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2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2화
셔츠를 벗기는 것에 유독 방어적인 태도였던 수현은, 가까스로 가슴을 내놓는 것까지는 허락했다. 어떤 면에선 그쪽이 훨씬 더 선정적이리란 생각 같은 건 못했을 거다. 애초에 이교한 역시 성적인 함의를 품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따뜻하게 맥동하는 피부에 닿고 싶었다.
부드러운 살에 고개를 파묻고, 입술을 맞추고, 향을 들이켜려고 했던 게 다다. 그러면, 기어이 또 다시 살아남고만 스스로를 이 순간만큼이나마 용서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교한은 수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댄 채로 느리게 호흡하다 보드라운 살결 여기저기에 키스했다. 때론 입술 경계의 점막이 닿을 정도로 깊게.
“하아…….”
덕분에 품 안의 몸이 크게 들썩인 순간, ‘기억’과의 비교는 더욱 분명해졌다. 망상이면 망상답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릴 것이지. 자신을 향한 힐난이 저절로 삐죽 심장 어딘가를 찔렀다.
하지만, 그마저도 곧 의미를 잃었다. 슬쩍 올려다본 수현의 얼굴 때문이었다.
“…….”
내내 말끔했던 이목구비 위로 번진 건 분명 당혹이었다.
그건 불과 조금 전 ‘셔츠는 그대로 입고 하자’라고 제안할 때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다. 교한은 빠르게 회전하지 않는 머리로나마 의미를 곱씹어 생각했다. 그 순간 색이 옅은 유두를 가볍게 입 안으로 머금은 건 그저 의식도 없이 한 행동이었다.
마치 눈앞에 있는 사탕을 무작정 입 안에 넣는 아이처럼.
“아, 흐으!”
이 뾰족하고 급한 숨은 이교한만 들을 수 있는 특권이었다. 정말 아주 오래 잊고 있었는데.
소리에 이끌린 교한은 말랑한 살점의 감촉에 의식을 집중했다. 혀를 내어 중심을 돌기와 유륜 근처를 충분히 적셨다가, 타액이 크게 부딪치는 소리를 낼 정도로 빨았다.
그러자 혀에 닿는 작은 돌기가 차츰 뾰족하게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허상에 매달려 일방적으로 애걸복걸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제게 반응하는 것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급해졌다.
안개 속을 떠다니는 듯이 멍한 와중에도 그 달콤한 비음만큼은 기이하게 증폭되어 들렸다.
“흑, 앗, 아……. 히윽!”
품속의 연인은 어렵잖게 참아 냈던 자극조차도 견디지 못하고 잘게 떨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당황한 이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늘 소리를 내기 싫어하던 수현은, 오늘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지 않았다.
대신 선택한 건 팔로 교한의 머리를 당겨 안는 거였다. 이마와 정수리에도 연신 입술이 떨어졌다. 옅은 떨림이 스며든 속삭임 역시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었다.
“―사랑해.”
“…….”
그 여름 이후, 이교한에게 따뜻한 모든 것들은 독이나 다름없었다.
날이 더울 때는 수현이 겪었을 모든 것이 너무 뜨거웠을 것 같아서. 날이 추워졌을 땐 수현이 있을 곳이 너무 추울 것 같아서. 도저히 제게 허락된 미지근한 사치를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교한의 온도계는 아주 오랜만에 제대로 작동했다.
36.5°에서 박동하는 생의 온도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온전히 쟀다. 소수점 아래의 숫자가 달뜨게 요동치는 순간마저 정확히.
그 순간, 머리와 몸이 따로 놀았다.
“후으, 음…….”
분명 사랑한다는 말을 더 듣고 싶었다.
저 낮은 목소리에 담겨 나오는 고백만을 평생 들어도 좋았다. 하지만 그렇게나 낭만적인 바람과는 다르게 몸은 수현의 입술과 맞닿기 바빴다.
그것도 할 수 있는 한 깊이, 제 숨을 모조리 다 가져가도 좋다고 아우성치면서.
수현은 이번에도 저를 마다치 않고 고개를 맞춰 주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각도 때문인지 벌어진 입에서 더운 숨에 달궈진 타액이 어렵지 않게 전해졌다. 교한은 혀를 깊게 섞으며 그걸 게걸스럽게 마시고, 또 빨았다.
작게 헐떡이면서도 제 여린 점막을 모두 내어 주는 다정함이 좋았다. 이어진 입으로 전해지는 소리를 조금 더 크게 듣고 싶은 욕심 역시 덩달아 커졌다.
무엇보다 머리를 뜨겁게 한 건, 늘 푸르게 질리는 것만 상상했던 살결 위로 퍼지는 열감이었다.
