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89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89화
수현은 언제라도 격발할 수 있도록 쥐고 있던 총구를 조용히 아래로 내렸다.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성태의 말이 이어졌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을 뭔가로 모두 죽인 게 아무래도 저희 조직……. 백우 같습니다. 결정권자는 대표님이었고요.”
그제야 문득, 정신을 놓은 루카스 마틴이 외치던 문장이 이해가 갔다. 테이블에 쾅쾅 머리를 치고 자해하면서도 끝까지 반복하던 물음이.
‘연금술사는 어디에 있어?’
이제 와 돌아보면 지문이나 다름없는 문장이었는데,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7년, 아니 이제 8년 전 사고에서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연금술사를 찾는 데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기중. 그였는데.
수현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너무 돌아 답을 찾은 스스로를 탓했다. 하지만 남기중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나자, 이어 떠오른 건 요 몇 달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우여진은. 어떻게 됐지?”
“우 팀장님은, 아니, 우여진은. 이교한 팀장님 그렇게 되시고 조직이 혼란해진 와중에 종적을 감췄습니다.”
속삭임이나 다름없는 물음이었지만 성태는 놓치지 않고 곧장 대답해 왔다. 아무래도 수현의 짤막한 말투가 예의 그 무뚝뚝함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표정이었다.
하지만 잠시 뒤, 그렇게나 사려 깊은 남자조차도 기어이 참지 못하고 기어이 내뱉고 만 질문이 있었다.
“저어. 팀장님은…… 괜찮으십니까?”
“…….”
수현은 오늘, 그러니까 고작 몇 시간 뒤에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는 고백을 굳이 하지는 않았다. 사실 성태의 질문이야말로 수현이 가장 궁금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한편, 이교한은 짧은 잠에서 막 깨어난 참이었다.
* * *
한때, 교한은 낯선 번호로 오는 전화를 성가시다 생각했었다.
그래서 열 번 중 여덟 번은 무시했고, 나머지도 백우에서 오기로 한 연락이 있을 때나 받았다. 그건 스팸 전화가 범람하는 시대의 생존법만은 아니었다. 기다림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교한은 모든 낯선 전화를 받는다.
심지어 휴대폰에 남은 부재중 알림도 꼬박 확인한다.
혹시라도 어딘가에서 김수현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찾았다는 소식이라도 들려올까 봐. 이건 채 작별하지 못한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으레 가지게 되는 습관이다.
“……네. 여보세요.”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나마 인사했건만, 저 너머에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교한은 그제야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전화번호는 ‘00000000000’.
착신 시간은 여전히 착실히 올라간다. 대화할 의지가 없다면야 이쪽도 기다릴 이유가 없다. 교한은 짧게 한숨을 쉰 뒤 곧장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잠시만요, 이 팀장님!
“…….”
―끊지…… 마세요.
그를 ‘팀장님’이라고 지칭할 이는 많지 않다. 잠시 침묵했던 교한은, 이내 저 너머에 있는 사람을 정확히 짚어 냈다.
“무슨 일입니까. 박혜리 씨.”
곧장 이름을 입에 담아서일까. 돌아온 대답엔 멋쩍음이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너무 늦었지만, 저도 인사를 드려야 할 거 같아서요.
“과한 호의는 한 명으로도 충분했는데요.”
교한은 굳이 피곤함을 감추지 않고 답했다.
하지만 혜리는 그런 것엔 개의치 않는다는 듯, 흐리게 웃었을 뿐이다. 잠시 뒤 그녀가 먼저 입을 연 건, 짧은 적막을 몇 초간 인내한 교한이 인사를 건네려고 한 순간이었다.
―이교한 팀장님. 사실, 백우에는 팀장님 같은 사람이 몇 명 더 있다는 걸 알고 계세요?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던 교한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 대화가 생각보다 길어질 것이라는 걸 예상한 탓이었다.
“‘나 같은 사람’?”
―네. 팀장님이나 황경민 같은 사람들이요.
“…….”
―PCL-R 점수 30점 이상. 세 명 이상의 전문가에게서 반사회성을 진단받고 정신 감정에서 완전 부적격 진단을 받은…….
마치 오랜 안부를 묻는 동료처럼 일상적으로 이어지던 혜리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작아졌다.
―사회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고 도장 찍힌, 선 밖의 사람들.
수백 개의 추가 매달린 것처럼 무거운 몸이 새삼 불편하게 느껴졌다. 교한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뻣뻣하게 굳은 목뒤를 주물렀다. 저 너머에 있는 박혜리가 제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가다듬은 채로.
“그래서? 그쪽도 선 밖에 있나?”
―그랬으면 좀 더 말이 잘 통했을까요?
“아뇨, 딱히. 황경민을 보면 그러지도 않아서.”
문자가 두 개가 연달아 온 건 그때였다. 교한은 휴대폰을 가볍게 귀에서 떼서 내용을 확인했다.
[발신자 위치가 추적되지 않아요.]
[도청 방지 음파 때문에 당신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을 수조차 없고요.]
