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4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4화
6. Bulletproof Love
다 울고 나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 말해 달라고 하기는 했지만, 사실 그러고도 대답은 한참 뒤에야 들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교한이 김수현과 눈만 마주쳐도 그렁그렁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가장 충격받은 사람은 역시 허성태였다.
두 사람이 사귄 햇수보다 더 오랜 시간을 나이 어린 상사와 지냈던 그는, 차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수현보다도 쩔쩔맸다.
병원 관계자들 역시 창백한 미청년의 입원 사유를 게이 치정 사건으로 내심 확신했음은 물론이다. 따지고 보면 오판이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결국 교한이 겨우 입을 연 건 작은 아파트로 돌아오고 나서였다.
너무 아픈 부분은 조심스럽게 편집한 지난 몇 달을 다 듣고 난 다음. 그제야, 대화로 분류할 수 있는 반응을 그제야 처음 했다.
“……그럼, 지금은?”
“응?”
“지금은, 아픈 곳…… 없어? 괜찮아, 형?”
하늘의 별은 따다 주지 못하지만, 대신 누군가의 목을 따다 달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던 수현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여전히 눈과 뺨이 발그레한 애인에게 “약 먹고 실려 갔다가 막 돌아온 사람은 너잖아”, 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교한의 시선이 계속 제 왼팔에 있었다는 걸 눈치 챈 지 오래였으니까.
“응. 멀쩡해.”
힘주어 대답하자마자 교한이 푹 안겨 왔다. 살을 맞대고 체온을 공유해야만 안심할 수 있다는 듯, 커다란 몸을 구긴 채로.
그래서, 네 환자복을 갈아입히면서 본 복부의 흉터 때문에 저도 많이 울었다는 건 비밀로 두어야겠다고. 수현은 지난 일주일간의 ‘무단 쇼핑’ 결과 중 하나인 소파에서 교한을 다독이며 생각했다.
―……미안.
천장의 오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사과는 자칫 층간 소음의 일부로 오해할 만큼 작았다. 하지만 이어진 말 덕분에 화자를 헷갈리지 않고 귀 기울일 수 있었다.
―휴대폰에, 그 기억을 둔 건…… 이교한 그대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었어. 잠깐 자리가 필요해서 그런 거였는데…….
“그 기억?”
미동도 없는 교한 대신 격노의 말을 받은 건 수현이었다.
짧은 적막이 흐르고, 순간 남성체의 것으로 착각할 만큼 훅 낮아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수현, 그대가 요트에서 나에게 한 부탁.
“…….”
수현은 제 품에 고개를 기대고 있던 연인이 거의 파묻힐 기세로 안기는 걸 느꼈다.
격노가 어떤 상황에서 목소리 톤이 오락가락했었는지를 상기하면, 제 마지막은 AI의 사고마저 불안정하게 한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몹시도 미안한 일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자 교한이 천천히 숨을 다시 쉬는 게 전해졌다.
“……우리에게 했던 짓을 여전히 반복하고 있어. 상황과 방법만 바꿔서.”
품 안에서 웅얼거리는 듯 흘러나온 문장의 주어를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수현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지 않는 다른 손으로 연인의 등을 다독였다.
“관심을 많이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걸 학습이라도 했는지, 마치 개인적인 원한인 것처럼 규모는 줄였지만……. 대신 결말을 확인하는 방식이 좀 더 지독해졌어.”
“…….”
“사소한 선택으로 상대가 확실히 죽거나, 살아남더라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관계가 되도록 하거든.”
수현의 품에 빈틈없이 안겼던 교한이 그제야 살짝 고개를 들었다.
교한은 다시 눈가를 적시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조금쯤 더 우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갈색 눈동자에 가득 담긴 그늘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형이 살아 있다는 걸 알면 무슨 짓을 하려고 들까?”
막연히 희망에 찬 대답은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수현은 상상과 추측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확신은 뜻밖의 존재에게서 나왔다. 몰래 훔쳐 듣기만 하고 제대로 안부를 나누지 못한 또 다른 동료였다.
―아뇨. 이번엔 전처럼 안 될 거예요.
수현 대신 교한의 질문에 답한 비탄은, 곧장 수현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이네요. 김수현 씨.
“그래. 안녕.”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딴에는 반가움을 가득 담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목소리는 이번에도 예상치 못할 만큼 냉랭했다.
―저를 기만한 일주일은 재미있으셨나요?
“기만까지는…… 아니었는데.”
―아뇨. 그건, 기만이에요. 어떻게 제가 활동 범위를 줄인 틈을 타서 격노와만 소곤대실 수 있죠?
확실히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다. 비탄은 멋쩍게 눈만 깜박이는 수현을 여유를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심지어 지금 앉은 소파도, 냉장고도, 샐러드와 슈크림 미니 붕어빵까지 전부 다! 김수현 씨가 주문한 거라면서요!
무뚝뚝한 인공 지능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격앙된 어조였다.
