이며 넌지시 건네는 말에 헛웃음 지은 선우는 손을 뻗어 현채의 머리를 헝클였다.
“너무 어려. 졸업하고 나면.”
“종강 기준이에요, 졸업식 기준이에요? 미리부터 준비해야 하잖아요.”
“글쎄, 삼 년은 더 남았는데 천천히 고민해 보지 뭐.”
“삼 년이라뇨?”
두 눈을 크게 뜨고 되묻는 현채의 모습에 선우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졸업하면 고민해 보자고 했지, 언제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자고 했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방금, 방금도…….”
배신감에 말을 잇지 못하는 억울한 표정을 보다 선우는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뻗어 멀리 보이는 조각상을 가리켰다.
“그럼 저기까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할까?”
“네? 어디…….”
“먼저 간다!”
손끝을 따라 현채가 둘러보는 사이 선우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선배!”
당황도 잠시, 현채 역시 선우를 따라 전속력으로 해변을 따라 달렸다. 어딘진 모르겠지만 선배만 따라잡자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달렸다.
신장 차의 유리함이었을까 아니면 의지의 차이였을까. 선우는 결국 도착점에 다다르기 전에 현채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입꼬리를 올렸던 선우는 제게 눈길도 주지 않고 스쳐 가는 현채의 모습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점차 거리를 벌리는 현채를 보며 위기감을 느낀 선우는 몸을 날려 양팔로 등을 끌어안았다.
“무슨……!”
반동을 이기지 못한 현채의 몸이 뒤로 기울었다. 둘은 동시에 쓰러져 모래사장을 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