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9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9화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연 건 김수현이었다.
“그럼, 그 향은 뭐였지?”
“향?”
“내가 머물렀던 연금술사의 집에서 계속 났던 향. 달짝지근하기도 하고, 약간 물 내음이 섞인 꽃 같기도 했는데.”
“아. 그건…….”
습관처럼 주머니로 손을 뻗으려던 여진은, 저 자신이 입고 있는 것이 환자복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는지 짧은 한숨을 터트렸다. 덕분에 일방적으로 견뎌야 했던 과거를 조금은 떨쳐 낸 것 같기도 했다.
“연금술사가 백우에 있는 자기 동료를 만날 때 쓰라고 준 향수야. 서로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면서.”
“…….”
“본부에서 암호 키를 빼낼 계획을 세우고 비밀 회선으로 처음 연락했을 때, 상대가 날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증거 삼아 윤성길에게 조금 선물했었어.”
조금이나마 밝아졌던 목소리는 끄트머리에 덧붙여진 “물론 그땐 메시지를 주고받은 게 혜리인 줄도 몰랐지만” 하는 부분에서 다시 힘이 빠졌다. 수현은 그런 그녀를 무뚝뚝하게나마 격려했다.
“잠깐 쉬어. 피곤해 보이네.”
“……그래. 고마워.”
걸친 바람막이를 더욱 단단히 여민 여진의 고개가 가볍게 아래로 떨구어졌다.
한편, 제 상사의 회상에 내내 침묵했던 교한은 제 연인과는 조금 다른 태도였다. 그는 우여진과 조금 거리를 두자마자 곧장 이야기에서 생략된 의문을 제시했다. 감정 한 줌 없이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형. 죽은 전 대표와 연금술사라는 여자. 부부였을까?”
수현은 곧장 대답하는 것 대신 코트 주머니를 공유한 연인의 손등 위를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저만치에서 고개를 떨군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낮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글쎄. 사연은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박혜리가 그 둘 사이의 딸일 확률이 높을 거 같은데.”
“우여진은 모르는 척하는 건가.”
“그건 아닐 거야.”
드물게도 확신이 실린 단언이었다.
“내가 보기엔…… 이해할 용기가 나지 않는 거 같은데.”
“용기?”
“죽은 척하고 새 인생 살 수도 있었던 걸 연금술사의 자료를 파헤치는 데 매달렸잖아. 오로지 동료들을 위한다는 생각 하나로. ……그런데 정작 그 과정에서 가장 아끼던 사람의 가족을―”
나직하지만 매끄럽게 말을 잇던 수현이 잠시 단어를 골랐다.
“꽤…… 적극적으로 이용한 셈이 됐으니까.”
한때 우여진이라고 알려졌던 여성은 꽤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먼저 발견된 건 현지 수사관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실혈과 잘린 엄지손가락이었고, 다음은 전소된 차 안에서 발견된 시신까지. 남기중을 비롯한 백우 전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에 매달리고 남을 정도로 충격적인 모양새였다.
이교한은 제 연인과 마찬가지로 축 처진 뒷모습을 흘끗 곁눈질했다.
“…….”
분명 이전이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죽을 뻔했는데도 분노하기는커녕 죄책감에 시달리는 우여진도, 불필요한 관심까지 끌어가며 무모하게 스스로를 태우는 박혜리도.
하지만 이제는 안다.
깊은 바다 어딘가에 있을 뼛조각 하나의 귀환에 매달리게 되는 마음을 뼈저리게 앞서 경험한 탓이다. 그러니 어느 쪽에 대고도 효율을 따지고 들 수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막연하게 짐작했다.
‘이교한 팀장님. 사실, 백우에는 팀장님 같은 사람이 몇 명 더 있다는 걸 알고 계세요?’
어쩌면 연금술사는 박혜리가 말한 저와 같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남겨질 사람을 헤아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은, 사실 그리 낯설지 않은 제 과거의 조각이기도 했으니.
잠시 뒤 한 줌의 마음이 ‘유감이네’, 하고 드문 감정을 먼저 출력했다.
* * *
비탄과 격노.
그들 사이에 머무르는 두 인공 지능은 우여진의 말을 검증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선언한 뒤 자취를 감췄다.
특히 유독 혼란스러워 한 건 스스로의 끝을 위해 연금술사를 찾던 비탄이었다. 비탄은 직후에 곧장 대답이 사라졌고, 격노는 나름대로 ‘비상 연락망’으로 문자를 보낼 창구를 만들어 둔 채 조용해졌다.
그 덕분에 두 사람도 아주 오랜만에 숨을 돌릴 틈이 생겼다.
“……이 길 오랜만이네.”
“형은 정말 그렇겠다. 내 ‘출장’, 같이 따라 나온 이후 처음이지?”
정말 오랜만에 함께 살던 곳으로 돌아오는 도로 위.
슬쩍 장난기가 스며든 교한의 말에 조수석에 있던 수현이 작게 헛웃음 쳤다.
이교한이 머물던 일산의 작은 아파트는 우여진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사실 그 선택에는 호의보다 수현이 그 집을 내켜 하지 않는 것이 한몫했다. 당장은 포근한 추억을 회상하는 것보다 푸르고 창백하게 질린 연인의 모습이 더 선명했으니까.
하지만 이 선택에서 수현이 예상치 못한 것도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지냈던 아파트 역시 마지막 기억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태라는 거다.