“아, 흐앗!”
복부에 바짝 닿은 바지 지퍼를 내리자 검은색 드로어즈가 가볍게 부푼 것이 느껴졌다.
그 윤곽을 가볍게 더듬자 마른 골반께가 들썩였다.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연인을 배려해 일부러 천 한 겹을 두고 시작한 자극이었으나, 수현은 그마저도 힘든 모양이었다.
“교한, 아, 흑, 조금만, 천천히……!”
“나 사랑해?”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건 곤란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제게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 연인에게 하고픈 말이 너무 많아 저도 모르게 찡그리고 만 쪽이다.
그걸 증명하듯 대답보다도 먼저 소름 돋게 부드러운 입맞춤이 쏟아졌다. 고개의 각도가 달라지고, 숨을 새로 삼킬 때마다 그렇게도 갈망한 단어 역시 쉼 없이 끼어들었다.
이제야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고백이.
속옷 아래로 두툼하게 잡히는 기둥을 연신 부드럽게 쓸다가 동그랗게 젖기 시작한 지점을 살살 굴리자, 벌어진 허벅지 안쪽부터 잔경련이 일었다.
교한은 이내 천천히 속옷을 잡아 내렸다.
선액으로 끝이 번들거리는 성기는 기억과 마찬가지인 몇 안 되는 거였다. 길고 잘빠진 기둥은 여전히 모양과 색이 예뻤다. 교한은 열이 몰린 중심을 아주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뒷골부터 등줄기까지 저릿했다.
지금, 이교한의 감각 중추는 김수현에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현이 아파하면 아프고, 그가 기뻐하면― 마찬가지로, 기뻤다. 쾌감이 너무 과하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해 가며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 건, 어쩌면 수현보다도 저를 위한 거였다.
“하아, 흐……. 아!”
귀두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비비자 건조했던 손가락이 선액으로 곧장 축축해졌다. 교한은 연인의 무릎이 저절로 통통 튀는 지점을 집요하게 문지르면서도 시선만은 얼굴에서 떼지 않았다.
간접 조명만 켜진 어둑한 병실은 오히려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했다.
손바닥 전체를 이용해 붙잡고 흔드는 성기에서 젖은 소리가 커질수록 수현의 눈가가 붉어졌다. 훤히 열린 가슴팍은 말할 것도 없다. 물고 빤 왼쪽 유두만 진하게 익어선 번들거리는 것이 귀엽고― 또, 사랑스러웠다.
이제 정말로 안다.
그 난해했던 단어의 용례마저, 분명히.
“흐으으, 읏!”
수현은 얼마 안 가 높은 소리를 내며 교한의 손 위로 가득 사정했다. 역시 이번에도 ‘기억보다’ 훨씬 더 빠르게.
그것이 오랫동안 성적인 자극을 받지 않았던 탓임을 알 리 없는 교한은, 순간 뒤로 넘어갈 뻔한 상반신을 남는 손으로 얼른 잡아 주었다. 그러자 수현 역시 다시 만난 이후 처음으로 어리광 부리듯 어깨와 목에 매달려 왔다.
두 사람은 서로 호흡 대신 입을 맞춰야 하는 것처럼 키스했다.
혀와 혀가 난잡하게 얽히며 삼킨 것이 스스로의 숨인지, 아니면 상대방의 타액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급하고 지독하게. 그러다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낮게 갈라진 물음이 들렸다.
“너는?”
“괜찮아.”
……아. 이것도 그대로다.
그 순간 휙 좁아진 진한 눈썹 사이를 보고, 교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른 건 기억과 조금씩 달라도 터무니없이 예쁜 성기와 부루퉁한 표정만은 달라지지 않았다니. 이마저도 수현다워서 좋았다.
하지만 그런 노곤한 감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대로 있어.”
“형?”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수현이 녹진하게 젖은 교한의 손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멍한 머리로도 들은 말을 이해해 보려던 교한은 손과 손 사이에서 젖은 소리를 내며 마찰하는 것이 아직 채 식지도 않은 정액이라는 걸 먼저 깨달았다.
수현은 그렇게 한참이나 자신의 손가락을 윤습하게 적셨다. 그리고, 다음은.
“후으, ……읏!”
이어진 움직임 앞에서 교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사실 어느 하나 눈을 뗄 수 있는 게 없긴 했다. 붉게 물든 채 일그러지는 단정한 눈매와 가볍게 비틀어진 허리. 보란 듯 벌어진 허벅지 사이에서 가볍게 흔들거리는 성기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교한을 얼빠지게 한 건 수현이 스스로의 구멍을 혼자 풀기 시작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오로지 저를 좁디좁은 몸 안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5년간의 연애 동안 부끄러움 많은 김수현은 단 한 번도 보여 준 적 없던 모습이다.
