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86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86화
[찾습니다]
‘유령의 친구’
소재를 아는 분은 연락 주세요.
보상금 10만 달러
deep.grief@jmail.com
[야! 네 애인 미쳤나 봐!]
[어떡해? 연락해?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러는데?]
“…….”
수현은 도착한 메시지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익숙한 풍경 속에서 단 한 사람으로 뜨겁게 달궈졌던 머리 역시 간신히 식기 시작했다.
역시 뭔가 이상하다.
도저히 제 애인의―혹은 애인이었던 남자의― 생각을 종잡을 수가 없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불안만큼 무서움도 커졌다.
자신은 반년 넘게 죽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서 ‘안녕, 이교한. 나 살아 있었어’라고 한다면…… 그 애는 대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망설이던 수현은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우선 메일 보내 봐’.
필요한 짐만 가볍게 챙긴 가방을 고쳐 메고 들어선 곳은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였다. 어딘가의 단골이 되는 걸 피하는 오랜 학습과는 별개로, 수현은 이곳을 좋아했다.
“세상에! 손님, 진짜 오랜만에 오신 거 맞죠? 이사 가신 줄 알았는데!”
작고 외진 데다, 종이 뭉치를 들고 와서 느릿느릿 작업하는 거북이 번역가를 언제나 환영해 주었으니까.
“어머. 왜 이렇게 마르셨지. 어디 아프셨어요?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굉장히 오랜만의 방문이었는데도 카페 주인은 수현을 곧장 알아봤다. 정확히는 알아보다 못해 와르르 질문을 쏟아 냈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수현은 멋쩍게 묵례했다. 제 딴에는 곧장 마주 인사하려고 했지만, 입속말에 가까운 ‘안녕하세요’의 덩어리가 흘러 나갔을 뿐이다.
다행히 카페 주인은 “어휴, 괜찮아요. 무리하지 마세요. 요새 감기 엄청 유행이더라고요” 하고 손을 내저었다. 아무래도 수현을 한동안 병상에 있었던 환자로 확신하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그건 완전히 틀린 가정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어진 말을 들었을 땐, 수현은 카페 주인이 편할 대로 해석해 주어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했다.
“오늘은 항상 같이 오던 분은 안 계시네요?”
“…….”
“저, 두 분 메뉴 아직도 기억해요. 손님은 오트밀크라테, 일행분은 아메리카노. 같은 것으로 드릴까요?”
수현은 무작정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확실히 이 근방은 어딜 가든 이교한과 함께 했던 기억뿐이다.
반사적으로 선택한 가장 안쪽 좌석 역시 남들의 눈을 피해 맘껏 속삭이기 좋은 곳이었다. 여기서 저는 번역을, 교한은 책을 읽으면서 시시콜콜하고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는데…….
[답장 왔어]
[010-97XX-0124. 아는 번호 맞지?]
다행히 생각의 연쇄가 이어지기 전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수현은 빳빳한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으로 응, 하고 답장을 보냈다. 회신은 곧장 왔다. 그것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혹시 통화하는 거 같이 들을래?]
“…….”
백우의 낯선 거처를 비추는 CCTV로는 교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아니. 목소리뿐일까.
그들이 동료인 교한에게 별안간 총을 겨누는 이유도, 잔뜩 굳은 표정으로 무어라 외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단 하나 선명하게 보인 것도 있다.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는 연인의 얼굴이었다.
수현이 무언가 제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바라건대 이교한은 겁이 많아졌어야 했다.
총과 칼을 보면 질색했으면 싶었다. 이제 위험이라면 지긋지긋해서, 더는 어떤 비밀스러운 일도 원치 않기를. 8월의 붉은 기억 따위는 깊은 바다 속에 놓아 버리기를 기도했다.
제가 없어지기만 하면 포근한 가족의 품에 안겨 어렵지 않게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줄 알았다. 향긋하고 부드러운, 원래의 이교한으로. 오로지 그걸 위해 선택한 이별이었다.
하지만 반년이 꼬박 지나 CCTV 화면으로 엿본 연인은 예상과는 달랐다.
교한은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보고도 웃을 뿐이었다. 그것도 저 자신을 지키는 덴 관심 없는 눈을 하고.
[수현아. 노트북 켜 봐]
[바탕화면에 있는 빨간색 아이콘만 실행시키면 내가 알아서 할게]
[힘들면 그냥 노트북 바로 닫아버리고. 어때?]
차마 얼른 답을 못 하고 있자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잠시 망설이던 수현은 잠자코 말을 따랐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다운이 말한 프로그램을 실행시키자, 팝업 창 몇 개가 빠르게 점멸한 이후 마우스가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덕에 수현은 무선 이어폰을 낀 채로 맘 놓고 덜덜 떨 수 있었다.
이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크흠, 흠. 야, 그럼 전화 건다.
바짝 마른입을 적시려 급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렇지 않아도 달음박질치는 심장에 카페인을 밀어 넣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님을 곧장 깨달았지만, 별다른 수는 없었다.
신호가 반복된 건 단 두 번.
