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83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83화
경기도 외곽,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폐공장.
이곳은 백우의 새로운 거처다.
서울에 남아야 하는 인력은 사무실 여럿으로 쪼개 나눠지고, 남은 사람들은 모두 이곳으로 왔다.
여기에는 영국 쉬어니스에서 겪은 민간인 피해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백우 자체의 의지도 있지만, 국제적인 대형 사고를 친 것에 대한 문책성 유배의 성격도 있다.
“신원 나왔습니다!”
저 멀리, 뉴욕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이 생겼다는 걸 알지 못한 요원 하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저마다의 일을 하던 백우의 사람들의 시선이 숨을 고르는 입에 쏠렸다.
“정보팀 조진민……. 맞다고 합니다.”
여기저기서 옅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동료의 죽음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받은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번은 평소와 달랐다. 임무에 참여한 것도 아니고, 멀쩡히 겨울 휴가를 떠난 사람이 타국에서 시체로 발견되다니.
심지어 그것도 웬 폐가 한가운데 파묻힌 채로, 불이 나서…….
혼란 사이에는 굳은 얼굴로 우뚝 선 남기중도 있었다. 부하의 부고에 추모하듯 잠시 고개를 숙였던 그가 이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밝혀졌나?”
“아뇨. 현지 경찰도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기껏해야 관광객을 상대로 한 좀도둑이나 취객들의 싸움 정도가 전부인 곳이라면서요. 우선 카드 사용 내역을 기반으로 이동 경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여기. 출국 명단에서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나오긴 했습니다만.”
순간 침울해지려던 분위기가 반짝 전환됐다.
남기중 역시, 제게 보고 중인 요원이 팔에 끼고 있던 서류철을 펼치기도 전에 닦달했다.
“예상치 못한 이름이라니. 누구?”
“어, 그게. ……이교한 팀장님이요.”
확실히 아무도 지금 들을 것이라 생각지 못한 독특한 음률이었다.
“뭐?”
“예. 물론, 우연일 거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기중의 시선이 뒤늦게 내밀어진 서류 한 가운데 고정됐다. 형광펜으로 눈에 띄게 표시된 이름은 확실히 제가 아는 것이 맞았다.
‘이교한’.
지난달 두 번째 퇴원을 한 이후 복귀를 거절했다고 하는 특수2팀의 팀장. 그는 지난주 태국 방콕, 수완나품 국제 공항으로 향했다.
그것도 조진민과 같은 비행기로.
“…….”
귀국은 어제, 조진민이 발견된 때와 일치한다.
보고한 당사자는 이를 우연으로 가정하고 있지만 기중의 직감은 달랐다. 조진민이 누구의 수족과 다름없었는지 알기에 더욱 그랬다.
죽은 정보 부장의 오른팔이 하필, 불 속에서 도망칠 수 없는 상태로 죽는다?
이 문장에 우연이 깃들 여지가 있을 리가 없다.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건, 남기중 그는 이교한의 병실에 찾아갔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 부하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문밖으로 엿들었던 낯선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생생하다.
단 한 사람만을 반복해서 찾는 그…….
“―지금은 어디에 있지?”
“네? 이 팀장님이요? 어, 어제 귀국하신 거 말고는 아직.”
“당장 휴대폰 위치 추적해.”
유독 단호하게 흘러나온 지시에 요원 몇 명이 날래게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잠시 뒤 돌아온 대답은 남기중이 가장 바라지 않던 것이었다.
“위치 파악이 되지 않습니다. 별다른 통신 기록도 전혀 없고요.”
슬슬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요원들은 저마다 시선을 교환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 위화감을 짚어 내지 못할 수가 없었다.
“가족은?”
“네?”
“이교한 가족. 그쪽도 확인했나?”
“아……. 아뇨.”
“전부 뒤져. 현재 위치부터 통신, 금융……. 걸리는 건 모두 다. 필요하다면 거주지를 확인해도 좋아.”
지금, 조진민을 ‘그렇게 한 게’ 이교한 팀장이라는 거야?
요 몇 달. 바쁘고 정신없다는 이유 아래 모두의 기억 속에서 밀려나 있던 세 글자는 순식간에 백우를 혼란으로 빠트렸다. 심지어 뿐만 아니라, 드문 반발까지 터져 나왔다.
“대표님. 잠시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입을 연 건 박혜리였다.
“이교한 팀장을 추적하라면 추적하겠습니다. 얼마든지요. 그런데 가족이라뇨?”
기중의 시선이 그의 어깨를 간신히 넘는 체구의 혜리에게로 향했다.
“지금 출입국 기록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상황 아닌가요? ……심지어 이교한 팀장은 말씀하신 방법을 써서 한번 크게 실패하기까지 한 사람인데요.”
죽은 조진민과 같은 정보팀의 소속인 그녀가 쏟아 내는 질문 세례 앞에서 술렁임이 가중됐다. 여기에는 이교한의 집에서 수거했었던 ‘사적인 물건들’의 내용을 아는 자들의 은근한 동의도 섞여 있었다.
“게다가, 그보다 더 중요한 건요. 방금 내리신 명령은 계약 내용에 위배된다는 겁니다.”
“……계약 내용?”
침묵했던 남기중이 나직하게 물었다. 혜리는 그에 굴하지 않고 힘주어 말을 이어 갔다.
“네. 여기 백우에 들어올 때 맺는 계약요. ‘용역 계약’.”
“…….”
