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 - 1-1
1. Après Ski
1.
담배 피우는 횟수가 조금 줄었다. 딱히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현채와 동거하며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선배.”
품에 안겨 드는 커다란 몸을 받아 안아 가볍게 입 맞춘 선우는 현채가 들고 있던 태블릿 화면을 보고 웃음을 걸쳤다.
“다 했어?”
“아직요. 선배는 벌써 끝났어요?”
“응. 자료 준비는 끝냈고 대본만 몇 번 더 보면 돼.”
기말고사 준비에 며칠 밤을 꼴딱 지새웠더니 둘 다 초췌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뽀얗던 눈가마저 살짝 어두워진 것을 보니 마음 쓰이면서도 괜히 동하는 느낌이라 선우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적셨다.
“오늘도 밤새워야 하나?”
“아마도요.”
길다란 속눈썹을 힘없이 팔랑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현채의 얼굴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며 선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생이네. 내일이면 끝이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네…….”
벌써 내일이 현채와 저의 마지막 시험이다. 졸업 학년이 되자 새 학기의 설렘보다는 부쩍 가까워진 취업 고민에 조바심이 앞섰다. 전이야 졸업 후엔 당연히 명현에 들어갈 거라 생각해 적당히 학점을 챙기며 부담 없이 다녔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최대한 남은 학점을 몰아넣고 성적까지 신경 쓰다 보니 한 학기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바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틈틈이 데이트를 하는 건 잊지 않았다. 현채와 함께 맞춘 공강엔 여의도에 벚꽃을 보러 가고 따듯한 날씨에 잔디밭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다 텅 빈 교내를 가로지르기도 했다.
주말엔 유니폼을 맞춰 입고 야구장에 놀러 갔고 시험 기간에 늦은 밤까지 공부하다 갑자기 심야 영화를 보러 가자며 뛰쳐나가기도 했다.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며 집까지 돌아오던 그 조용하고 서늘한 공기는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기억이 되어 추억 속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붙어 앉은 온기가 포근했다. 어느새 다시 집중해 공부하는 현채를 보다 선우도 밀어 뒀던 노트북을 가져왔다.
* * *
발표 순서가 앞당겨져 예상보다 이르게 끝났다. 시계를 확인하니 역시나 현채는 아직 한창 시험 중일 시간이다. 선우는 잠시 고민하다 근처 카페로 향했다.
학교 앞이라 그런지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가볍게 인사하며 자리에 앉은 선우는 노트북을 열었다.
취업 관련해 한창 알아보고 있던 때 누군가 팔을 툭툭 쳤다.
“선우야!”
반갑게 이름 부르는 이는 슈푸르 부회장인 현아였다. 앉으라며 맞은편 의자를 비워 주자 현아가 노트북을 눈짓했다.
“시험공부 중인 거 아니야? 시간 안 뺏을게.”
“방금 마지막 과목 끝나고 종강.”
“아, 부럽다. 나는 하나 밀려서 다음 주 월요일인데.”
학기 초부터 문제가 많던 전공과목에 대해 푸념하던 현아는 문득 생각났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맞다, 이번 주 목요일에 새로 임원 된 애들 축하 겸 술자리 있는데…… 시간 되면 와.”
“슈푸르?”
되물은 선우가 가볍게 웃었다. 웃음에 담긴 거절을 알아챘는지 현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선우 너 보고 싶어 하는 애들 많아서 물어봤어. 최이원은 안 온다길래.”
“너무하네. 축하 자리인데 전 회장이 안 가면 되나.”
“내 말이.”
최이원은 이번 학기에 휴학을 했다. 스키 캠프를 그렇게 끝내고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현아 역시 저희의 관계를 대충 짐작은 할 테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입을 다문 현아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렸다.
“방학엔 뭐 해?”
“인턴 해 볼까 하는 중이야.”
“너도 인턴이구나. 이제 막학기라 그런지 애들 다 취업 준비 중이더라. 연락 온 곳 있어?”
“한두 개 있긴 한데 기다리는 곳들은 아직. 서류 합격해도 인터뷰 남아서 준비나 해 볼까 하고 있었지. 너는?”
“난 계절 학기 들어야 돼서. 끝나고 시간 되면 해외여행이라도 가고 싶어.”
“어디로 갈 건데? 나도 마침…….”
말을 잇던 선우는 현아 뒤로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고개를 빼 들었다.
“현채! 여기.”
문 앞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현채가 선우를 보곤 곧장 걸어왔다. 맞은편에 앉은 현아를 발견하고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현채야, 안녕. 오랜만이다.”
“네. 선배도요.”
조용히 선우 옆에 붙어 앉는 모습에 현아가 웃었다.
