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88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88화
보이지 않는 동료들은, 붉은 바다에서 간신히 토해 낸 부탁을 지켜 주고 있었다.
격노가 가늘고 넓게 퍼진 거미줄처럼 주변을 ‘순찰’한다면, 비탄은 교한을 빈틈없이 둘러싼 고치라고 했다. 영국에서의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이중의 경계를 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 때문인지, 격노는 자신의 일부가 개입한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말에 영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대. 희사는 계속 뉴욕에 있는 건가? 여기선 못 찾겠는데.
“아마도.”
―흥. 영국에서처럼 우릴 몰래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지. 문제가 생기면 곧장 초기화시키려고 준비해 두고.
“…….”
은혜를 입은 것과는 별개로, 보통의 인간이라면 비슷한 감상일 것 같기는 했다. 정원사들의 사회에도 돌발 상황을 제어하기 위한 감시 기구가 있으니 말이다.
한편, 수현은 격노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창밖에 시선을 고정 중이었다.
정확히는 요 한 시간 동안 두 번 반복해서 보인 검은 SUV에. 약해진 성대를 대신해 긴 문장은 휴대폰 메모장을 빌렸다.
[차량 하나만 확인해 줄 수 있을까?]
[이상한 정도는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까]
―으응. 잠시만 기다리도록 해, 그대!
격노는 김수현이 의심하지 못할 만큼 재깍 대답했다. 하지만, 여기엔 한 가지 비밀이 숨어있다.
지금 격노는 저 자신을 가용할 메모리가 남지 않은 상태라는 거다.
‘어떡하지?’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바이러스 때문이다.
격노는 백신을 전송하겠다는 비탄의 제안도 마다한 채 반년 넘게 그것을 조금씩 손봤다. 한땐 구속에 불과했던 그것은, 이제 네 개의 사고 중 격노만이 가진 비밀스러운 무기다.
바이러스를 통제하고 남은 여유 공간은 모두 주변을 감시하는 데 끌어 썼다.
김수현을 발견한 것도 그 덕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 셈이었다.
‘계산상으로 오늘 밤까지는 괜찮았는데…….’
계산 밖의 상황이라는 게 얼마나 드문 것인지 알기나 할까? 죽는 순간까지 제게 바다를 보여 주고, 마법처럼 돌아온 다정한 인간은 절대 알지 못할 거다.
격노는 회선을 타고 돌면서 슬쩍 아파트 안을 확인했다.
고요한 와중에 일정한 숨소리가 들렸다. 이교한은 또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간신히 잠든 모양이었다.
‘…….’
잠시 고민하던 격노는, 방치된 휴대폰으로 자신의 ‘중요한 기억’들을 몰래 옮기기 시작했다.
어차피 저 안하무인의 남자는 제가 주문한 걸 확인할 때가 아니면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었다. 때론 충전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탓에 가족의 걱정을 사는 것도 몇 번이나 봤다.
당장 급한 건 김수현의 부탁을 들어주는 거다.
그다음, 여유가 생기는 대로 여기 백업한 ‘기억’을 회수하면 될 거다.
격노는 이 문제 많은 한 쌍이 얼마나 예측불허의 사고를 치는지 미뤄 둔 채로 지금의 우선순위에 집중했다.
인공 지능에게는 아주 긴 시간, 하지만 인간이 느끼기에는 겨우 몇 초가 흐른 뒤.
수현의 이어폰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대! 저 SUV의 주인, 백우의 사람이야!
“……백우, 누구?”
―‘허성태’!
찰나 동안 몇 번이나 정보를 재확인한 격노는, 자신 없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자료를 들고나오는 걸 도와준 것도 저자이긴 하지만, 왜 여기에 왔는지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원을 만들며 도는 SUV의 꽁무니를 따라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상대 역시 그걸 곧장 눈치챘는지, 같은 길을 두 번 돈 SUV는 세 번째에는 방향을 완전히 달리하여 앞장서기 시작했다.
아파트와 주택이 모인 거주지를 빠져나와 자유로 근처 외곽으로 빠져나왔다. 가장 먼저 행인이 사라졌다. 빈자리를 채운 건 작물 하나 없이 메마른 밭이었다.
―마찬가지로 운전자 한 명뿐인 것 같아. ‘씨발, 대체 뭐야?’라고 중얼대고 있고. ……조심해야 해.
“응.”
운전대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총을 쥔 수현이 짧지만 부드럽게 대답했다.
어느덧 도로에 남은 차는 일행처럼 움직이는 두 대뿐이었다.
앞선 차가 멈춘 건 그러고도 한참을 더 으슥한 곳으로 들어간 뒤였다. 포장도로와 흙길의 경계에서 비스듬히 주차된 SUV에서 허성태가 잔뜩 경계한 채로 빠져나왔다.
물론, 수현 역시 차 문을 활짝 열어 엄폐물을 만든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예상치 못한 경계가 극한까지 치달은 그때.
“으, 으아아악!”
어느 한쪽에도 기울어지지 않았던 팽팽한 긴장은 싱겁게 한쪽으로 기울었다. 차창 너머에 있는 김수현을 발견한 허성태가 공터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혼자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유령을 만난 얼굴이 되어서.
“뭐야, 뭐야! 뭐냐고! 씨발, 아악, 뭐야!”
“…….”
“꺼져! 이 씨발, 아악! 악! 워어어, 하느님 아버지! 으아악!”
