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5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5화
한편, 답지 않게 토라진 내색을 한 이후로 내내 조용했던 비탄이 의견을 덧붙인 건 그때였다.
―글쎄요.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걸 유희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출구 없는 함정에 자진해서 들어올 리가 없을 텐데요.
“…….”
연인의 눈높이에 맞춰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가던 교한이 일순 조용해졌다.
김수현은 그 침묵 속에서 제 연인이 ‘그가 생각했던 모든 계획’을 다 말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휴대폰 속 두 번째 유서에서 무너지지 않았다면, 언젠가 반드시 저지르고 말았을 자기 파괴적인 어떤 것을.
굳이 그걸 지금 당장 꺼내 물을 필요는 없었다.
대신, 교한의 손을 찾아 단단히 손깍지를 끼었다.
그러자 여전히 악몽에서 깨어난 걸 완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어깨가 작게 흠칫했다. 이어진 담담한 목소리만 들었다면 절대 알 수 없었을 애틋한 동요였다.
“……그럼,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은 쪽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아담한 거실은 다시금 적막에 찼다.
교한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희사는, 정작 그 뒤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심술이 난 듯한 격노가 ‘그대! 듣고 있는 걸 알아. 대체 왜 숨는 거야?’ 하고 대신 따지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결국, 기술적인 부분엔 문외한인 수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이럴 땐 늘 만능 키나 다름없었던 사람이었다.
“다운이한테 방법을 물어보는 게 좋을까.”
“그쪽도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사실 좀 더 편한 길은 따로 있잖아?”
“편한 길?”
“우여진.”
맞는 말이었다. 훔친 OS를 조각 내 뉴욕 한복판에서 풀어 둔 당사자라면 그 반대에도 누구보다 정통할 터였다. 애초에 연금술사의 외딴집을 찾아내고 그곳에 은둔한 것도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수현은 성태에게 들었던 말을 상기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는, 지금 백우에서도 소재 파악이 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아쉬움이 깃든 문장은 채 끝까지 완성되지 못했다.
별안간 일정하게 들리는 진동 때문이었다. 교한의 휴대폰이다.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걸려 온 화면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기도 전에, ‘허성태군요’ 하고 비탄의 알림이 먼저 따랐다.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저, 혹시 통화 괜찮으십니까?
성태의 목소리가 유독 작은 속삭임처럼 느껴지는 건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려서 받았기 때문만은 아닐 거다. 교한은 지체 없이 말을 받았다.
“네. 뭐죠?”
―저도 아직 상황을 다 전달받지 못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알고 싶어 하실 것 같은 정보라.
성태가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간의 웅성거림이 지나간 뒤, 더욱 작고 빨라진 목소리가 급히 따라붙었다.
―우여진 전 팀장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이교한과 김수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와중에 묘한 단어 사용을 곧장 깨닫기도 했다.
“‘발견했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성북구의 한 카페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된 걸 막 보고 받았습니다.
“……뭐?”
―다행히 목숨을 건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게……. 좀.
언제나 빠릿빠릿하던 성태답지 않은 우물쭈물함이었다. 거기서 다분히 감정적인 망설임을 짚어 낸 교한은, 고민할 여지를 주지 않은 채 파고들었다. 수현을 대할 때의 물렁함 따위는 찾을 수 없는 태도였다.
“말을 똑바로 하시죠. ‘그게 좀’, 뭐?”
―무, 무기고에서 보관하던 약물이 빈다고 합니다. CCTV상으로는, 그걸 가져간 사람이…… 정보팀 박혜리로 보인다는데요.
“…….”
―하, 하지만. 말이 안 되잖습니까? 그렇죠, 팀장님?
그리 길지 않은 성태의 보고 여기저기에는 사사로운 여지가 가득했다. ‘입니다’가 아닌 ‘보인다는데요’ 같은, 방어적인 표현만 봐도 그렇다.
어쩌면 허성태가 전화를 건 것은 단순히 정보 공유 차원은 아닐지도 몰랐다. 황경민에 이어 박혜리까지. 가깝게 지내던 동료의 이면을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당장 누구에게라도 공유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번 일에는 학습된 위로조차도 어려웠다.
“박혜리의 위치는요?”
―지금 그것도 파악 중입니다만. 저…….
“다른 소식 들어오는 게 있으면 연락 주세요.”
건조하게 말을 자른 건 이교한이 매우 드물게 할 수 있는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다’라는, 일종의 완곡한 표현이라고나 할까. 오래 호흡을 맞춘 성태는 그 의미를 눈치챘는지 긴 한숨으로 침묵했다가, 이내 “예, 알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곧장 바통을 이어받은 건 수현이었다.
“‘박혜리’라면……. 같이 비행기 타고 이동했던, 그?”
“응.”
교한은 놀란 눈이 되어 저를 바라보는 연인에게, 며칠 전의 전화 통화를 천천히 입에 담기 시작했다.
