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1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1화
사실 그 순간 교한이 가장 먼저 느낀 건 안도였다.
약에 취해서라도― 어쨌든 수현을 만났다.
꿈에서도 볼 수 없던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체온을 느낄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애초에 눈앞에 있는 연인이 실재한다는 가능성은 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목울대가 뜨거워지는 목소리에 담겨 나온 질문부터가 오랜 상상의 연장선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늦장 부리면 비행기 놓쳐.’
‘아. 얼른 휴가나 왔으면 좋겠어.’
‘그 얘기 며칠 전부터 백 번은 들은 것 같은데. 이교한, 빨리 일어나.’
저를 깨우러 온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던 그 아침을 얼마나 많이 되돌려 봤는지 모른다. 서로가 서로를 절반씩만 알았기에 오히려 완전했던 순간을.
교한은 제 얼굴선을 그리는 손에 뺨을 기댄 채로 대답했다.
“맞아. 그랬어.”
“…….”
“어떻게 이렇게 번번이 못 죽는 건지, 나도 모르겠어. 정말 지긋지긋해.”
시야는 여전히 조금 부옜다. 흐린 간접 등이 번진 수현의 표정 역시 유리창의 성에 너머로 훔쳐보는 것처럼 불분명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또렷이 들린 목소리 덕분에 헷갈릴 여지는 없었다.
“왜……. 왜, 그런 말을 해. 이교한.”
“왜냐니. 그럼 형이야말로 왜 나 한 번도 보러 안 온 건데?”
제가 토라진 척을 하면 늘 쩔쩔매던 세 살 많은 연인은 환상 속에서조차 그대로였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에는 ‘척’이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교한은 한 점으로 모이지 않는 초점을 맞추려고 애쓰며 인상을 찡그렸다. 실제였다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마음속 깊은 물음 역시 기다림만큼 곧장 나왔다.
“내 노력이 그렇게 모자랐어?”
까만 눈동자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고요하고 뜨거운 저 시선을 제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만 더욱 분명해졌다. 저도 모르게 투정이 커졌다.
“다 긁어모아도 고작 15%밖에 안 되는 마음으로라도, 노력하면 된다며. 형이 그랬잖아. 기억 안 나?”
“…….”
“나 그 말만 믿었어. 그래서 매일 형이 좋아할 것만 생각했고, 형이 웃는 행동만 했어. 혹시라도 형이 다른 사람들처럼 내 이름만 들어도 기분 나빠 할까 봐 쩔쩔매면서!”
말로는 수현을 탓하는 척했지만, 실은 그가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무서웠다.
교한은 있는 힘껏 수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안에 잡히는 형태에 대한 의문은 없었다. 뼈의 형태와 감촉이 유독 도드라진다든가 하는 것들을, 아직은 이상하게 여기지 못했다. 처참하게 붉었던 여름 이후로 쌓아 둔 말을 다 쏟아 내기만도 바빴으니까.
철없이 어리광을 부렸으니 이번 순서는 염치도, 두서도 없는 사과를 할 차례였다.
떨리는 한숨을 길게 토해 낸 교한은 수현을 당겨 안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아냐. 미안해. 내가 다 망쳤어” 하고 작게 속삭이자, 독을 품은 원망은 단 한 번 토 달지 않고 삼키던 연인이 곧장 물어왔다.
“……뭘?”
“내가, 형의 인생에 끼어들어서. ―그래서, 다 망쳐 버렸어.”
작게 굳었던 수현은 이내 고개를 바로 들어 올리게 했다.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여서일까. 덕분에 수현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조금은 찌푸려진 짙은 눈썹. 선이 또렷한 이목구비와 갸름한 얼굴선. 이걸 보기 위해서라면 수면제를 몇 알이든 삼킬 수 있겠다고 생각할 즈음, 너무나 좋아하는― 좋아했던 단호한 목소리에 제 이름이 감겨 나왔다.
“이교한.”
“너무 아프지 않았어?”
“…….”
“아니야, 아팠지. 아팠을 거야. 당연한 거 물어봐서 미안해. ……알아. 내가, 전부…… 잘못했어.”
기껏해야 사람 흉내밖에 못 내는 주제에 형을 궁금해하는 게 아니었어.
날 몰래 보는 눈에 들떠서는 안 됐어.
기어이 형에게서 고백을 듣고, 매일매일 욕심내지 말 걸 그랬어…….
하고 싶은 많은 아직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문장 말미에 이어진 건 낯선 헐떡임뿐이었다.
간신히 선명해졌던 수현 역시 다시금 물에 잠겼다.
그게 속상하고, 미안하고, 두려워서. 교한은 제 얼굴 근처에서 멈춘 수현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굳은살 가득한 손바닥 위로 숭배하듯 입 맞추자, 이내 뺨의 눈물 길을 따라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주 작고 사소한 수현 특유의 애정 표현이다.
사무치게 바라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간지러운 감촉 앞에서, 교한은 기어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 정말…… 더 노력할 수 있었는데.”
“…….”
