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1-10
10.
다른 방으로 안내받은 선우는 채연과 함께 검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채연과는 동갑이라 그런지 처음 만났던 날 이후로 빠르게 친해졌다. 대화를 하던 중 그가 맞다 하며 손뼉을 치더니 휴대폰을 뒤적여 사진 한 장을 보여줬다.
“이거 봐 봐. 저번에 집에서 발견하고 너 보여 주려고 사진 찍어 놨다?”
“아하하하, 이게 뭐야, 현채야?”
“존나 웃기지.”
사진 속의 현채는 아주 어린 모습이었다. 다섯 살이나 됐을까. 어른과 함께 말 위에 올라 탄 모습이었는데 겁먹어 크게 뜬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 같았다.
“또 울려고 하네.”
“이러다가도 금방 멀쩡해졌어. 절대 안 운다니까? 네가 현채 눈물 많다고 했을 때 우리가 괜히 놀란 게 아니라고.”
“다른 거 더 없어? 나 사진 보내 줘.”
“은현채한테 내가 보냈다고 하지 마. 다른 거……. 아마 언니가 보냈던 거 있을 건데.”
채연이 휴대폰을 뒤적였다. 곧 연이어 사진이 도착했다.
은이채로 추정되는, 옆에서 물구나무를 선 아이를 보고 기겁해 도망가는 현채, 계곡에서 튜브를 타고 있는 현채. 어디서 넘어졌는지 흙을 묻힌 채로 울음을 참고 있는 모습의 현채까지. 대부분 비슷한 시기의 사진이었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예쁜 건 마찬가지였지만 이 시기의 현채는 유독 뽀얗고 귀여웠다.
선우는 사진을 전체적으로 봤다가 확대했다가, 보내 준 사진들을 모조리 저장하고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그사이 은채연은 방 안팎을 왔다 갔다 하며 걸려 오는 연락을 받느라 바빴다.
그가 심진 산하의 한 조직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선우는 굳이 말 걸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한 시간가량 지났을 무렵, 밖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온 채연이 선우 앞에 커피를 놓아 주며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일이 많냐.”
“난 괜찮아. 오늘 바쁜데 온 거 아니야?”
“원래 바쁜 날 아니거든. 아빠가 언니랑 같이 가 보라고 하긴 했는데 나도 궁금해서 온 거야. 워낙 오래됐잖아.”
채연이 선우를 흘깃 돌아봤다.
“그보다 너 인턴 했던 건 어땠어? 그렇게 힘들었어?”
“갑자기 그건 왜?”
사업 제안을 했던 은우경이나 채신호라면 모를까 제 인턴은 채연이 딱히 관심 가질 만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힘들었냐고 묻기까지 하는 것이 이상해 의아하게 되묻자 채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손쓸 정도면 어지간히 했겠다 싶어서.”
“……손을 써?”
“반응 뭐야? 많이 다치진 않게 해 달라고 해서 경력자 구하느라 힘들었다고. 똑같은 사고여도 그거 컨트롤하는 게 운전 스킬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
채연의 말에 머릿속에 스치는 대화가 있었다.
‘얘들아! 앤드류 교통사고 났대!’
‘뭐? 진짜?’
‘어. 옆 팀에 내 동기 있댔잖아. 거기서 들었는데 어젯밤에 집 가다 사고 났나 봐. 다른 차가 와서 박았는데 대포차라 범인도 못 잡았대.’
‘뭐야, 어쩌다……. 많이 다쳤대?’
‘입원했대. 말하는 거 들어 보니까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던데. 근데 앤드류 저번 달에 차 새로 뽑았잖아.’
‘미친, 보상 못 받으면 어떡하냐.’
혀를 내두르며 말하던 채연은 선우의 표정을 보고 점점 말끝이 흐려졌다. 곧 제가 완전히 잘못 짚었다는 걸 알고 짜증스레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아, 짜증 나네……. 미안. 크게 다치게 하지 말라느니 하는 쓸데없는 조건 붙이길래 당연히 너인 줄 알았어. 욕은 아니고. 쏘리.”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저번 주 갑작스러운 앤드류의 사고가 어찌 된 영문인지 알게 된 선우가 탄식을 흘렸다.
“……현채가 연락했어?”
“모른 척해 달라고 해도 안 해 줄 거지?”
“그건 힘들지.”