* * *
남기중이 병원을 찾은 건, 사흘 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깊은 새벽이었다.
이런 야심한 시간대를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다. 상황을 처음 보고받았을 때 곧장 공항으로 향했으나, 기상 악화 때문에 지체되었을 뿐. 그 딴에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온 거다. 하필 시곗바늘이 이른 숫자를 가리킨 시간인 건 오해를 사기 좋은 우연이다.
예컨대, 지금의 만남을 비밀로 하고 싶다는 오해.
병실은 문 안팎으로 경계가 삼엄했다.
이곳에 입원한 환자가 단순한 도주 전적을 넘어서 스스로의 죽음조차 꾸민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기중은 자신을 향해 꾸벅 인사하는 요원 몇 명을 향해 작게 턱짓했다.
“잠시 나가 있게.”
“예.”
깍듯한 대답만큼이나 조용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잠시 뒤, 병실은 가습기의 일정한 소리 외에는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게 고요해졌다. 기중은 그 적막 속에서 머리카락 한 올 삐져나온 것 없는 둥그런 이불 섬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석상처럼 꿈쩍 않던 그가 입을 연 건,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이었다.
“매번 죽거나, 죽을 상황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는 거. 참 지독하지.”
“…….”
“여진아, 그래도 이번에는 ‘알아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는 걸 감사하게 여겨야 할까?”
이불 너머로 작은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기중은 그 소리에 잊었던 피로가 몰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뿔테 안경을 벗고 제 눈가를 주물렀다. 침대 근처에 대충 놓여 있던 네발 의자를 당겨 앉은 다음엔, 짧은 안부 인사도 자취를 감췄다.
“박혜리는 왜 만난 거야?”
남기중은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곱씹었던 질문을 시작으로, 심문 아닌 심문을 시작했다.
“그 애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고?”
“…….”
“조직에서 만든 독을 썼어. 네가 개발한 그거. 어이없지만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더라.”
솔직히 곧장 대답이 돌아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탈력감이 뒤따르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억눌린 한숨 반, 초조함 반으로 뒤섞인 다그침이 이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혜리잖아. 널 그렇게 따르던 애가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말하는 게 힘들어? ……왜 1년 넘게 죽은 척했는지 말해 달라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에 덧붙인 문장은 귀가 밝은 자라면 병실 밖에서 들을 수 있을 만큼 커졌다.
그걸 자각한 남기중은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면서 들끓는 속을 가까스로 식혔다. 다행히 응급 처치는 유효하게 작용하여, 다음에 흘러나온 목소리는 한결 정돈된 채였다.
“앞으로 해명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을 거야.”
“……꺼져.”
“내 말 끝까지 들어!”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생환 끝에 제 귀로 처음 듣는 대답이 단 두 글자의 빈정거림이라면 멀쩡하게 견디기가 쉽지 않다. 기중은 결국 다시 한번 참지 못하고 덩달아 으르렁댔다.
“난 지금, 그 과정에서 내가 막아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는 말을 하는 거니까!”
내내 꿈쩍 않던 이불이 휙, 신경질적으로 내려간 건 그때였다.
남기중은 자신을 보는 우여진의 눈에서 바닥없는 불신을 보았다.
한때 서로가 세상의 전부였던 관계가 끝이 났을 때. 그 결말은 이렇듯 대체로 남보다 못한 사이다. 그래도, ‘더는 못 버티겠어. 죽은 사람에게만 매달리는 꼴 보는 거 이제 지긋지긋해. 그냥 선후배로 돌아갈래’ 하고 이혼 서류를 내밀었을 때보다 심한 얼굴을 볼 줄은 몰랐는데.
어떤 대화도 이어 나가지 못할 것을 직감한 기중은 혼잣말처럼 “그럼 쉬어” 하고 중얼거린 후 곧바로 병실을 빠져나왔다. 의자에서 일어나는 순간, 힘이 빠진 무릎 탓에 살짝 휘청거린 것을 상대가 눈치채지 못했기를 바라면서.
복도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요원 하나가 곧장 다가왔다. 기중은 표정을 담담하게 고친 채로 보고를 받았다.
“대표님. 내일 오전에 경기도의 작은 요양 병원으로 전원할 예정입니다. 이곳은 보는 눈도 많고, 오래 통제하기도 어려워서요.”
“……그래. 그렇게 하게.”
어차피 시간문제다.
온전하지도 않은 몸 상태인 건 차치하고서라도 더는 도망칠 구석이 없을 테니까. 알아내야 하는 것들은 하나하나 차분히 물으면 될 거다.
기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그다음 날, 지금의 이 판단을 얼마나 후회하게 될 줄 모르고.
하지만 죽음에서 돌아온 유령과 그의 연인이 조심스레 움직이리라는 걸 예상하지 못한 건, 분명 남기중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