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8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8화
2년 전.
총 한 자루와 함께 혈혈단신으로 찾아간 꿀색 외벽 집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건 아담한 체형의 흑인 여성이었다. 흔한 지원조차 없이 영국으로 향했던 여진은, 육중한 나무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녀를 정조준했다.
“쏘지 마세요!”
“…….”
“쏘지 마세요, 제발요. 전, 전― 그냥 간병인이에요!”
익숙지 않은 단어 앞에서 순간 이맛살이 찌푸렸다.
물론, 총구는 여전히 상대의 머리를 곧장 꿰뚫을 수 있도록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일부러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방심을 유도하는 것 역시 적잖게 봐 왔었으니까.
“……간병인?”
“오실 거라는 말은 전해 들었어요. 드, 들어오세요. 다행히 마침 깨어 계세요.”
말을 전해 들어? 누구에게?
여전히 의문은 남았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우여진은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자신을 간병인이라고 소개한 여자가 몇 걸음 떨어진 채로 먼저 앞장섰다. 이내 그들은 낡은 방문 앞에 멈춰 섰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여진을 향해 간병인이 작게 말했다.
“들어가세요.”
만약 이게 누군가의 함정이라면 목숨을 보장하기 어려울 거다.
하지만 그날, 우여진은 스스로도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근거 없는 직감을 했다.
이 비밀스러운 초대는 덫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지지부진한 추적을 뒤집을 무언가라고. 등이 식은땀으로 서늘해진 채로도 삐걱거리는 문을 열어젖힌 건 오로지 그 동물적인 확신 때문이었다.
잠시 뒤. 여진은 스스로의 믿음을 보답받았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
방 안에 있는 건, 과연 ‘간병인’이 필요할 누군가였다.
거대한 침대 한가운데 누운 사람은 첫눈에 성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비쩍 말라 산소 호흡기에 숨을 맡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전형적인 환자의 모습만은 아니었는데, 침상을 중심으로 깔린 수많은 모니터들이 그랬다.
네모난 화면들의 크기는 각자 달랐지만 그 안에서 움직이는 군집은 쇠라의 점묘화처럼 하나로 어우러져 오색 빛깔로 반짝였다. 탁상 위의 작은 스피커가 작동한 건 그때였다.
―어서 오세요.
여진은 반사적으로 총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곧장 타깃을 찾지는 못했다. 저렇게 누워 있는 상대를 향해 총구를 겨눠야 하나?
……아니면, 스피커를? 말도 안 되잖아.
한편, 기묘한 목소리는 그 모든 것을 간파한 듯이 말을 이어갔다.
―백우 특수2팀의 팀장, 우여진. 당신을 이곳으로 부른 건 나예요.
“미친. 대체, 이게 무슨…….”
―보다시피 나에게는 우여진, 당신을 공격할 어떤 수단도 없어요. 그럴 의사는 더더욱 없고요. ……혹시 6년이나 쫓던 범죄자의 모습이라기엔 너무 볼품없나요?
“…….”
뭐라 말을 이으려던 여진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그때쯤, 병상에 누운 환자의 시선이 그저 멍하니 허공을 향한 것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기도 했다. 환자는, 아니 연금술사는 작은 화상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고, 왼손에는 작고 가벼운 스위치가 쥐어진 채였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하는데 긴장과 당황이 뒤섞여 자꾸만 머리가 표백됐다. 잠시 뒤, 여진은 가까스로 상대의 꼬투리를 잡았다.
“본인이 연금술사라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그게 사실이니까요.
“증거라도 내밀면서 그런 말을 하지 그래. 이제껏 테러범 흉내를 내는 인간들을 한두 명 본 것 같아?”
―……증거라.
순간 모니터 속을 떠다니던 점들이 세밀하게 쪼개져 모니터의 화소로 분산되었다. 정확히는, 그 수많은 화면 각각에 어떤 모습을 비추기 시작했다.
여진의 안색 역시 곧장 달라졌다. CCTV는 물론이고 노트북과 휴대폰까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촬영된 영상 속 얼굴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익히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바로, 백우의 동료들.
연금술사가 ‘어떤 이유로’ 백우의 블랙리스트 최상단에 올랐는지를 상기한 여진은 곧장 침대에 달려들었다.
“너! 저기서 누구 한 명이라도 건드렸다간 봐. 진짜 죽여 버릴 거야!”
―기쁜 반응이군요.
“뭐라고?!”
―애초에 당신들이 쫓는 티끌만 한 단서들은 모두 내가 심어 둔 거예요.
연금술사가 반쯤 감긴 눈을 한번 깜박였다.
위이잉, 별안간 저쪽에서 기계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겨눈 총 끝에 있는 건, 뜻밖에도 막 작동하기 시작한 프린트기였다.
