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87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87화
이어폰 너머로 작은 한숨이 들렸다.
어쩌면 그건 부담스러운 임무를 앞둔 한탄 같기도 했다. 잠시 뒤, 재회를 코앞에 둔 연인을 두고 잠시 말을 고른 다운의 입이 열렸다.
―후우, 뭐……. 또 따로 뭐 궁금한 건?
애써 속을 달랜 질문 덕분일까. 한껏 곤두섰던 교한 역시 미약한 정중함이나마 되찾은 채 되물었다.
―궁금한 거…… 라뇨?
―당사자도 없는 판국에 알고 싶은 거라도 있냐고.
―…….
―왜. 뭐든지 좋아. 이제 못할 말이 뭐 있겠어?
뻔히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
‘최악의 한 쌍’을 향한 소심한 심술 앞에서 수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그 순간까지도 자신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연인의 예민한 반응 위에 새겨진 이름표를.
아니나 다를까 교한은 아주 오래 침묵했다.
혹시 전화가 끊어진 게 아닌지 확인 문자를 보낼까 고민했을 정도로, 오래. 심지어 그 긴 고요를 깨고 완성된 질문 역시 예상하지 못한 순간 밀려온 유리 파도 같았다.
―형은 수영을 잘했나요?
―어……. 응?
―수영요. 하필, 형이랑 물놀이 같은 걸 가 본 적 없어서.
‘하필’.
그 사소한 부사 앞에서 겁먹은 심장이 덜컹거렸다.
물이라는 매개의 꺼림칙함은 둘째치고서라도, 애초에 수영은 그리 가까운 단어가 아니었다. ‘물놀이’ 따위를 해 본 적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놀이보다는 고문에 가까운 훈련만 해 봤다.
그 모든 걸 아는 다운은 덕분에 꽤 곤란해진 모양이었다. 답지 않게 우물쭈물하는 것만 들어도 그랬다.
―당사자도 없는 판국에, 솔직하게요.
교한이 다운의 표현을 빌려 속삭였다. 사실, 수현은 이즈음부터 눈이 시리기 시작했다.
―수영을 잘했는지는……, 글쎄. 모르겠네. 물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으니까.
―다행이다.
―……뭐가?
―저는 형이 수영을 아주 못했으면 했거든요.
김수현의 공식적인 마지막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수현은 이번만큼은 도망치지도, 회피하지도 않았다. 설령 애정 한 줌 없는 저주가 이어진다 해도 하더라도 저 목소리가 더 듣고 싶어서.
―희망이 있으면 끝까지 발버둥 치게 되니까. 그렇게 힘든 건 한 번으로 충분하잖아요.
“…….”
스물다섯 살.
호텔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로 제가 이상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교한은, 아주 가끔씩 같은 걱정을 했다. 물론 처음처럼 대놓고 내색한 적은 없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초조를 증명했을 뿐이다.
하지만 김수현은 연분홍색 세상에서 아주 드물게 튀어나오는 세피아빛 문장들을 사랑했다. 정제되지 않은 단어 사이에서 순도 높은 마음을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밭은 숨을 삼켰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가까스로 다시 만난 낭만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잠깐.
살짝 삐끗한 채 흘러나온 다운의 목소리는 들은 문장을 의심하듯 이어졌다.
―그렇게 힘든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이야?
―백우 본부에서 형을 노린 방화가 있었어요.
―‘방화’?
바다 밑으로 던져두었던 마음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서 같이 따라온 건 크고 작은 비밀들이었다. 덕분에 수현은 눈가의 시큰한 물기가 빠르게 증발하는 걸 느끼며 전과는 다른 의미로 숨죽여야 했다.
―누가……. 어떤, 개씨발 새끼가…….
―백우의 윤성길과 조진민.
교한이 낯선 이름까지 더해 대답했다.
하지만 흐린 웃음기 어린 설명이 뒤따른 덕분에, 후자를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다.
―아쉽게도 정다운 씨 차례는 없겠네요. 윤성길은 형이, 조진민은 내가 얼마 전에 선수 쳤거든.
신경질적으로 시작된 타건이 쾅, 주먹질로 변한 순간.
수현은 아주 조용히 노트북을 닫았다. 제게 각기 다른 애정을 알려 준 두 사람의 대화에서 빠져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저도 모르게 흘린 웃음을 다운이 들을까 걱정도 됐다.
“……하.”
누군가는 힘들지 않게 죽었기를 바란다는 말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질병으로 분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지금은 못된 안도를 할 뿐이다. 저 따위는 잊어주길 바랐던 연인의 사랑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던 어깨가 가볍게 늘어졌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터진 한숨 역시 토막 난 것처럼 떨렸다.
그 드문 방심 때문에 수현은 흐린 잡음을 곧장 깨닫지 못했다. 비밀스러운 동행이 말을 걸기 전에 나는 미묘한 신호가 너무 오랜만이었던 탓도 있다.
―말도 안 돼…….