“‘본 단체에서 활동 중 발생하는 유무형의 책임은 계약자 본인에게만 국한한다’. 지금 내리신 지시는, 계약서 1항에 반하는 것 같은데요. 이교한 팀장, 여전히 백우 요원이잖아요. 그것도 대표님이 지휘하는 임무에서…… 중요한 사람까지 잃은.”
요원 하나가 격앙된 그녀를 말리려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하지만 혜리는 그걸 신경질적으로 떨치고는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지금 내리신 지시는,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기면 조직이 요원 주변인을 빌미로 잡고 흔들 수도 있다. ―이 뜻으로 해석하면 될까요?
백우의 요원들은 평범한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지 않는, 세상의 약속 아래서는 할 수 없는 일들만 주어진다. 애초에 그런 일을 위해 존재하는 그림자니까.
이곳, 백우에서 온전히 보장하는 건 단 하나다.
돈.
백우 요원 중 넉넉한 잔고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쓰는 사람도 적잖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대체로는 통장에 고스란히 쌓아 두는 경우가 많다. 제가 당장 ‘어떻게 되더라도’ 살아가야 하는 누군가의 몫으로.
혜리의 지적은 그 약점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그걸 증명하듯 어디에서도 키보드를 조작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시간의 정적을 깬 건 짧은 한숨이었다.
“박혜리 요원, 자네는…….”
“―실례하겠습니다. 대표님!”
그때, 오늘 두 번째로 급히 열린 문이 무어라 입을 떼던 남기중의 말을 잘랐다. 결코 좋은 신호라고는 할 수 없는 놀란 목소리도 함께다.
“뭐지?”
“바, 방문자가…… 있습니다.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기중이 턱짓하기도 전에 사무실 중앙의 커다란 모니터 화면이 전환됐다.
백우의 사람들은 사유지를 알리는 푯말 바로 앞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잡힌 늘씬한 인영을 곧장 알아보았다. 마치 제가 모니터에 떠오른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살짝 고개를 올린 상대―
그러니까, 문제의 특수2팀 팀장이 보란 듯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장 요원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사무실까지 대령된 이교한은, 눈이 마주친 동료들에게 곧장 인사를 건넸다.
“다들 애사심이 대단한데요.”
“…….”
“하루아침에 종로에서 이런 폐공장으로 출퇴근까지 하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긴 좀 심하네. 이만하면 퇴사 사유 아닌가?”
해사한 어조로 감싼 조롱에 요원 몇 명이 조금 움찔했다.
갑자기 바뀐 근무지로 겪는 곤란은 그들이 메신저로 늘 투덜대는 화제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원들을 더욱 얼떨떨하게 한 건 지극히 사실에 근거한 ‘소문’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과 태도였다.
살짝 길기는 했지만 말끔하게 세팅한 머리. 검은색 반폴라 니트와 정장. 저만한 장신이 아니고서야 엄두도 못 낼 진한 올리브색 롱코트. 거기에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한 구두까지.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이 반질반질한 외관은 그들이 익히 기억하는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굳이 변화를 찾자면 날렵해진 얼굴선 정도일까.
완전히 폐인이 됐다고 들었는데…….
눈만 뜨면 죽지 못해 안달이라며. 뭐야. 멀쩡하기만 한데?
백우 요원들은 반가워해야 할지, 의아해해야 할지 모를 동료의 모습에 마른침만 꼴깍 삼켰다.
짧은 대치를 무너트린 건 남기중이었다.
“……이교한 팀장. 여긴 어떻게 찾아왔지?”
“하하, 보자마자 질문부터 할 거였으면, 내가 물어보는 것에도 잘 대답했었어야죠.”
몇몇 요원들은 교한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기중만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했다. 교한은 별 기대조차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자기 궁금한 것부터 챙기려고 드는 거. 참 여기다운 짓이기는 한데.”
“아무래도 현장에 복귀하러 돌아온 건 아닌 것 같네만.”
“아, 네. 아직 그런 험한 일을 하기엔 몸과 마음의 상처가 깊어서.”
“어려운 발걸음을 하게 해서 미안하게 됐군. 힘든 와중에도 여기까지 온 덴, 이유가 있을 테고?”
도톰한 입술에 걸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제가 누구들이랑 다르게 좀 인간적이라. 선물을 좀 전해 드릴까 해서요.”
화사한 얼굴과 소란스러운 등장에 밀려 얼른 보이지 않았던 것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말마따나, 이교한은 손에 종이 가방 몇 개를 들고 있었다.
“선물?”
“네. 요 며칠 해외여행을 다녀왔거든요.”
“…….”
“―여기. 기념품.”
나긋나긋한 대화가 이어질수록 긴장이 고조되던 사무실은, 이내 교한이 종이 가방 안의 물건들을 바닥에 쏟았을 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릴 지경이 됐다. 물론, 그를 겨냥하는 총구의 개수도 덩달아 늘어났다.
그걸 본 교한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왜. 그냥 선물이라니까?”
바닥에 작은 섬 모양으로 쌓인 건 포장지에 각종 열대 과일 그림이 그려진 간식들이었다. 마치, 보란 듯이 태국어가 적힌. 심지어 눈치가 빠른 자들은 교한이 사 온 ‘선물’이 사무실의 인원수에 딱 맞춰져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 이어지길 잠시. 남기중의 입이 열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조진민, 자네 짓인가?”
여전히 입가에 걸린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교한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슬쩍 그늘진 갈색 눈동자로 기이한 이채가 돌았다. 요원들은 그즈음에야 뒤늦게 깨달았다.
이교한은. 저 남자는, 전혀 멀쩡하지 않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