그래도 고마운 게 있다면, 요 몇 달간의 습관처럼 그늘로 빠지려던 교한이 그 말에 붙들려 건져졌다는 거다. 자각도 못 한 사이 사랑으로 뒤덮인 지 오래였던 현실로.
수현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저를 보는 연인과 천장의 스피커를 번갈아 본 다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나직이 대답했다.
“미안. 이제 그만 속 썩일게.”
“…….”
―…….
까만 눈동자가 익숙한 구조의 아파트를 가볍게 훑었다.
그들이 앉은 소파부터 제가 주문한 작은 냉장고, 이불……. 그리고 볕이 드는 바닥에 놓인 작은 선인장까지.
저건, 내가 보내 준 게 아닌데.
수현이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저 작은 화분에 담긴 비밀은 습관적으로 정보를 긁어모으는 인공 지능들조차도 아직 모르는 것이다.
다행히 수현의 관심사는 거실 벽면으로 이어졌다. 휑한 집 안에서 유일하게 밀도가 빼곡한 곳으로.
교한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조금 전까지 안겨 있던 몸을 반대로 조심스레 이끄는 것도 함께다.
“…….”
백우에서 수집한 유희의 활동을 읽는 내내, 수현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짧은 욕 한마디조차도. 오히려 그 적막을 견디지 못한 건 교한이었다.
“형. 역시 더 안전한 곳으로 갈까? CCTV는커녕 사람도 안 사는 곳들 있잖아. 그런 데라면 괜찮을 테니까…….”
교한은 마치 이 모든 것들이 스스로를 내던졌다 돌아온 연인에게 다시 상처를 줄까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수현은 담담히 되물어 올 뿐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어?”
“…….”
“말했잖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먼저 제안을 내놓은 것이 무색하게 입이 꾹 다물어졌다.
사실, 당장 ‘응, 그럴래’ 같은 대답이 나오지 않는 이유야 뻔했다. 수현이 없는 시간을 견디며 수없이 반복했던 상상들 때문이다.
고작 편지로만 함께했던 곳들을 형과 진작 같이 가 볼걸. 조금 더 일찍 형이랑 같이 뉴욕에 갔으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고민 따위 말고 형한테 프러포즈를 했었다면…….
뒤늦게 하나하나 후회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런데 가까스로 다시 기회가 주어진 지금,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니. 끔찍한 모순이었다. 무엇보다, 김수현은 제 애인의 표정을 세상 누구보다 잘 읽는 사람이었고.
“이걸 이렇게 펼쳐 두고 있었다는 건 뭔가 생각하던 게 있다는 거지?”
“……자기야.”
“뭔데. 말해 봐.”
“그러다 또―”
“전처럼 안 될 거라잖아.”
“…….”
“무엇보다 내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아, 절대로.”
수현이 교한의 뺨을 아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살결의 감촉과 온도가 충분히 느껴지도록, 천천히. 한동안 시선을 내리깐 채로 침묵하던 교한이 대답한 건, 수현이 “다신 너만 두고 안 갈게. 응?” 하고 거듭 덧붙인 뒤였다.
“……윤성길의 부하는, 윤성길이 강력한 보안의 이동 장치 연구에 매달렸다고 했어.”
윤성길.
수현은 그 이름을 어렵지 않게 기억 속에서 찾아내었다. ‘나래 아트센터 정보 부장’. 제가 백우와 얽히게 된 가장 큰 계기나 다름없는 사내였다. 제 손으로 끝을 냈기도 하고.
“보안이 강력한 이동 장치라는 건 뭔데?”
“쉽게 말하면, 본부에서는 가동조차 할 수 없었던 누구 씨의 암호 키 같은 거지.”
기술 문명과는 거리가 먼 연상 애인이 답지 않게 맹한 표정이 되기 전에, 상냥한 설명이 뒤따랐다.
“―생각해 봐, 형. 이렇게 자기 멋대로 구는 AI를 입맛대로 쓰려면 족쇄가 필요하지 않겠어? 하지만 가동조차 복잡한 기존 방식은 곤란하잖아. USB에서 자료를 꺼내듯 원하는 순간에만 쓰고 싶을 텐데.”
“아.”
―하! 자기 멋대로 군다니?!
다행히 격노는 언제 기가 죽었었냐는 듯 여자아이의 높은 음역대로 돌아온 채였다. 회복된 기세에 한결 마음이 편해진 수현은 들은 말을 꼼꼼히 곱씹은 다음, 따라잡은 내용을 입에 담았다.
“그러니까, 원래 OS를 암호 키에 담아 뒀던 것처럼 묶어 둘 방법이 있을 거라는 뜻인가.”
“……혼자만 ‘육체의 구속에서 자유로운 몸’을 즐기게 둘 순 없잖아?”
교한이 글자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일전에 유희가 퍽 자랑스러운 어조로 외쳤던 표현을 빌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