하여, 여자아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이어폰으로 들린 순간 그답지 않게 늦게 반응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 다, 고!
잔잔한 재즈가 흘러나오던 스피커 속 노래가 늘어지더니 이내 쇠가 마찰하는 소리로 변했다. 급히 이어폰을 빼내 보았지만 고막의 안위를 지킬 수는 없었다.
시애틀에서 이어 두 번째로 듣는 격노의 비명은, 전보다 한층 끔찍했으니까.
카페 사장이 고장 난 스피커를 두고 쩔쩔매는 게 보였다. 수현은 속으로나마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보이지 않는 친구가 진정하기만을 기다렸다. 조심스레 이어폰을 다시 낀 건 아담한 카페를 채우는 재즈가 돌아온 뒤였다.
―정말……. 그대가 맞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물음은 왠지 울먹이는 것처럼 들렸다.
수현은 커피로 목을 축인 다음, 모든 숨을 모두 끌어모아 짧게 인사했다.
“……안녕.”
* * *
거실 창호 밖으로 아기자기한 동네가 보이고, 유독 볕이 잘 드는 1406호.
창백한 미청년의 이사 이후로 죽은 듯이 고요하던 그곳은 요 며칠 왁자지껄하다. 같은 라인의 거주민이 복도를 지나며 흘끗 곁눈질할 정도로.
“너. 내가 쓸데없는 거 시키지 말라고 했지.”
―그대는 지금 한 말을 후회하게 될걸.
“후회 같은 소리 하네! ‘슈크림 미니 붕어빵’……. 진짜 미친 거야? 대체 이딴 건 왜 시키는 건데?”
―흥! 참고로, 오후에 에어프라이어도 올 거야.
이제 이교한은 현관 앞에서 들리는 낯선 소리에 총을 집어 들지 않는다.
대신, 지금처럼 이를 갈며 휴대폰을 찾는다.
푸시앱 알림과 안내 문자조차 오지 않은 채 결제된 오늘의 쇼핑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제발 이번만큼은 취소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반도의 하루 배송 물류 시스템은 ‘배송 중’ 상태를 신속하게 띄운 지 오래였다.
교한은 휴대폰을 소파 위로 던지며 작은 욕을 뱉었다.
“씨발, 진짜…….”
그렇다, 소파.
황량했던 집 안엔 이제 아담한 3인용 소파가 생겼다.
그뿐일까?
냉동식품인 ‘슈크림 미니 붕어빵’을 집어넣을 작은 냉장고도 있다. 하다못해 어제는 연어가 가득 추가된 하와이안포케가 배달 오기도 했다.
당연히 그때마다 집 안은 벌컥 뒤집힌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 혹은 현상에서 격노는 다소 억울한 구석이 있다. 작은 냉장고도, 어제의 배달 음식도, 슈크림 미니 붕어빵과 에어프라이어까지 손수 선택하여 주문한 쪽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바로 몇백 미터 떨어진 주차장에서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누군가다.
“…….”
이교한, 욕도 할 줄 아네.
수현은 아파트 단지 옆 노점에서 산 붕어빵을 먹으면서 생각했다. 잠시 뒤 투덜대며 돌아온 인공 지능은 제법 과감한 제안을 해 왔다.
―그대. 그대는, 애인을 바꿀 생각은 없는 거야?
“어.”
―이교한은 정말 성격이 좆같아!
격노는 못 본 사이 입이 더 거칠어졌다.
수현은 ‘이래서 애들한테 무작정 인터넷을 쥐여 주면 안 된다고 하나 보네’라고 내심 생각했다.
연인에게 바로 찾아가는 것 대신 이렇듯 원격 지원을 선택한 건, CCTV 화면 속 대화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죽은 정보 부장의 오른팔을 처리한 것으로도 모자라, 백우의 본부로 쳐들어가 기밀을 들고 도망쳤다니. 중간에 화면이 꺼지면서 다 보지 못한 상황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하여, 수현은 일주일의 유예를 두고 바쁘게 움직였다.
혹시라도 뒤에 무언가 따라붙기라도 했다면 자신의 생존을 감춘 채 지원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잠복은 그 확인 절차 중 하나였다.
계획에 없는 일이었지만, 다운이 아파트 단지 안의 빈집 하나와 ‘조경 도구’들을 공수해 준 덕분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리고 오늘은 이 최종 검수의 마지막 날이다. 격노는 그걸 거듭 재확인하듯 이어 물어 왔다.
―오늘 밤이야. 오늘 밤에는, 그대, 꼭 나랑 같이 올라가야 해?
“그래.”
짤막하지만 힘 있는 대답에 아이 같은 웃음이 돌아왔다.
요 며칠, 격노는 문 앞에 쌓이는 물건들을 보고 교한이 화를 낼 때마다 두 사람을 재회만을 그리며 깔깔댔다. 자신의 ‘우울한 일부분’이 과부하로 말을 더듬을지를 두고 내기하고 싶어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