그걸 자각한 순간, 간신히 제 기능을 찾았던 온도계가 삐걱거렸다.
심지어 수현은 낮아진 자극의 허들만큼 참을성도 함께 줄어든 모양이었다. 교한은 망설임 없이 제 바지춤으로 손을 뻗는 연인에게 급히 말문을 열었다.
그들을 울게 했던 어떤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잠깐만, 형. 아직 더……!”
“넣을래.”
“…….”
“넣고 싶어…….”
정말 미친 거 아냐?
교한은 진심을 가득 담아 저를 탓했다.
백번 양보해서 김수현을 상대로 반응하는 몸까지는 면죄부를 준다 해도, 이런 구체적인 상황이라니. 수현이 이따위 상상을 봤다면 질색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당사자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만.
“아, 으응, ―흣!”
“윽…….”
애초에 다 집어넣는 건 둘 중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다.
노력이야 가상했다. 그 김수현이 한 손으로는 교한의 목을 끌어안고, 또 다른 손으로는 흉흉한 성기를 제 구멍에 맞춰 밀어 넣는 시도를 하다니.
그러나 지금의 삽입에 한 가지 간과된 게 있다면, 애초에 둘 사이에서 섹스는 늘 이교한의 지극한 정성과 시간을 전제로 했다는 거다.
좁은 입구는 처음 몸을 섞었을 때보다도 길이 빡빡했다.
두툼한 귀두가 입구를 눌러 벌리는 감각 앞에서 키스로 살짝 부어오른 수현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눈가는 물론이고 귀와 뺨, 목덜미까지 순식간에 훅 붉은 기가 번졌다.
물론 이교한은 그걸 얌전히 보고 있을 남자는 아니었다. 어찌나 세게 조이는지 순간 눈앞으로 빛이 점멸한 와중에도, 입 밖으로 튀어 나간 목소리만큼은 다디달았다.
“―형. 잠깐만. 몸 받치고 있을 테니까. 완전히, 힘을, 좀, 빼.”
“싫어. 내가, 흐읏, 내가…….”
“응. 그래. 이것만. 이것만, 자기야. ……다른 건 다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내 손에 허리만 기대.”
살살 달래며 골반의 체중을 온전히 대신 받들자 잔뜩 힘이 들어갔던 내벽이 천천히 이완됐다. 무작정 힘으로 안에 길을 내던 기둥 역시,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미끄러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 굴곡이 뚜렷한 성기 끄트머리가 가장 약한 곳과 생각보다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깊이를 조절하는 데 능숙하지 않은 수현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결국, 수현은 그 자신이 허리를 움직인 노력이 무색할 만큼 준비 없는 자극을 먼저 만났다.
“으, 흐윽!”
전립선을 정확히 찔리다 못해 그 너머까지 열리는 감각 앞에서 나름 괜찮게 버티고 있던 허벅지에서 힘이 풀렸다.
다행히 이전에 교한이 그의 골반을 단단히 잡아 주고 있던 터라 애써 삼킨 성기가 빠져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저 욕정과는 거리가 먼 얼굴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풀려 흐물거린 게 다다.
물론 그 서툴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일렁이는 눈으로 지켜볼 수 있는 건 이교한뿐이었다. 풀린 눈으로 도리질하고, 고개를 뒤로 꺾은 채 침을 꼴깍 삼키는 목울대의 움직임 모두 그만의 것이었다.
“후으으, 으, ……아아, 응, 읏.”
어설프게나마 허리를 움직여 요분질 칠 때마다 뜨겁게 이어진 안쪽부터 찔꺽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누구의 체액에 말미암은 것인지는,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시 눈이 마주친 순간에는 벌써 몇 번이나 한 키스를 또 했다.
너무 급하고 오래 물고 빨아서 덩달아 부은 살덩이를 내일 따윈 생각하지 않고 덮쳤다. 온갖 종류의 쾌감이 뒤섞여 뇌를 흐물흐물하게 했다. 서로가 같은 감각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바다 위를 떠돌던 얼음이 녹았다.
사실 수현은 찰나지만 가볍게 정신을 놓기도 했다.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사정한 것으로도 모자라, 입이 틀어 막힌 채로 전립선까지 치받혔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순간, 수현이 달음박질한 듯 헐떡거리는 목소리를 쥐어짜 낸 건 그래서다. 혹 꼴사납게 완전히 기절 따위를 하더라도, 미리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너는?”
“…….”
“……이교한, 너도, ―나 사랑해?”
물기가 다 가시지 않은 갈색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잠시 뒤 어느 때보다 황홀한 반짝임 속에서, 작지만 확신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사랑해,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