“…….”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변하지 않은 비밀번호를 입력해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발이 우뚝 섰다. 백우의 정보팀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같은 광경을 모르는 까만 눈동자 역시 동그래졌다.
수현은 난색 위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거실과 멋쩍은 표정인 교한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첫 감상평을 내뱉었다.
“이교한 네 취향은 아닌데.”
“굳이 따지자면…… 어머니랑 동생 취향이지.”
무채색의 얼굴 위로 당혹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다못해 “여기, 오셨었어?” 하고 묻는 목소리는 답지 않게 삐끗 갈라지기까지 했고.
교한은 제 연인이 놀란 틈을 타서 나눠 들었던 상자를 자연스럽게 빼앗았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거실 한편에 정리하는 내내 안절부절못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선인장만 따로 챙겨서 볕이 잘 드는 곳에 옮긴 교한은, 애써 웃음을 삼킨 다음 수현을 이끌었다.
“식사하면서 얘기하자, 형.”
덕분에 원목 식탁은 정말 오랜만에 원래의 용도를 찾았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그들을 반기는 단골 식당에서 포장해 온 음식들을 접시 위로 옮기고, 암묵적으로 약속된 서로의 위치에 앉았다. 전에는 소중함을 채 자각하지 못했던 아주 평범한 일상처럼.
교한이 입을 연 건, 기어이 수현에게 샐러드와 스테이크, 뇨키를 번갈아 먹이고 나서였다.
“우선, 애인이 같은 남자였다는 건 알아도, 형에 대해선 모를걸.”
음식을 씹느라 대답을 하지 못하는 대신 진한 눈썹 사이가 미세하게 좁아졌다. 그 은근한 표정만으로도 ‘이건 또 뭔 소리야’ 하는 게 너무 빤해서, 교한은 결국 작게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잠시 뒤, 교한이 퍽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형이 없을 때, 난 군에서 잠깐 외출해서 애인이랑 만났다가 사고에 휘말린 것처럼 꾸며졌었거든. 꼭 나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처럼.”
“…….”
“백우 쪽에서 내세운 애인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그쪽도 남자였을 거야. 잠결에 자꾸 형을 찾은 걸 의사가 들어 버려서.”
그 시기를 어떻게 버텼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현은 대수롭지 않은 회상에 숨은 생략과 변형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걸 거짓말이라고 명명하기는 싫었다. 희사가 지나가듯 했던 말을 기억해서다. ‘32일간의 정신 건강 의학과 병동 생활’.
수현의 입가로 곧장 작은 스테이크 한 조각이 내밀어졌다. 여전히 제 몫의 포크를 한 번도 써 보지 못한 채로, 수현은 그걸 다시 한번 얌전히 받아먹었다.
“자기야, 우리 앞으로 조심해야 돼.”
“뭘?”
“가족들 만났을 때 말이야. 오래 사귄 티 내면 안 된다고.”
“…….”
약 5년간의 연애.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의 세계는 그렇게 한없이 폐쇄적으로 문 닫힌 채였다.
당연히 ‘상대방의 가족을 만난다’의 선택지가 있었을 리 없다. 이교한은 군인과 큐레이터 둘 모두가 아닌 저를 들킬까 조심스러웠고, 김수현은 평범하고 다정한 가족의 울타리 안쪽으로 발을 내딛는 걸 두려워했던 탓이다.
하지만, 긴 여름과 겨울을 거쳐서 다시 봄을 앞둔 지금.
세상과 그들 사이를 가르던 문은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교한 쪽에서 전처럼 굴 생각이 없어졌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사귀기 시작한 시기만 바꾼다고 생각해.”
교한은 제 연인이 긴장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놀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더욱 사근사근한 어조로 덧붙였다. 한참을 대답 없이 우물쭈물하던 수현은, 그답지 않게 작고 자신 없는 어조로 되물어왔다.
“동물 보호소에서 만난 건…… 그대로야?”
“당연하지. 거기서 만나서 5년 동안 ‘가까운’ 형, 동생 사이로 지낸 건데. 보호소 사람들도 형 다 알잖아.”
“직업은?”
“그대로 번역가 해. 형 번역, 하긴 했잖아. 유령 출판사까지 세워서.”
“……‘지인에서 연인으로 발전’?”
“응. 정확해.”
마치 의뢰를 앞두고 주어진 역할을 확인하는 듯 긴장이 서린 어조였다.
교한은 수현의 접시 위로 음식을 조금 더 덜어 주며 말을 이었다. 코앞에 총구를 가져다 대는 일엔 무심하면서 고작 제 가족을 만나는 일에 겁먹는 애인을 달래듯, 다정하고 또 달콤하게.
“형은 애인을 잃고 혼자 남아 힘들어하던 나를 붙잡아 줬고…….”
“…….”
“나는 그런 형한테 반해서, 이번엔 내 쪽에서 쩔쩔매다 고백한 거로 하자.”
이전에 들은 적 있던 표현이 정반대의 상황으로 되돌아온 것을 깨달은 수현의 얼굴이 조금 멍해졌다. 교한은 그 반응이 좋았다. 애초에 그가 바라 마지않는 건 김수현이 이제껏 갖지도, 알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것을 모두 다 해 주는 것이었기에.
이제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정말, 무슨 짓이든.
“지금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