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7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7화
구급차는 서울을 유유히 빠져나온 뒤로도 한참이나 달렸다. 도심을 벗어난 창밖으로는 산과 공장 따위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차들이 서로를 빠르게 지나쳐 갔다.
수현은 작년 이 길을 따라 차를 몰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는 작은 모니터 속 붉은 원을 따라왔었다. 정확히는, 손수 골라 매어 준 넥타이 뒤에 설치한 위치 추적기로 연인의 뒤를 쫓았다.
긴 운전과 잠깐의 회상 끝에 도착한 곳은 여전히 을씨년스럽게 방치된 경기도 외곽의 폐건물이었다.
“…….”
수현은 1년 전에는 담을 넘고 벽을 타서 잠입했던 회색 콘크리트 뼈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큐레이터가 아닌 이교한을 마주쳤던 자리에 똑같이 섰을 땐, 흐려졌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해졌다.
“시작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 소감은 어때?”
며칠 전, 답사를 위해 이곳에 먼저 방문했던 교한이 말을 걸어왔다. 과거와 다른 게 있다면 뒤에서 자신을 가만히 당겨 안는 품이다.
대답 대신 살짝 올려다보자 장난스러운 눈웃음도 돌아왔다. 서로에게 눈멀어 삐걱거리는 배경 따윈 모두 덮어 두었던 마지막 날. 유독 파리하게 질린 낯빛이었던 것을 상기하면 감격스럽기까지 한 변화였다.
“형. 오늘은 얘길 들어만 보는 거야.”
“……응.”
“너무 골치 아프다 싶으면 형이 지냈었다는 노스다코타 집으로 가자. 나 거기서 얌전히 지낼게. 사고도 안 치고.”
짐짓 태평하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둘 다 안다.
우여진을 강탈한 순간부터 이미 그들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여정의 첫발을 뗐다. 하고 많은 대피 장소 중 하필 여길 선택한 건, 함께 있어 온전했던 때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이나 마찬가지고.
수현은 제 어깨에 턱을 괴고 속삭이는 교한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웃었다.
“왜?”
“매번 목숨이 몇 개라 생각하는 거냐고 혼나던 이 팀장님이, 시골에서 얌전히 지낼 수 있겠어?”
이래서 기억력이 좋은 애인이란.
멋쩍게 마주 웃은 교한은, 신 부장이 지나가듯 했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는 연인의 귀 끝을 가볍게 물었다. 수현은 덩치 큰 맹수의 애교 같은 입질을 담담히 받으며 문득 떠오른 의문을 이어 물었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들은 누구였어?”
“진짜 빨리 물어보네. 이미 어디 묻혀서 뼈만 남았을 텐데.”
“아는 사람들은 아니지?”
“응. 걱정 마. 장기 밀매하던 버러지들이야.”
“아……. 그럼, 뭐.”
달짝지근한 로맨스와 쇠 맛 가득한 살벌함이 단짠단짠의 비율로 혼재된 대화는 작년 이맘때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었다. 큐레이터와 번역가의 평범한 대화에서 찾을 수 있는 위험이라면야 ‘자기야, 가스 밸브 잠갔지?’ 정도가 다였으니까.
한편, 이곳에는 두 남자의 애정 행각을 예상치 못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미친 새끼들아. 나 춥거든?”
바로 태어나 처음 와 보는 낯선 폐건물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방치된 우여진이다. 교한은 그녀를 향해 흘끗 눈짓하더니, 수현을 당겨 안은 그대로 무심히 대답했다.
“대충 앉아서 바람 쐬고 계세요. 기껏 보조 의자까지 챙겨 드렸잖아요.”
“너희들이야 옷 따뜻하게 입고 있지만, 나는 환자복 하나가 다라고! 대체 이런 덴 어떻게 찾은 거야?”
전원을 핑계로 빠져나온 터라 여진의 옷차림은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여진은 솜털이 곤두선 팔을 쓸면서 주변을 살폈다. 보통 이런 곳은 노숙인이나 비행 청소년들의 아지트가 되고는 하는데, 워낙 외져서인지 흔한 불장난 흔적조차 없었다.
그때였다.
“직접 찾았다기보다는, 여기서 백우랑 처음 마주쳤어. ―자.”
여진은 순간 자신을 향해 쓱 내밀어진 검은 바람막이와 그걸 건넨 사람을 번갈아 봤다.
김수현은 ‘그쪽이랑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데 죽은 척했어’ 하고 태연하게 말하던 태도 그대로, 제 점퍼를 벗어 내밀고 있었다.
“뭐야. 설마…… 나 입으라고?”
“그럼?”
“…….”
뒤에서 곱상한 악귀 하나가 눈깔 살벌하게 뜨고 있는데.
여진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대답을 삼켰다. 그사이 산 중턱다운 쌩한 바람이 한번 지나갔다. 에이, 모르겠다. 여진은 결국 모르는 척 수현의 옷을 받아 들었다.
물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이교한이 아니었다.
그는 전 상사가 얼마나 떫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든지 말든지, 자신의 183cm 솜털 연인을 애지중지하기 바빴다.