비탄의 전언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겹겹이 쌓인 피로만큼 어두운 눈가에 짜증이 어렸다. 휴대폰 저편에서 혜리의 말이 이어졌다.
―이 팀장님. 저는요. 팀장님을 보고……. 이곳, 백우에도 어쩌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세상 모두가 나쁘다고 하더라도, 어쩌면. 내가 모르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런데?”
―그런데, 이번에도 이 팀장님 덕분에 알게 됐지 뭐예요.
순간 말을 참고 크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교한은 그것이 꼭, 아주 오래 곱씹은 문장을 토해 내기 전의 헛구역질처럼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중얼거림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어조와 목소리였다.
―역시 이 개같은 곳은 안 돼. 답이 없다니까.
이미 세상은 충분히 피곤한 일로 가득하다.
교한은 여기에 더 골칫거리를 더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당장 계획한 것들을 곧장 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극도로 줄어든 수면이 이어지는 걸 몸이 견디지 못해서다.
“박혜리 씨.”
―성태 씨에게 백우를 떠나라고 귀띔하셨다면서요. 어떻게 둘러대야 좋을지 고민했는데, 감사합니다.
“아니, 박혜리. 미리 말해 두지만 난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관심도 없…….”
―김수현 씨 일은!
사실 이교한이 달갑지 않은 말을 쭉 들어 주고 있는 것이야말로 박혜리가 이제껏 쌓은 신뢰의 방증이었다.
그녀는 이제껏 궂은 임무에도 언제나 웃으며 임하는, 모난 곳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면 개성 강하고, 솔직하게는 날 선 사람 투성이인 백우에서 어디든 잘 섞였고― 특수2팀의 요원들과는 특히 가까웠다.
이건 다시 말해, 이교한 그가 특수2팀의 팀장인 이상 이제껏 혜리와 자주 부대낄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분 일은, 대신 사과드릴게요.
순간 전신으로 피 대신 전류가 돌았다.
자신은 부르는 것만으로도 빛이 바랠까 두려운 연인의 이름이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 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뒤에 따라온 문장 때문이었다.
교한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차가운 초봄의 공기를 각성제처럼 들이켠 그는, 들은 문장과 발화자의 관계를 필사적으로 계산했다.
“‘사과’?”
―…….
“무슨 사과? 누구 대신, 왜, 사과를 하는데?”
더딜지언정 꼬박꼬박 답하던 박혜리는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 앞에선 침묵했다.
전화 역시 얼마 안 가 끊겼다.
천장의 스피커에서 비탄이 ‘백우의 박혜리에 대해 알아볼게요’라고 빠르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교한은 비탄이 그녀에 대한 어떤 것도 찾지 못하리라는 걸, 기이할 정도로 확신할 수 있었다.
교한은 붉은 핏발이 선 눈으로 휴대폰을 조작했다.
본부의 위치를 이전하며 연락처가 모두 바뀌었다지만, 다행히 이번 새로운 거처에서는 모든 것이 아날로그였다.
다시 말해 비상 연락망마저 출력하여 책상 위에 두고 생활했다는 뜻이다. 교한은 그걸 보자마자 한 장 찍어 왔다.
박혜리가 마지막으로 언급한 사람은 허성태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무언가 아는 사람이 있다면, 분명 그쪽이 확률이 높다.
“…….”
답지 않게 급히 움직이던 교한의 손이 딱 멈춘 건 그때였다.
분명 빈약하기 짝이 없던 휴대폰 사진첩이, 처음 보는 낯선 풍경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과부하가 온 컴퓨터처럼 작은 액정을 내려만 보던 교한은 잠시 뒤 엄지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스크롤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어디에서 찍힌 사진인지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거대한 대회전차를 보고 나서야 이 일련의 흔적들이 시애틀에서부터 시작하는 족적임을 깨달았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혼란스러운 와중에 출처를 따져 물을 필요가 없어졌다. 일찍이 그곳의 호텔 객실에서 확인했던 뉴욕 CCTV 영상 역시 여기 있었으니까.
“이제 하다 하다 별…….”
교한은 휴대폰을 가득 채운 격노의 ‘기억’을 보며 짜증을 삼켰다. 동영상 탭에서 익숙하고도 낯선 순간 두 개가 눈에 띈 것도 그와 동시였다.
하나는 평화로운 거주지의 모습이었다.
그것이 런던 안가, 정확히는 제 연인이 주로 머물던 방에서 내려다보던 창가 풍경임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수현은 여기 앉아서 여름 바람을 맞는 걸 좋아했었으니까.
“…….”
하지만 지금, 교한의 시선을 빼앗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가장 마지막에 있는 1분 남짓한 영상의 섬네일이다. 교한은 화면 한쪽의 네모난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넘실대는 주황빛 하늘.
저건, 분명 단 하루도 잊어 본 적 없는 노을이었다. 백 개의 하늘을 보여 준대도 이 순간의 색을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잠시 뒤.
이교한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영상을 재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