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90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90화
가장 먼저 인식한 건 일정한 박자로 작동하는 모터 소리였다.
여기에 ‘들었다’라는 단어는 쓸 수 없다. 그것으로는 제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지금이 다 담기지 않으니까. 교한은 그만큼 작은 화면에 집중했다.
아주, 아주 붉게 일렁이는 바다에.
그러자 얼마 안 가 짚어 낸 건 몹시 급한 헐떡임이었다.
[으, 하아, ……흑.]
사실 호흡이 아닌 울음이었다는 걸 머릿속 어디선가는 확신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곧장 인정하지 않은 건 자각조차 못 한 생존 본능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마음의 찌꺼기는, 영상 속 주인공을 깨닫는 순간 무너질 스스로를 당사자보다도 먼저 알았다.
그래서, 고작 몇 초라도 시간을 벌어 보려 발버둥 쳤다.
잠들지 못해 꿈에서조차 들을 수 없던 낮은 목소리 앞에선 그깟 노력 따윈 물거품이 될 거라는 걸 모르고.
[……제발. 제발, 부탁할게.]
교한은 반사적으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곧장 역한 구역질이 났다. 제가 삼킨 산소가 혈관을 타고 번지는 감각을 참기 어려웠던 탓이다. 뒤따른 무력감 역시 목을 조르고 오른쪽 복부를 헤집어 댔다.
저는 작은 화면 속의 연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곁에 있어 주기는커녕, 숨 한 모금 건네주지 못한다.
이 순간 그에게 허락된 건 단 하나다. 얼마 남지 않은 재생 바가 끝나기 전, 안쓰럽게 헐떡이는 남자의 다음 말을 상상하는 것.
심지어 여기에는 절망과 색이 비슷한 같은 소원도 함께했다.
……제발, 저것만큼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하는.
[그 애를, 이교한을 지켜 줘.]
휴대폰 속 울음 섞인 속삭임과 비정상적으로 큰 괴성이 터져 나온 건 정확히 동시였다.
심지어 후자는 아파트 한 동의 모든 스피커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내질러진 터라, 금세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작은 인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던 남자는 어느 것도 듣지 못하는 것처럼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이명이 감도는 집 안으로 비탄의 조급한 해명이 뒤따랐다.
—이교한 씨. 방금 그건…… 그러니까.
“…….”
—그게…….
언제나 매끄럽게 문장을 만들던 인공 지능은 자꾸만 헛발질하듯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즐거워할 동료는 근처에 없었다.
결국 완성되지 못한 변명을 들은 건, 붉은 바다가 갇힌 휴대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이교한뿐이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침묵하던 입이 열린 순간은 현관 밖의 인기척이 모두 가라앉았을 때였다.
“비탄.”
사실, 연금술사의 파편은 그 찰나에 회로를 점검했다.
제가 ‘들었다’라고 판단한 것이 실은 과부화가 온 회로에서 짓이겨 나온 오류가 아닌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교한이 제 이름 두 글자를 또박또박 불러 주는 건, 그만큼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다.
그러나 결과가 도출되기도 전에 이어진 질문은, 저를 부른 사람의 이름을 새삼 확인해 줄 뿐이었다.
“……내가, 형이 만난 가장 큰 불행이었을 확률은 몇 퍼센트지?”
한때 비탄은 많은 것을 확답할 수 있었다.
감히 애정을 수치화했고 제게 질문을 던진 남자의 마음을 온전히 부정하기도 했다. 퍽 자신 있게 거래를 제안한 것 역시 자신이 내놓은 결괏값을 자신해서였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지금.
더 많은 데이터를 학습한 만큼, 답은 더욱 명료해져야 한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
긴 적막을 고문처럼 견디던 이교한에게서 흐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인류사를 통틀어 손꼽을 만한 위대한 발명들은 연인의 위기를 수없이 구제했다.
전화는 서로 달리 돌아가는 낮과 밤을 전제로 시작된 연애의 밀도를 책임졌고, 비행기 티켓 한 장은 그들 사이에 펼쳐진 11,046km의 물리적 거리를 해결했다.
그리고 지금.
김수현의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단호한 경고는 연약한 육체를 대신하는 사륜구동 차의 이동을 전제로 했다. 사랑하는 이를 너무 늦지 않게 당겨 안을 수 있도록.
—당장, 돌아가야 한다.
부재를 가장했던 감정 없는 기계음의 주인공은 하나뿐이었다.
덕분에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뜬 수현보다도 먼저 반응한 건 격노였다.
—희사, 그대! 역시 지켜보고 있었잖아!
—반복한다. 김수현 귀하에게 원래의 좌표로 복귀하기를 강력히 권고하는 바이다.
두 회선이 동시에 겹친 탓인지 이어폰을 낀 왼쪽 귀가 먹먹했다. 심지어 거기에 “괜찮으십니까?” 하고 물어오는 허성태까지. 여느 사람이었다면 얼빠진 반응을 보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김수현은 그 평범에 포함되지 않았다.
들은 말을 이해한 순간, 당혹한 표정의 허성태와 어린 인공 지능의 투정을 제쳐 두고 차로 달려갔다. 상황 파악은 핸들을 움켜쥔 다음의 일이었다.
“왜?”
—귀하와 교제했던 남자가 계산 범위 밖의 행동을 시작했다.
“정확히 말해.”
—시야각이 확보되지 않아서 정확한 예상은 어렵다.
찬란한 이름과는 달리 어떤 감정도 덧씌우지 않은 목소리가 표현을 가다듬는 건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문장은 액셀의 가속을 부추겼다.
—그러나, 비탄은 이교한이 다량의 약물을 복용한 것으로 짐작한다.
