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6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6화
다음 날 오전.
며칠 내내 경계가 삼엄했던 병실 안팎은 처음으로 부산스러워졌다.
그 기색을 눈치챈 여진의 태도 역시 달라졌다. 다시 말해 허옇게 질린 안색과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전날 새벽 남기중이 단 한 마디를 들으려고 매달려야 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쉽게.
“야. 남기중이 나 어디 바다 한가운데 빠뜨리라던?”
“…….”
“아님, 시멘트에 공구리라도 치래?”
“……조용히 좀 계시죠.”
“뭐야. 왜 마가 뜨는데? 둘 중 하나 맞구나.”
내내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백우 요원 하나가 나직이 대답한 건 살벌한 선택지 앞에서 의료진들의 눈이 갈피를 잃은 순간이었다.
애초에 우여진은 서울 한복판의 카페에서 원인 불명의 독에 당해서 실려 온 환자였다.
겨우 처치하여 숨을 붙여 둔 후에도 의아한 일투성이다. 난데없이 한 층 절반을 모두 비운 다음 삼엄한 경계가 세워지질 않나, 오가는 의료인들의 휴대폰을 모두 검사하질 않나.
직원들끼리도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기에 위에서도 무조건 협조하라고만 한대요?’ 하고 수군대기 시작한 지금. 험악한 표현이 농담처럼 들릴 리가 없었다.
결국 백우 요원 하나는 낄낄대는 여진의 웃음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가까스로 인상을 폈다.
“전원 관련해서 몇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잠시 같이 가시겠습니까?”
“예, 예에. 알겠습니다.”
오들오들 떠는 의료진과 턱밑까지 치받은 한숨을 삼키는 요원들. 그 모두가 떠난 병실 안은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여진은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긴장을 풀고 침대에 편히 누웠다.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실없는 말을 늘어놓은 건 당연히 아니다.
오히려 너무 뻔해서 짐작을 끝마친 쪽이지.
“…….”
당장은 외딴곳에 있는 병원부터 시작할 거다.
그다음은 전기가 끊긴 외딴 별장일까?
어쩌면 지도에 제대로 표시조차 안 된 섬일지도. 어디가 됐든 세상과 떨어진 곳에서 아는 모든 것을 내뱉을 때까지 달달 볶일 것이 뻔하다.
다 토해 내고 난 뒤에는 기밀을 잔뜩 아는 위험 분자로 낙인찍혀 사회와 분리될 테고.
거 되게 우울한 미래네.
여진은 희멀건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겨우 몇 초 뒤. 빤하게만 보이던 앞날은 요란한 화재 경보와 함께 엇나갔다.
“뭐야? 무슨 일이야!”
“지금 확인 중입니다!”
몸만 멀쩡했더라도 딱 이럴 때 몰래 도망치는 건데.
여진은 소란해진 문밖 상황을 들으며 짐짓 태평한 생각을 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나가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게, 도주는커녕 입원한 층을 벗어날 자신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괜한 시도를 했다간 다음 병원에서 경계가 더 삼엄해질 게 뻔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친동생처럼 아꼈던 아이에게 죽을 뻔해서 병실에 처박힌 현실의 우울을 떨칠 수 있으니까.
병실의 문이 활짝 열린 건 그때였다. 곧장 이동식 침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밀려들어 왔다.
“뭐야. 가는 날이 장날이다, 뭐 이런 건가.”
“…….”
“여기 남기중 있었으면 엄청 웃겼겠다. 그 성격에 절대 우연일 리 없다고 난리였을 텐데.”
금속음과 함께 뒤따른 남자는 병원 방문객으로 위장한 현장 요원의 교과서 같았다.
깊게 눌러쓴 모자에 거슬리는 것 없는 편한 옷차림. 눈만 빼고 얼굴을 전부 가린 마스크. 거기에 정말 불이 난 건지, 아니면 오작동인지 말해 주지도 않는 무뚝뚝함까지.
뭐랄까. 너무 전형적이어서 심술을 부추긴다고나 할까.
끽해야 제가 훈련시켰던 요원들 중 하나일 텐데.
왠지 오기가 생긴 여진은 유일하게 여유로운 입을 있는 힘껏 이용해 주절거림을 이어 갔다.
“아직 백우에도 의리가 남아 있었나 봐. 이렇게 서둘러 주다니 감동적이네? 야, 넌 내가 나중에 꼭 승진이라도 시켜 달라고 귀띔…….”
―아니, 이어 가려고 했다.
이동식 침대를 바짝 붙인 채 기계처럼 움직이던 남자가 별안간 뚝 손을 멈추고, 제 목덜미 아래 베개를 확 낚아채기 전까지는. 병원 전체를 쩌렁쩌렁하니 울리는 경보에 정신이 산만한 와중에 시야가 크게 들썩였다.
심지어 다음 행동은 의아함을 자각하기도 전에 이어졌다.
“큽, ……우윽, 읍!”
불과 몇 초 전까지 뒤통수를 기댔던 베개는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사용됐다.
다시 말해 환자의 편의를 위해 크고 푹신하게 만들어진 베개가 안면 전체를 감싸 짓누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시야는 물론이고 코와 입이 동시에 틀어 막히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여진은 사지를 퍼덕이며 제 숨통을 조이는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베개를 가운데 두고 단어 그대로 얼굴을 짓이기는 힘 앞에서 차츰 숨이 모자라기 시작했다.