“내 노력이 부족했으면, 자기야, 말이라도 해 주지. 그럼 더 노력했을 텐데. 최소한 나한테, 기회 정도는 줬어야지…….”
멋진 남자친구가 되기는 글렀다.
오랜만에 만난 애인 앞에서 보이는 모습이라곤 투정을 늘어놓다 별안간 울며 매달리는 한심한 꼴 뿐이다. 이런 모습이 질려서 형이 다시 찾아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뒤늦게 한심한 걱정이 들어 급한 숨이라도 달래 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마음 같지 않았다.
애초에 그 과호흡 같은 울음을 멈추게 하는 건 이교한의 몫이 아니기도 했고.
“읏…….”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그 순간.
밭은 숨을 몰아쉬던 교한은 어깨를 크게 움츠렸다.
조금은 얇고, 말랑말랑한 감촉이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여서다. 수현은 각도를 달리하며 몇 번이고 도장을 찍듯 키스를 이어 갔다. 그러다 어린 연인의 숨이 조금 고르게 된 후에야 입맞춤 사이에 속삭임을 끼워 넣었다.
“미안. 내가…… 형이, 너무 늦었어.”
“…….”
“사랑해, 이교한.”
그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울음을 달래는 데 유효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서로의 숨을 주고받는 키스로 겨우 잠잠해졌던 눈물이 다시금 갈색 눈동자 위로 그렁그렁 맺혔기 때문이다.
아무도 바라지 않은 제 노력 따위를 번번이 사랑으로 돌려주는 연인 앞에서 교한이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더 말해.”
“사랑한다고?”
“응.”
“―사랑해.”
울 때 달래면 더 눈물이 난다는 걸 어디선가 읽었었는데. 그래, 정말 그렇네.
교한은 이 와중에도 제게 새로운 걸 알려 주는 수현의 살결 이곳저곳에 키스했다.
뺨과 턱선, 귓불, 늘씬한 목덜미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계속 속삭여 주는 입술만 빼고, 전부 다. 수현의 몸을 안아 올려 무릎 위로 앉히자 그건 조금 더 수월해졌다.
하지만, 그 순간에야 무언가 다른 걸 자각하기도 했다.
“…….”
“왜?”
목에 입을 맞추다 말고 멍하게 있으려니 수현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올려 주며 물어왔다. 그 다정함에 취해, 교한은 멍하게 되물었다.
“상상 속에서도…… 이렇게 마를 수 있나?”
“……너도 말랐거든.”
“형은 진짜 뼈밖에 없는데.”
눈물 반, 낭만 반의 달콤한 기류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돌아온 대답 역시 “우리 엄청 잘 챙겨 먹고 운동해야겠다” 하는 중얼거림이었다.
“이거 셔츠……. 내 거 같아.”
“응. 허성태가, 챙겨다 줬어.”
김수현과 저뿐이었던 세상에 순간 현실의 단어가 끼어들었다.
이 몽롱한 기운이 다 가시고 나면, 다시 견뎌야 할 세상.
그게 얼마나 몸서리치게 싫던지. 교한은 눈앞의 환상에 어떤 의문도 갖지 않기로 했다. 귀찮게 캐묻다가 형이 사라지면 어떡해, 같은 비이성적인 두려움이 그를 해일처럼 덮쳤다.
다시 택한 건 달콤한 도피였다.
길고 마른 목덜미를 이를 세워 크게 베어 물고, 제 잇자국이 가볍게 남은 살결 위를 혀로 간지럽혔다.
“흣…….”
“더 말해 줘, 응?”
짐짓 뻔뻔할 수 있는 채근에도 수현은 마다하는 일이 없었다.
다시금 사랑해, 하고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엔 한 줌의 망설임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거면 됐다. 저를 사랑하는 김수현. 애초엔 그거 말고 어떤 것도 바란 적 없었다.
교한은 살이 내린 빗장뼈를 따라 키스하면서 자연스레 단추로 손을 옮겼다.
옷장을 공유했던 것이 무색하게 품이 남는 몸이 도드라지는 게 신경 쓰였다. 누군가의 식사 여부에 살며 처음으로 절절매게 한 사람 아니랄까 봐, 김수현은 가까스로 다시 만난 순간마저 심장을 들썩이게 했다.
“―잠깐, 만. 교한아. ……너, 몸.”
“몸?”
“막 일어났잖아. 아직…….”
급히 말을 잇던 수현이 목이 타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 하나하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으려니, 외려 까만 눈동자가 가만히 있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작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겨우 단추 두 개를 푼 제 손을 깍지 끼어 붙잡으면서였다.
“그럼, 이건…… 입고 해.”
맞닿은 손바닥으로도 온기가 느껴졌다. 그 덕에 이미 물에 녹아 사라진 줄만 알았던 마음이 강제로 형태를 찾았다. 꽉 붙잡힌 손과 수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교한은, 이내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형은 내 머릿속에서도 마음대로 하는 거야?”
“…….”
“사실 그래서 좋아.”
머리맡에서 가볍게 터진 한숨은, 조금 억눌린 것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