차의 방향은 직전과는 완전히 바뀌었다.
지나온 길을 미친 듯이 밟아 돌아가는 수현의 뒤를 SUV가 뒤따랐고, 격노의 횡설수설이 차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수면제……. 수면제일 거야. 이교한은, 이제껏 처방받은 걸 단 한 번도 먹지 않았어…….
“119 불러.”
—내, 내가?
“빨리!”
억지로 목소리를 키워 외친 수현이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다 못해 온몸의 장기가 함께 들썩였다.
들이켜고 내쉬는 모든 숨에서 쇠 맛이 느껴지는데 그것의 출처를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버리고 달리는 내내 옅은 어지럼증을 참는 것만으로도 빠듯했을 뿐이다.
와중에 다행인 건 모든 것이 함께한 그대로라는 거였다.
1406호.
비밀번호는, 124812*…….
물론, 그렇다고 해서 철문 너머의 상황까지 기억과 같은 건 아니었지만.
“이교한!”
한때 수현의 거처였던 자그마한 아파트는 언제 난방을 마지막으로 했는지 모를 만큼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건 제아무리 인공 지능들이 싸고돈다 한들 온도계의 숫자로는 다 알 수 없는 을씨년스러움이라, 수현은 순간 어깨를 잘게 떨었다. 스피커에서 서로 다른 두 목소리가 다시금 겹친 건 그때였다.
—……당신.
—욕실이야!
미안하지만 인사를 나눌 여유는 없었다.
수현은 이번에도 당장 귀 기울여야 하는 쪽을 빠르게 선택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잠긴 문 너머에서 불길하리만치 일정한 물소리를 알아챈 순간 애써 붙들었던 이성을 놓아 버렸다는 게 정확하다.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차자 문의 걸쇠보다도 경첩이 먼저 우그러졌다.
그렇게 생긴 틈으로 가장 먼저 보인 건 욕조 바깥으로 축 늘어진 손이었다.
수현은 반쯤 미친 사람처럼 연인의 이름을 부르며 덜렁대는 문짝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유의미한 근력 활동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된 팔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마지막 남은 경첩의 못을 잡아 뜯어내어 준 건 바짝 붙어 뒤따라온 허성태였다.
수현은 욕실 안으로 거의 무너지듯 달려들었다.
“교한……. 교한아.”
이교한은 심해처럼 차가운 물에 잠겨 있었다.
얇은 셔츠는 희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몸을 따라 살얼음처럼 달라붙었고, 언제나 혈색 좋던 입술은 푸른 기가 돌았다.
수현은 먼발치에서 겨우 눈에 담았던 연인을 급히 물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진 몸은, 아무리 힘껏 끌어안아도 숨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호흡을 잊은 건 쏟아 내고 싶은 온갖 변명이 턱밑까지 치받은 제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자기야. 나야, 응? ……제발.”
이런 모습을 보려고 한 건 아니었어.
여전히 네가 날 필요로 하는지 무서웠을 뿐이야.
교한아, 사소한 것으로 화를 내고 투덜대는 네 모습이 신기하고 또 생생해서. 그래서 아주 잠깐만 네 목소리를 몰래 들었어……. 금방, 금방 찾아올 생각이었다고. 정말로…….
수현은 불러도 대답 없는 귓가에 대고 쉼 없이 잘게 속삭였다. 자신의 체온 같은 건 모두 녹아 사라져도 없다는 듯, 얼어붙은 몸을 빈틈없이 당겨 안은 채로.
* * *
이교한의 의식이 돌아온 건 아주 늦은 한밤중이었다.
정확히는 희끄무레하게 표백된 병원 특유의 냄새를 깨달은 순간, 아직 빛이 들지 않은 감각 저편에서 자조가 흘러나왔다.
근 반년 동안 교한은 자의로도, 타의로도 이 통제된 공간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사실 어떤 날은 억울해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서 나간다는 이 네모난 공간에서 제 경우는 왜 예외인 건지. 애초에 선택지는 대문호의 작품 속 주인공처럼 두 개였다.
‘죽느냐, 사느냐’.
그렇다면 한 번쯤은 전자여도 괜찮았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번만.
교한은 번번이 불시착하는 결말 앞에서 다시금 정신을 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타고나길 예민한 성정 탓일까?
대단치 않은 현실에서 이전과는 다른 것을 포착한 순간,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
아주, 기묘한 온기.
그걸 깨달은 마음의 경계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렸다. ‘이제까지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맞는 말이었다. 묘한 씁쓸함을 품은 공기며 인위적으로 조절되는 습도까지. 하나같이 지겨운 것들인데, 두툼한 이불 너머로 전해지는 따듯함만큼은 익숙하지 않았다.
심지어 차츰 무뎌졌던 감각이 돌아올수록 이 낯선 것을 향한 의문은 더해지기만 했다. 그건 규칙적으로 움직이다가도 종종 한숨 같은 것을 내쉬었고, 헝클어진 제 머리카락을 느리게 쓰다듬기도 했다.
이교한이 다시금 자문한 건, 제 뺨과 입술을 스친 무언가가 아주 부드럽고 여리다는 사실을 깨달은 직후였다.
낯선 게 맞아? 정말 이런 건,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어?
“윽…….”
갑작스레 눈을 떴기 때문일까.
병실의 조도는 환자를 배려해 충분히 희미했지만, 교한은 겨우 그정도의 빛에도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뿌연 초점 너머에서 저를 끌어안은 누군가의 나직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옅은 표정마저 휘발되고 말았다.
“‘진짜, 일어나기 싫다…….’”
“…….”
“그렇게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