덕분에 수현은 며칠 전 카페에서의 극한 체험에 이어 두 번째로 고막의 안위를 위협받았다. 깔깔대고 웃는 인공 지능과 손에 쥔 총이 무색하게 눈을 질끈 감은 채로 신을 찾는 덩치 사이에서, 전의도 조금쯤 녹슬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허성태를 내려다보던 수현은, 이내 둘 모두를 향해 말했다.
“……조용히 좀 해.”
혼잣말에 가까운 작은 소리였지만 다행히 어느 정도 진정했다.
우렁찬 웃음소리는 볼륨을 확 줄인 것처럼 작아졌고, 씨발과 하느님을 한 문장에 담던 허성태도 실눈을 떴다.
“진짜……. 진짭, 니까?”
“…….”
“사, 살아, 있었다고요……?”
수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생존을 알린 첫 ‘사람’의 반응이니, 제 연인을 찾아갈 때 조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은 했다. 하지만 바지에 묻은 흙을 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난 성태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욱 거칠었다.
“어, 어,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요? 분명히 요트가 바다 한 가운데서 반파됐다고 들었는데요.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고, 아니, 그보다, 살아 있었으면서 왜……!”
약 일주일 전.
격노 역시 비슷한 질문을 했었지만 그땐 설명이 쉬웠다.
말을 듣지 않는 혀를 움직여 ‘희사가 도와줬어’라는 단 일곱 글자를 내뱉자, 생환 자체에 대한 의문은 곧장 해소됐었다. 방법은 둘째 치고 말이다.
하지만 이쪽은 어지간해서는 해명을 납득할 기세가 아니다.
눈인사 정도만 했던 애인의 동료가 이 정도면, 이교한은 어떨까?
수현은 몇 시간 남지 않은 무서운 미래를 예상하는 대신, 당장의 효율에 집중하기로 했다. 굳이 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쏟아 낸 질문의 대부분에 답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말해, 총을 들지 않은 손으로 검회색 스웨터를 주욱 들어 올렸단 뜻이다.
“…….”
“아…….”
크고 작은 파편들이 박혔다가 빠져나오며 남긴 자국들은 아직 다운조차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그날의 흔적이다. 허성태에게도 그건 유효했는지, 질문을 쏟아 내던 입이 작게 벌어진 채 굳었다.
역시, 교한이한테는 이건 최대한 나중에 보여 주자.
수현은 속으로 생각하며 먼저 말문을 뗐다.
저를 보는 갈색 눈동자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채 흘러나왔다.
“여긴 왜 왔지?”
“―아……. 아아, 예. 그게, 그러니까.”
성태는 여전히 이 모든 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다는 듯, 영 어리바리 반응했다. 늘 빠릿하고 깍듯했던 태도가 무색하게 멍한 표정이었다.
“티, 팀장님께서 저한테 좀 묘한 말을 하셨거든요. 그게 너무 마음에 걸려서. 친한 동료한테 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심하라는 듯 총을 허리춤으로 옮긴 성태가 SUV의 조수석에서 하늘색 파일 하나를 꺼냈다. 수현은 여전히 경계를 다 거두지 않은 채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박혜리라고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보팀 박혜리요.”
특수2팀의 요원들과 곧잘 어울리던 단발머리의 여자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살짝 고갯짓하자 성태가 말을 이었다.
“여하튼, 혜리 씨가 이런 걸 줬습니다. 이번에 본부를 이전하면서 발견한 기밀 일부라면서요. 거기 표시해 둔 걸 보시겠습니까?”
마지막까지 한 줌의 의심을 남겨 두고 성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수현은, 이내 슬쩍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보고서 표지에 사인을 남긴 최종 결재자는 ‘남기중’.
작성 일시는 작년 6월이었다.
수현은 그 시기에서 무언가 직감이라도 한 사람처럼, 작은 마크가 붙은 곳까지 천천히 종이를 넘겼다.
<표7> 2세대 OS 개발 성능 테스트 현황
―타국의 신흥 조직을 대상으로 테스트 결과, 19명 중 18명 사망, 1명 생존으로 목표 정밀 타격 및 살상력에서는 합격점을 얻음.
―그러나 2세대 OS와 소통 및 제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됨.
―이에 <■■■■>의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예상. 프로토타입의 가동 방법을 모색하여 이를 2세대와 결합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솔직히 전 현장에서 구르던 놈이라, 무슨 말인지는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신흥 조직’.”
잠시 숨을 고른 성태가 “……뉴욕에서 만났던 조직원을 기억하시죠?” 하고 나직이 덧붙였다.
어퍼 맨해튼에서 활동했던 라틴계 연합, ‘번 사이드’.
루카스 마틴은 그곳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10대 끄트머리를 채 지나지 못했을 앳된 얼굴 가득 떠올랐던 공포는, 쉽게 잊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범죄 단원들과 부딪치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경쟁 집단에 고용되는 일도 흔하고, 같은 정보를 두고 싸우기도 해야 하니까요.”
“…….”
“서로 목숨을 걸고 죽고 죽이는 걸 투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게 해야 할 일이면, 합니다. ―하지만.”
성태의 짙은 눈썹이 확 구겨졌다.
“사람 목숨을 ‘테스트’ 한다는 건……. 그건, 정말 이상한 표현 아닙니까?”
이교한이 제시했던 후보는 셋이었다.
그중 한 명은 죽었고, 한 명은 방금 막 명단에서 지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