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3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3화
달이 검은 어둠을 걷어 낼 수 있는 건, 실은 태양 덕분이다.
회색 위성은 우주에서 홀로 반짝이지 못한다. 대신 마주한 빛을 자신의 몸을 모두 써서 반사할 뿐이다. 잠시 그늘진 대지가 너무 외롭지 않도록.
열다섯 살의 김수현은 태양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었지만, 사실 그 둘은 서로 교대해 가며 창백한 푸른 점을 끌어안는 셈이다.
그리고 지금.
긴 밤이 끝나고, 연인이 잠든 병실 창문으로 아침이 찾아왔다.
‘보호자분께서 이러시면 정말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제가 얼른……. 저, 잠시…….’
수군대는 소리에 먼저 잠에서 깬 건 이교한이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탓일까. 환자를 위한 공간답게 곧장 직사광선이 내리쬐지 않게 되어 있는데도 유독 눈이 부셨다.
이상할 정도로 평범한 아침이었다.
늘 환상통처럼 뒤따랐던 오른쪽 복부의 욱신거림도, 사지에 추가 매달린 듯한 무거움도 없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건 기묘한 포근함이다.
미간을 찡그린 채로 실눈을 뜨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우람한 등판이었다. 세상에 저런 뒷모습은 흔치 않다. 몇 년을 현장에서 함께 구른 허성태가 분명했다.
나이 많은 부하 직원과 시선이 마주친 건, 딸깍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나간 순간이었다. 곧장 허성태 특유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팀장님. 제가요. 다 이해하기는 합니다. ‘여러모로’ 나눌 이야기가 많으셨겠죠. 알아요. 아는데요.”
“……뭐?”
교한은 가늘게 뜬 눈을 끔벅이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답지 않은 얼빠진 목소리였다. 그러자 성태는 속이 탄다는 듯 잇새로 말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요, 아침까지 이러고 계시면 어떡합니까!”
그제야 유독 시동이 느린 두뇌가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억은 새하얀 욕조다.
그 안에 물을 받았었다. 가능한 한 차디차게. 희게 질린 욕조로 푸른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일 정도로, 가득. 왜인지 그래야만 수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은 어땠었나?
가진 약을 모두 입에 털어 넣고, 제게 무어라 계속 말을 거는 비탄의 말이 흐려진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사랑해.’
백기를 들었던 머리가 활동을 시작할수록 소름 돋을 만큼 낮고, 듣기 좋은 울림이 의식 저편에서 반복됐다. 교한은 계속 되풀이되는 고백을 멍하니 들었다.
한편, 성태는 “물론, 옷은 갈아입고 주무신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하기는 하는데요” 하고 진정하는 듯하더니, 별안간 다시 급발진했다.
“혹시 몰라서 밤새 문 앞 지키고 있느라 병원 사람들한테 얼굴도 다 팔렸는데 어떡해요? 전 그렇게 뻔뻔하지 못하다고요. 민망해서 진짜! 보십쇼. 결국 해명은 다 제가 해야 하잖습니까!”
“무슨…… 해명?”
“뭐겠습니까?”
멍하게 묻자 되돌아온 물음은 이미 정답을 알지 않냐는 듯 여상했다.
또한 성태의 시선이 향하는 곳 역시 묘했다. 그는 저를 마주 보는 게 아니었다. 몽롱한 와중에 마치 제 일부 같아서 의식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향해, 부루퉁히 눈짓하고 있었다.
이교한은 그때서야 제 품에 누군가가 안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로서는 의아할 정도로 뒤늦은 자각이었다.
“…….”
“…….”
“이게…… 뭐야?”
“예?”
아침에 눈을 떴는데 누군지 모를 사람이 제 품에 안겨 잠들어 있다면, 보통은 놀라 기겁할 거다. 어쩌면 허둥지둥 상대를 밀어내기 바쁠지도 모르고. 하지만 교한은 일반적인 선택지 중 어느 쪽도 고를 수 없었다.
사실 반사적으로 ‘이게 뭐야?’라고 묻기는 했지만, 의식보다도 몸이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 곁에서 이렇게 곤히 잠들던 누군가를.
자신의 품을 기꺼이 허락한, 단 한 사람을.