“형은 이거 걸쳐.”
“괜찮아.”
“싫어. 내가 안 괜찮아.”
교한은 “쓰읍, 자기야. 빨리” 하고 가볍게 다그치기까지 해서 기어이 제 코트를 수현에게 입혔다. 아니, 입히기만 했을까? 팔소매도 넣어주고, 단추도 하나하나 손수 잠가 줬다.
결국 우여진은 두 남자가 꼬옥 맞잡은 손을 코트 주머니에 함께 넣는 꼴까지도 모두 지켜봐야만 했다. 이교한의 ‘수현이’ 사랑은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 그 유명세가 뼈저리게 실감 나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솔직히 영국에서 같이 지낼 때만 해도 내심 긴가민가했다.
저렇게 무뚝뚝한 사람이 낯 뜨거운 애정 공세를 받는 대상이라는 게 잘 그려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의심할 여지가 없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김수현은 인간 이교한의 버릇을 망친 문제의 애인이 분명하다. 까만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이교한의 손을 타는 것만 봐도 뻔하다.
1분 전까지 총질하며 누군가의 머리에 바람구멍을 만들다가도, 고놈의 휴대폰만 들면 ‘자기, 여보, 뭐 해, 잘 자, 사랑해’ 5단 지랄을 떨 때부터 심상치 않더라니.
“아. 꼴 보기 싫어…….”
“뭐라고요?”
“아니, 빨리 본론이나 들어가자고.”
저도 모르게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던 여진은 얼른 말을 고쳤다.
어쨌거나 세 사람 모두 저마다 따뜻해졌고, 서 있는 것이 힘들 수도 있겠다며 챙겨 준 간이 의자 역시 도움이 됐다.
“이번에도 선문답할 생각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걸요.”
“빼내 준 은혜 정도는 확실히 갚을 거야. 보다시피 나도 이젠 여유가 없기도 하고. 하지만 너희들이 뭘 알고, 뭘 모르는지 감도 안 오는데.”
“―어렵게 갈 필요가 있나.”
백우의 전현직 팀장들 사이의 대화에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수현은 제게 쏠린 시선 앞에서 눈도 깜박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백우의 박혜리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 이유. 그거부터 시작하지.”
여진이 작게 앓는 한숨을 내쉬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곧장 직구가 꽂힐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이교한과 김수현은 입을 다문 그녀를 닦달하지 않고 시간을 줬다. 애초에 그들 역시 가진 패를 다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박혜리에게 왔던 의미심장한 전화 같은 것을.
잠시 뒤, 언제나까지 이어질 것 같은 침묵이 끝났다.
“우선……. 이교한, 넌 박혜리가 누군지 알아?”
들은 질문에 다른 의미가 있는지 한번 곱씹은 교한은, 버릇처럼 비꼬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저와 비슷한 시기에 백우로 들어온 정보팀 요원. 아닌가요?”
“뭐. 그것도 틀린 얘기는 아니긴 해. 하지만 제일 중요한 알맹이는 따로 있지.”
여진은 응급차 구석에 있던 슬리퍼를 신은 발을 공연히 시멘트 바닥에 벅벅 문질렀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은 건, 작게 일어난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였다.
“혜리는, 죽은 백우 전 대표의 딸이야.”
“…….”
“남기중이 그 애를 얼마나 싸고돌았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 대놓고 내색한 적 없었지만……. 그래도 눈치 빠른 사람들은 알았을 거야. 언제였나, 누가 나한테 혜리가 남기중 친척이냐고 물어본 적도 있거든.”
교한은 고개를 삐딱하게 한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햇살 보육원의 원생들을 만나러 갔을 때를 새삼 상기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정말로 정체 모를 전문 업자와 내통한 것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영 허술한 감시인 박혜리가 왜 따라오나 했더니. 박혜리야말로 남기중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오랜 의문 하나가 풀렸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 의심 많은 능구렁이가 연달아 뒤통수를 맞았으니 얼마나 독이 올랐을지 뻔히 그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어진 우여진의 말만큼 남기중을 미치게 할 건 없었을 거다.
“그리고 그 애가 나한테 약을 먹인 이유는……. 혜리의 표현을 빌리면, ‘내가 연금술사를 죽여서’?”
수현이 왼쪽 귀에 깊숙이 꽂은 이어폰에서 날카로운 이명이 난 건 그때였다. 이교한은 모든 일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추적 상대의 부고보다도 연인의 표정에 먼저 반응했다.
“형?”
“……아니. 별거 아냐. ―우여진, 방금 그거. 무슨 소리지?”
말을 끊지 않으려는 노력은 다행히 빛을 발했다.
우여진은 제 연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이교한과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김수현. 그 둘을 번갈아 본 다음 살짝 쉰 목소리로 답했다.
“김수현, 당신도 아는 연금술사의 집. 거길 누군가의 제보를 받고 갔었다는 건 사실이야.”
“그런데?”
“그런데, 그곳이 비어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덧붙인 속삭임은 깊이 묻어 둔 과거를 떠올리려는 듯 유독 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