연금술사가 스피커 속에서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 자. 보이는 것을 믿으세요.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여진은 총을 쥔 채로 천천히 프린트기로 다가갔다.
인쇄물은 차곡차곡 쌓여, 어느새 꽤 두툼하게 잡혔다.
여진은 그것을 첫 페이지부터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한 장 한 장이 지나갈수록, 습격에 반응하도록 달궈진 신경은 손에 쥔 무기가 아닌 종이로 이동했다.
그러다 김수현이 유일하게 확인한―혹은 그렇게 의도된―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랐을 때는, 총구가 땅을 향해 있었다.
“씨발…….”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욕은 더는 연금술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여진은 보고서 속 2세대 OS의 개발과 이를 위한 실험 쥐로 선정된 백우에 대한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님을 직감했다.
애초에 그녀는 백우 한복판에서 개발 중인 소위 ‘2세대’에 대해서 아는 극소수 중 하나다. 당장 머릿속으로 설마, 하는 후보 몇 명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도 믿을 수 없는 부고를 알린 동료의 얼굴들이.
언제 어디서 죽어도 뒤탈 없는 인간들만 수집된 조직이라니. 얼마나 소모하기 좋은지!
한동안 규칙적인 호흡과 미약한 기계 소리만이 방 안을 채웠다. 이내 간신히 끄집어낸 물음엔 혼란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였다.
“너, 이걸…… 나한테 알려 주는 이유가 뭐야?”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서요.
“적합하다니, 뭐가.”
―당신은 기술팀과 특수팀, 둘 모두에서 능력을 인정받았죠. 가족이 없는 대신, 조직에 대한 애착이 몹시 크고요. 그런 당신이 백우의 구성원이 희생되는 일을 묵과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또 무엇보다…….
사람과 기계 그 중간의 목소리가 표현을 고민하듯 길게 늘어졌다. 천장을 향한 눈 역시 두어 번 깜박였다.
―당신은 나와 골격과 체형이 거의 유사하니까요.
실은 마음 한구석에서는 짐작했던 이유가 이어지던 와중에, 처음으로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문장이 끼어들었다. 여진은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뭐?”
―현대 의학이 예상한 이 몸의 기대 수명은 앞으로 몇 주. 하지만 실제로는 며칠일지도 모르지요.
“…….”
―우여진 씨. 당신을 얕보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여기 있는 정보를 파악하고 또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그 뒤엔 이 몸을 활용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죠.
몹시도 메마른 선고의 절반은 이해했지만 절반은 이해할 수 없었다.
“벌써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몸을…… 활용하다니?”
―추격자들을 분산시키려면 요란한 덫이 필요해요. 당신이 그늘에서 자유롭게 움직여도 좋을 만큼 눈에 띄기도 해야 하고.
“…….”
―쉽게 말해, 당신과 나를 바꿔치기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어느 누구도 ‘연금술사’가 죽었다고는 상상하지 못할 테니 뒤탈 없이 효율적인 선택이죠.
깨달음과 납득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
여진은 저도 모르게 자신과 ‘골격과 체형이 비슷한’ 침상 위의 몸을 훑어보다 어깨를 가볍게 떨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는 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부품처럼 여기는 데 익숙할 리가 없었다. 채 소화되지 않은 문장들이 공기 중에 떠다니는 얼음이 되어 살갗을 문지르는 것 같았다.
한참 뒤에야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 혼란만큼 잘게 떨렸다.
“나는 백우에 친구들이 있어서라고 쳐. 하지만 당신은 추적을 피해 도망까지 친 사람이잖아.”
―…….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천장의 카메라만 올려다보던 흑갈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연금술사는 한동안 우여진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잠시 뒤, 스피커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오류를 인정하기까지 6년이 걸렸으니, 마지막만큼은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이 합리적이니까. 그리고…….
초여름의 공기 대신 폐건물의 냉기를 삼킨 여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백우에 두고 온 사람이 있는 건, 당신뿐만이 아니어서’. 연금술사는 그렇게 말했어.”
“…….”
“하지만 그게 혜리일 줄은 몰랐어. 2년 동안 보안 회선으로 연락을 주고받기까지 했는데 짐작조차 못 했다고! 솔직히, 대체 그 애가 영국의 집을 어떻게 아는지도 모르겠고.”
내내 조용히 경청하고만 있던 수현은, 그제야 처음으로 들은 말을 되짚었다.
“박혜리가 영국의 집을 알고 있었다니?”
“연금술사의 집 말이야. 혜리는 당신이 지냈던 방까지 모두 알고 있었어. 자기가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라고 했던가…….”
연인은 그 찰나에 시선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