짧은 정적 속에서 가장 늦은 기상을 한 사람이 움직인 건 그때였다. 교한은 제게 안긴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는 걸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이내 눈을 살짝 가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가 사랑한 검은 별이 반짝였다. 잠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교한을 대신하여, 살짝 부르튼 입술이 먼저 열렸다.
“……안녕.”
천 개의 목소리 사이에서도 헷갈리지 않을 낮은 인사 앞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 걸친 간밤의 기억이 쏟아졌다. 원망했다가, 울었다가, 사랑을 고백하기를 반복했던 저에게 쉼 없이 같은 대답을 소곤대던 모습까지도.
“수현, 형?”
“응.”
“…….”
“몸은 어때.”
조금 느릿느릿하게 돌아온 되물음은 분명 수현의 말투였다.
하지만 연인이 살아 돌아오는 것보다 스스로가 미칠 확률이 더 높다는 걸 잘 아는 이성은,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움직인 건 덜덜 떨고 있다는 걸 자각도 못하는 손이었다.
가장 먼저,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겨우 쓸어 올렸다.
아주 오래 시간을 들여 그린 섬세한 선화 같은 이목구비는 김수현이 맞았다. 그러고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교한은 하나하나를 천천히 어루만져 보았다.
결이 고른 눈썹. 도드라진 얼굴선과 뺨. 유독 모양이 예쁜 콧날. 그리고 셀 수 없이 반복한 키스로 도톰하게 부은 입술까지.
“정말…… 맞아?”
겨우 뱉어 낸 물음은 도저히 제 성대에서 흘러나온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수현은 그런 이상한 목소리를 듣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옅게 떨리는 교한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아주 부드럽게 키스할 뿐이었다.
다섯 번의 입맞춤 이후, 나직한 물음도 따라왔다.
“이번에는 몇 번이나 사랑한다고 말해 줄까.”
병실 안은 어느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언제나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를 적막을 깬 건, 왠지 속이 안 좋아진 듯한 허성태였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아, 예에, 저는 잠깐, 나가…… 나가 있겠습니다……” 하고 영혼 없이 중얼거리며 신속히 퇴장했다.
덕분에 다시금 셋만 남았다.
이교한과 김수현, 그리고 그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햇빛.
잠시 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리던 입술이 겨우 열렸다.
“대체, 어떻게……. 왜.”
수현은 조각난 단어 속에 숨은 질문을 어렵지 않게 해석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고, ‘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는지 묻는 것일 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갑작스레 혹사당한 성대로는 원하는 문장을 다 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휴대폰이나 노트 따위를 거쳐 전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는 급할 게 없는 일이다.
그래서 대답 대신 택한 건 옅은 경련이 점점 넓게 번지는 어린 연인을 당겨 안는 거였다.
“어떻게 하고 싶어?”
맥없이 끌려온 남자에게서 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새빨갛게 변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아무도 우릴 모르는 작은 마을에서 머리 아픈 건 다 내려놓은 채로 지낼까? 지붕도, 하늘도 파란 곳에서.”
“…….”
“아니면 너를 병실에 혼자 버려 뒀다는 대단하신 동료들을 한 명씩 만나 봐도 좋을 거야.”
교한의 귓불에 입술을 떨어트린 수현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하고 달콤히 덧붙였다.
사실 어느 쪽이든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 간의 대화에서는 찾기 어려운 말들이기는 했지만, 이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큐레이터 이교한과 번역가 김수현이 쌓아 올린 보물 같은 시간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더는 그 문장에 깃든 정상성 따위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이교한과 저는 결핍한 채로 함께해서 완전했다. 그 사이에 서로가 아닌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거다.
“―사랑해. 다 울고 나면 대답해 줘.”
수현은 제 연인을 있는 힘껏 품은 채 속삭였다.
* * *
느긋한 천변이 보이는 서울 모처의 2층 카페.
한창 사람이 북적일 시간을 살짝 비껴간 덕에, 드문드문 앉은 손님들은 저마다의 익명성을 보장받은 채 휴식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맞은편을 채워 줄 사람을 기다리는 박혜리도 있었다.
휴대폰 한번 들여다보지 않고 그저 창밖만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검은색 바람막이에 모자까지 눌러쓰고 성큼성큼 계단을 오른 누군가가 2층에서 곧장 그녀를 찾아냈다.