잠깐 방심했다고 이따위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을 몽롱하게 떠올린 찰나.
해방 역시 급습처럼 갑작스레 찾아왔다.
“―허억, 헉! 하아……!”
빼앗겼던 산소가 돌아오며 갑자기 혈류가 몰린 머리가 윙윙 울렸다.
병원의 모든 스피커를 터트릴 기세인 경보음 역시 어지럼증을 가중시켰다. 정말이지 혼을 쏙 빼놓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써야 할 거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제 머리맡에 있는 상대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하게 들렸다. 마스크로 입가를 가린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선명히.
“조용히 좀 해요.”
“뭐……. 하아, 뭐, 뭐라고?”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좀 하라고.”
사람은 너무 억울하면 외려 그걸 느낄 새도 없다. 그저 제가 들은 말을 곱씹게 될 뿐이다. 정말 시끄러운 건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지. 그래 봤자 뭐 얼마나 말했다고?
“할 수 있죠?”
뿌연 시야로는 모자를 푹 눌러쓴 상대의 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밭은 숨을 헐떡이던 여진은 결국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낮게 “좋아. 얌전히 있으세요” 하는 달갑지 않은 명령이 이어졌다.
누구지. 들어 본 목소린데.
씨발, 분명, 아는 녀석인데…….
여진은 머리끝까지 이불에 덮인 채로 실려 가는 내내 의식 저편에서 아롱대는 이름표를 잡아 내려 애썼다. 하지만 저조한 몸 상태에 골이 쪼개질 것 같은 굉음이 겹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시건방진 요원의 정체를 확인한 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직행해 작은 사설 응급차에 실렸을 때였다.
“오랜만이네요.”
입 좀 막겠다고 베개로 질식시키려 든 사이코의 정체는 정답을 알고 보니 참 잘 어울리기는 했다. 덩달아 열이 뻗쳐서 문제지.
검은 마스크를 슥 내리면서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 희고 반질반질한 얼굴이라니. 긴장으로 차가워졌던 온몸으로 순식간에 뜨거운 피가 돌았다.
“이교한. 너……! 이 미친 새끼가!”
저도 모르게 마주 인사하는 것 대신 욕부터 쏟아 내자, 눌러쓴 모자를 벗으며 머리를 정돈하던 교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예의를 갖춰서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왜 이렇게 말이 거칠지.”
“예의?! 고마워해? 대체 뭘?!”
“컨테이너 박스 같은 곳에서 평생 썩을 수도 있었던 걸 구해 준 거요?”
여전히 속은 부글부글하지만 들은 말을 허투루 넘길 수는 없었다. 여진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 걸 느끼며 크게 심호흡을 몇 번 한 다음, 전보단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 남기중 명령으로 움직이는 게…… 아냐?”
“제가 그쪽 전남편이랑은 영 안 맞거든요. 좀 짜증 나게 굴어야지. 둘 다 참 똑같으시다니까.”
도통 삐딱하게 나오는 전 부하의 태도에 이를 악물면서도 다시금 욕을 토해 내지 않은 건, 누군가를 새삼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교한은 자신과 남기중을 묶어 ‘둘 다 참 똑같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교한도 다를 바 없었다. 애초에 근 몇 년 동안 남기중을 자신의 앞에서 전남편이라고 콕 집어 지칭한 건 단 둘뿐이니까.
이교한.
그리고, 이교한의 애인이었던 남자.
수묵화 같은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왠지 입씨름할 의욕이 사라졌다.
애초에 우여진은 그 여름의 석양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본 사람 중 하나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소리쳐 따질 계제도 아니다. 몰려드는 백우 요원들을 피해 도망치느라 제 부하가 피 흘리고 쓰러진 걸 제대로 돌보지도 않았으니.
자격 상실은 물론이고, 준 만큼 돌려받은 셈이다.
입맛이 썼다. 여진은 팽팽하게 당겼던 어깨에서 가까스로 힘을 뺀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귀찮은 사람들이 따라오지 않을 만한 곳요. 아무래도 이번에는 물어볼 게 좀 많을 거 같아서.”
“……운전하는 사람은 누군데. 믿을 만해?”
사실 깊은 고민을 전제로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요원으로 오래 구를 만큼 구른 터라 자각도 없이 튀어나온 확인 절차에 가까웠을 뿐. ‘잘 모르는 사람인데요’ 같은 대답이 돌아왔어도 그러려니 했을 거다.
하지만, 말갛고 또 무표정했던 얼굴 위로 순간 감정이 덧칠되는 광경은 교한을 오래 본 그녀에게도 제법 생경했다.
갈색 눈동자는 별이라도 박은 듯 반짝거리고, 도톰한 입술 끝은 개화하듯 위로 올라갔다. 방긋 당겨 올라간 광대 역시 손을 대면 연분홍 물이 번질 것처럼 발그레해진 건 물론이다.
단출한 응급차 뒤 칸에 여전히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바깥보다도 먼저 봄이 찾아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우여진을 정말 놀라게 할 마지막 한 방은 따로 있었다.
“……안녕.”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듯 보조 창 너머에서 들린 나직한 인사 앞에서 여진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