세 번째를 헤아리기도 전에 들려온 건 조금은 울적한 인사였다.
―안녕하세요. 다행히 메일이 120통을 넘어가기 전에 연락을 주셨군요.
“…….”
저 무심한 듯 굴곡 없는 어조를 대체 얼마 만에 듣는 걸까.
수현은 턱을 괴는 척 얼굴을 반쯤 가렸다.
멋대로 겉가죽을 무너트리는 감정 같은 건 너무나 낯설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순간 맞은편 의자에 제 연인이 있었다면, 분명히 뜨겁게 달아오른 귀를 놀렸을 터였다.
하지만 이런 동요는 시기상조였다.
너무 많이 곱씹어서 외려 매일 조금씩 원형과 멀어지던 목소리가 복제된 원본으로나마 전해진 순간이야말로, 그를 무너트린 결정타였으니.
―정다운 씨.
그렇지 않아도 비뚤어졌던 자세는 단 네 음절을 담아낸 목소리 앞에서 미완의 조각상처럼 붕괴됐다.
―어, 으음. 뭐. 오랜…… 만입니다?
―네. 그렇네요.
―어째 나를 꽤 도발적으로 찾으시길래 연락했는데. 용건이 어떻게 되실까요.
어떻게 저걸 반년도 더 넘게 듣지 않고 지냈을까?
스스로의 선택을 향해 튀어나온 자문은 조롱 같은 탄식이었다. 수현은 테이블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숨 따위가 사랑스러운 울림을 엿듣는 걸 방해하게 할 순 없었으니까.
―……소식이 없길래.
그 노력을 가상케 여기기라도 했는지, 연인의 대답은 유독 나지막하게 흘러나왔다.
―뭐?
―형이, 당신에게서 전화가 올 거라고 했거든요.
―…….
―그런데 아무런 연락이 없길래. 하는 수 없이 이쪽에서 먼저 찾은 건데요.
수현은 제 운동화 앞코를 내려다보며 멍하게 눈만 끔벅였다. 한발 늦게 고개를 들어 휴대폰을 확인하자, 다운에게서 메시지가 잔뜩 도착해 있었다.
[야]
[ㅈ;ㅣ금 말하는형이라는거너맞지]
[김수현 이거 뭔소리냐]
[빨리 말해줘 나 뭐라고 해]
수현은 다운이 괜히 으음, 하는 추임새로 시간을 끄는 걸 들으면서 달뜬 머리에 급히 기름칠을 했다. 아무래도 제가 커닝 페이퍼를 제공해야 할 입장인 건 확실한데, 어째 답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다운이한테 전화가 올 거라고 했다고,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는데.
대체 언제…….
“―아.”
허둥지둥 이어 가던 자문이 끝난 건 스스로가 말의 구속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였다. 그 순간, 의문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풀렸다.
‘말’이 아니라, 다른 쪽이다.
문제는 해결했지만 개운함은 없었다.
되레 턱밑까지 먹먹한 무언가가 치받았을 뿐이다. 수현은 회신을 닦달하는 다운의 메시지를 보면서도 한참을 단어를 고르고 골랐다.
[아무래도 내가 남긴 유서를 본 거 같아]
간신히 완성한 문장을 전송한 그때, 이어폰 너머로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흐른 건 착각이 아니다.
애초에 홀로 남은 연인에게 다운이 대신 연락할 것이라는 것부터가 합의 없는 통보였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었다면. 유령의 하나뿐인 친구는 틀림없이, 제 뜻대로 움직여 주었을 거다. 수현은 그걸 담담히 예상했을 뿐이다.
―정다운 씨?
―후우……. 음, 그래요. 미안.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길래.
―…….
―내가 너무 연락이 늦었네. 이쪽도…… 요 몇 달 정신이 없었거든.
다운이 빠득 이를 갈듯 대답했다. 덕분에 목젖을 치던 물기가 기어이 코끝까지 찡하게 울려서, 수현은 차마 뭐라 변명도 더 못 보냈다.
―형이 정다운 씨에게 맡긴 역할이 뭔가요?
친구이자 가족인 누군가의 죽음을 전제로 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한평생 천재로 불린 남자에게도 쉽지 않았다. 애초에 김수현의 부재를 가정하는 건, 기억과 트라우마 사이 어딘가에 깃든 악몽이었다.
―으음. 그러니까. 뭐. 남은 수현이 물건이 있으면, 이쪽으로 보내고…….
다운은 지난여름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하지만 누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데 장인인 김수현 애인 아니랄까 봐, 이교한은 들끓는 심장에 기름을 부어 댔다.
―왜?
짐짓 나른하고 정중하던 태도가 돌변했다. 목소리 역시 믿을 수 없을 만큼 낮게 꺼진 채로 쏘아붙여졌다.
―그건 내 건데?
―…….
―내 거라고.
―……그래. 안 빼앗아. 너 다 가져라.
덕분에, 문제의 단면을 조금은 엿본 기분이었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휴대폰으로 메시지 하나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진심 최악의 한 쌍]
이 순간, 오랜 친구에게 할 수 있는 답장은 하나뿐이다. ‘정말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