“시험도 끝났는데 왜 안 가고 있나 했더니 현채 기다린 거구나? 난 이만 자리 비켜 줄게.”
“으음, 마실 거라도 사 줄까?”
“아직 커피 남았어. 곧 시험이라 이만 강의실 가봐야 하고. 다음에 보자!”
밝게 웃은 현아가 제 텀블러를 들고 자리를 떴다. 인사하던 선우는 손가락 끝에 슬쩍 와 닿는 손길에 옆을 돌아봤다.
“뭐 마실래? 아니면 바로 갈까.”
“선배 뭐 하고 있던 거 아니에요? 기다릴게요.”
그렇게 답하는 두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끝에 추가 달린 듯 무겁게 흔들리는 속눈썹이 금방이라도 감길 듯해 어이없이 헛웃음을 흘렸다. 새벽까지 공부하다 잠깐 눈 붙인 게 다니 어쩔 수 없었지만 하는 짓이 귀여워 괜히 짓궂게 물었다.
“정말? 시작하면 오래 걸릴 건데. 안 피곤해?”
빤히 바라보던 현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졸려요.”
“응. 테이크아웃 해서 집 가자.”
커피와 오곡라테를 사 들고 학교 주차장으로 이동한 선우는 눈에 띄는 어두운색 오프로드 SUV가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새로 생긴 차는 현채가 생일 선물로 준 것이었다. 아직도 처음 알았던 날의 황당한 기억이 생생했다.
첫 수업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던 날 주차장에 못 보던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척 봐도 새것인 데다 눈길 가는 외형에 흘깃 보고 지나치는데,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선우 앞에 차 키가 내밀어졌다.
‘뭐야?’
‘생일 선물이요. 늦어서 죄송해요.’
‘잠깐, 너 설마…….’
그제야 선우는 집 아래 있던 새 차가 제 것임을 눈치챘다. 받을 수 없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현채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 결국 매일 학교에 데려다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받아 들 수밖에 없었지만 현채는 오히려 기분 좋은 기색이었다.
요금을 내고 정문을 빠져나온 선우는 후덥지근한 공기에 창문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여름이다. 덥네. 참, 현아 계절 학기 듣는다더라. 너는 어떻게 할지 결정했어?”
“모르겠어요.”
“왜? 많이 알아보더니. 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이번 학기에 얼마나 공부에 열심이었는지 아는데 갑자기 결심이 흐려진 게 이상해 묻자 조금 기죽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거 들어도 조기 졸업은 어렵다고 해서…….”
“풉, 아하하! 왜, 성적이 안 된대? 그때 뭐라고 했더라. 선배 따라다녀도 제 성적엔 영향 없어요, 라고 했었나?”
“…하지 마요.”
흘깃 바라보며 놀리듯 묻자 입을 꾹 다문 현채가 뾰로통한 눈으로 홱 시선을 피했다. 마냥 귀여운 모습에 선우는 입가에 즐거운 미소를 걸쳤다.
은근한 결혼 요구를 졸업 뒤로 미루자 곧바로 조기 졸업하겠다고 당차게 말하던 현채였다. 동거하며 함께 학교 다니는 게 재미있었는지 한참 잠잠하더니, 선우가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하자 초조해진 듯 저도 조기 졸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교수님 상담까지 했다 하니 현채로서는 매우 진심이었을 거다. 하지만…… 조기 졸업은 아주 오래전 물 건너간 지 오래였다. 일 학년부터 성적에 관심을 뒀어도 힘든데 은현채는 이학년 가을 학기 학점을 아주 조져 놓은 거다.
어느 날 심각한 얼굴로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간 선우가 성적을 보고 놀라 말을 잇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저를 그렇게 졸졸 따라다녔는데 본인 수업의 출결이 좋을 수가 없었다. 지각과 결석이 많은 건 당연하고, 심지어 떨어져 있을 때조차 휴대폰을 꼭 쥔 채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을 기다리며 마음 졸였으니 시험이라고 잘 봤을 리가.
물론 은현채에게 학점이야 사사로운 일일 뿐이었다. 어차피 심진 계열에서 일하게 될 것이고 이미 그 앞으로 부산과 제주도 소재의 갤러리도 주어진 상태라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 그럼에도 애쓰는 이유가 오직 저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 귀엽다 싶었다.
“급할 거 없잖아. 일찍 졸업해 봐야 아쉽기만 하지.”
“선배도 없는 학교 혼자 다니는 거 싫어요.”
“일 학년 때는 혼자 잘 다녔잖아.”
“그때랑 지금은 다르잖아요. 그리고 급한 건 선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