은채연이 망했다며 머리를 헤집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상황에 선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현채 앞에서 잦게 푸념한 철없는 제 탓이었다. 저 몰래 일을 벌인 것에 화가 나는 것보다도 매번 듣기만 하던 현채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걸 보면 저도 정상은 아니었다.
은채연이 어떻게 하면 모른 척할 거냐며 재화로 선우를 회유하고 있을 때 은우연이 오준일 교수와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현채 검사 끝났습니까?”
“네. 다 끝났고 지금은 마취 풀릴 때까지 잠시 회복실에 계십니다. 정신은 돌아오셨는데 조금 더 누워 계셔야 해요.”
“선우 씨, 빨리 나와 봐요. 은현채 가관이야.”
“보러 갈게요.”
선우는 바로 일어나 현채가 있다는 회복실로 향했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았는지 현채는 해롱해롱한 상태로 반도 뜨지 않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다가가 손을 잡자 흠칫 떨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하지 마?”
“봐 봐요. 진짜라니까?”
은우연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은채연 역시 낄낄대며 동영상을 촬영 중이었다.
느리게 빼려는 손을 깍지 껴 단단히 잡자 현채가 ‘으응…….’ 하며 싫은 티를 냈다.
“안 돼요. 저 애인 있……. 결혼했어요.”
느릿느릿 잇는 말에 큭큭 웃던 선우가 앞머리를 다정히 쓸어 주며 속삭였다.
“안 되는데. 나 말고 누구랑 결혼했어.”
“남선우…….”
선우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던 은우연이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와, 나한테는 하지 마, 나가. 이 말만 반복하더니 선우 씨한텐 대답도 잘하는 것 봐.”
“저거 깨 있는 거 아니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둘의 시선 아래 선우는 따끈따끈한 현채를 볼을 쓰다듬으며 사심 가득한 문답을 이어 갔다.
제일 좋아하는 게 뭐야?
선배.
형이라고 불러 봐.
으으응…….
뽀뽀해도 돼?
보다 못한 채연이 진저리를 치며 밖으로 나갈 때까지 속닥대며 대화를 나누던 선우는 점점 정확해지는 현채의 발음에 곧 정신이 들겠거니 생각했다.
예상대로 현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잡고 있던 손을 꼭 잡으며 눈을 맞췄다.
“……선배.”
“응. 현채야. 괜찮아?”
“네. 언제 왔어요?”
“방금 왔어. 검사 잘 끝났대.”
아직 졸린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현채를 챙겨 오준일의 사무실로 향했다.
시간이 걸리는 것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은 현채가 회복하는 사이 바로 결과가 나왔는데 미리 살펴본 오준일의 표정이 밝아 마음이 놓였다.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오준일이 옆의 모니터에 자료를 띄웠다.
“여기 보시면 확실하게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각인은 성공적이에요. 다만 상쇄되던 알파 페로몬이 생각보다 강하게 나타나긴 했는데…… 전의 병세가 완화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이건 조금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그래서요. 나았다는 거예요?”
은우연이 못 기다리겠는지 성급히 물었다. 오준일은 씩 웃으며 현채와 선우를 돌아봤다.
“더 지켜봐야 합니다. 하지만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건…… 현채 님이 가진 병이 더 이상 불치병이 아니라는 겁니다.”
* * *
뛸 듯이 기뻐하는 우연과 마지막까지 비밀로 해 달라며 눈을 찡긋이던 채연과 헤어지고 둘만 남은 선우는 팔을 뻗어 현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취에서 깨어나는 사이 장난치며 찍었던 영상을 알고 삐져 있던 현채가 못 이기는 척 몸을 붙였다.
“다 나은 기분이 어때.”
“똑같아요.”
“똑같아?”
표정 변화 없는 얼굴이 위아래로 까딱 흔들렸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그 아래 느리게 팔랑이는 속눈썹을 홀린 듯 바라보던 선우의 귓가에 현채의 목소리가 닿았다.
“저는 그냥 선배랑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그게 아니면 조금 쓸쓸해요. 항상 그래요. 다른 건 모르겠어요.”
“……그 말 되게 고백처럼 들리는 거 알아?”
“그래요?”
현채는 생각지도 못한 소리라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그 모습에서 선우는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자신의 어떤 것보다도 우선해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이 어떻게 고백이 아닐 수 있겠어.
정작 말을 뱉은 현채는 인지하지도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가슴이 뻐근하게 조여들 만큼 귀여운 모습에 한쪽 볼을 감싸 쥐고 뺨에 꾹 입술을 붙였다.
“나도 사랑해.”
Après Ski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