혜리는 흔한 인사 하나 없이 제 앞에 앉은 상대를 항해 희미한 미소를 띠고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
“마실 건 제가 먼저 시켰는데. 카푸치노에 시나몬 가루 많이, 맞죠?”
사소한 음료 취향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친근한 태도에 비해 마주 앉은 테이블 위로 흐르는 긴장은 유독 농도가 짙었다.
잠시 뒤, 상대는 눌러쓴 모자조차 벗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네.”
“왜요?”
“연금술사가 백우에 자기편이 있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제외했던 후보가 혜리 너였으니까.”
혜리의 입가에 걸렸던 흐린 웃음기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녀는 저를 바라보는 상대를, 그러니까 우여진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봤다. 여진은 침묵을 채근하는 대신 제 취향대로 제조된 음료를 한 모금 삼켰다.
잠시 뒤, 나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각자 자기 몫의 비밀 정도는 있는 거 아니겠어요. 백우 같은 곳까지 흘러들어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
틀린 말은 아니다.
백우의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딱히 반박할 마음도 들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박혜리는…….
대체 어디부터 묻고 확인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는 기분에 여진은 속으로 작게 앓았다. 한편, 그런 고뇌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양 혜리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게다가, 놀라운 거로 치면 우 팀장님 쪽이 더한 거 같은데요.”
“……나?”
혜리가 빨대를 문 채로 여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여진을 ‘팀장님’이라고 불렀다. 아직도 백우의 일부라고 확신하는 어조였다.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 아래에서 초록색 빨대가 짓이겨지다가, 이내 그만큼 우그러진 문장이 흘러나왔다.
“왜. 연금술사를 죽인 거, 팀장님이잖아요?”
저만치 떨어진 테이블에서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들의 즐거움은 여기, 두 사람이 앉은 곳까지 감싸 주지는 못했다.
“2년 전, 영국에서 발견되었던 시신.”
“…….”
“전소된 차 안에서 숯처럼 바짝 탄 채로 발견된 탓에, 남기중조차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어서……. 키와 체형, 소지품으로 신원을 확인했었죠. 다른 검사 결과들은 윤성길이 조작했고.”
“박혜리. 잠깐만.”
“―이제는, 신원 불명이 된 그 성인 여성의 사체.”
애써 목소리 톤을 높여 끼어들려던 시도는 빈틈없이 차단됐다. 이내, 마지막 쐐기가 박혔다.
“당신이 노란 벽돌로 지어진 작은 집에서 만난 사람. 아녜요?”
직전과는 구도가 바뀌었다. 말을 기다리는 사람은 박혜리고, 속내를 확인하려는 듯한 눈이 된 건 우여진이다. 얼마나 그렇게 대치했을까. 여진은 확연히 낮아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너.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야?”
“거기서의 생활은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어서요.”
그 신중한 고민조차 혜리의 계산에 있었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뭐?”
“분명히 난방이 부실했을 거예요. 밤이 되면 이게 사람이 사는 곳인지, 짐승이 사는 곳인지 모를 정도로 조용하고.”
“…….”
“그래도 구석의 작은 방에서 보는 하늘은 꽤 예쁘지 않았어요?”
가볍게 미간을 구긴 여진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한 것과는 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혀는 빳빳하고 발밑은 물결치듯 출렁거렸다. 순간 시야마저 가볍게 핑그르르 도는 순간, 여진의 눈에 들어온 건 고작 단 한 모금 마신 커피였다.
속으로 욕을 삼킨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그 대신 우당탕탕 의자가 나자빠지고 커피가 엎어졌을 뿐이다. 마치 물이 빠져나가는 욕조에 갇힌 것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용돌이에 휘감긴 듯, 똑바로 설 수가 없다.
여진은 바닥에 고꾸라진 채 저를 내려다보는 혜리를 올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고장 난 화면처럼 늘어지는 와중에도 새빨갛게 변한 눈만은 선명했다.
그리고, 차마 묻지 못한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거긴,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거든요.”
박혜리는 차츰 초점이 흐려지는 여진을 내려다보다가, 놀라 달려오는 사람들을 유유히 지나쳐 카페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