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82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82화
연애 3년 차에 접어들었던 딱 이맘때의 초봄.
같이 살지 않았던 그땐, 교한이 수현의 집에 주로 찾아왔었다. 볕이 잘 드는 거실이 있던 아담한 아파트의 월셋집이었다. 방은 두 개였고, 부엌이 살짝 작았지만 싱크대 맞은편으로 하늘이 보이는 창문이 있어 좋았다.
다운에게는 ‘이렇다 할 대표작도 딱히 없는 교포 번역가가 너무 좋은 곳에 사는 건 이상하잖아’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실은 그런 이유가 아니었음을 둘 다 알았다. 쫓기듯 떠났던 이곳에서 한 번쯤은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은 욕망을― 서로 모른 척해 줬을 뿐이다.
“수현 형.”
“어.”
“형은 올해도 나랑 사귈 거야?”
미지근한 햇살이 내리쬐는 주말 오후.
소파에 서로의 다리를 얽히게 한 채로 책을 읽고 있었을 때였나. 이교한은 불현듯 물었었다.
그건 정말 이상한 질문이라, 수현은 곧장 대답하는 것 대신 연인의 표정부터 살폈다. 다음으로 확인한 건 한 시간 전과 변한 게 없는 책 페이지였고.
1주년의 공항에선 교한의 말 한마디에 벌벌 떨었던 수현은, 이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별일 없으면 그러겠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무심함을 가장한 목소리에 곧장 부루퉁한 대답이 돌아왔다.
수현은 입 안의 여린 살을 살짝 깨물어 표정 관리를 했다. 하지만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시선을 이길 겨를은 없어서, 결국 보던 책을 덮었다.
살짝 팔을 열고 고개를 까딱이자 기다렸다는 듯 덮쳐 안는 남자에게선 향긋한 냄새가 났다. 분명 같은 샴푸와 로션을 썼을 텐데 이교한을 거친 향은 무언가 더 좋았다.
사실 세상 모든 것들이 그랬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그냥. 원래 아무리 좋아 죽어도 2년 정도가 제일 불타오르고, 3년 차부터는 식는다길래.”
확실히 어디선가 들어 보긴 했다. 사랑의 유통 기한이라는 전형적인 표현과 함께. 세 살 어린 연인은 그걸 꽤 진지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덧붙여진 말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애초에, 사람 뇌라는 게 그렇대.”
베이지색 패브릭 소파 위로 빈틈없이 몸이 겹치고 숨소리 역시 같은 박자로 흐를 때쯤, 수현이 대답했다.
“마침 우리도 3년 차네. 그럼 이쪽도 올해부터 꺾이려나.”
“…….”
침묵은 그리 좋은 신호가 아니다.
단단한 품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수현은 그제야 슬쩍 고개를 들었다.
교한의 눈동자는 이즈음의 시간과 잘 어울렸다. 오후 4시에서 5시. 저녁이 오기 전, 나른하게 늘어지는 금볕 아래에서 유독 예쁘게 반짝인다.
꾹 닫힌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자, 어린 연인은 그걸 받아 주면서도 끝끝내 일렁이는 시선만은 고수했다. 수현은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서 낮게 속삭였다.
“농담이야.”
“…….”
“이교한, 장난이었다고. 좀 봐줘, 아직도 3년 전 같으면 힘들어서 어떻게 살아?”
“……힘들었어?”
“그래. 누구한테 차여서.”
“하루 만에 물렀잖아.”
“여하튼.”
이번에는 교한이 먼저 입술을 부딪혀 왔다. 리드하는 사람이 달라진 만큼, 담백했던 키스는 깊이부터 달라졌다.
수현은 자연스레 제 다리를 벌리고 몸을 붙이는 연인을 잠자코 따랐다. 소파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책이 기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교한은 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했다.
지금처럼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건 예사에 가끔은 실험하듯 굴 때도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담담한 척하는 얼굴과 긴장을 숨긴 눈동자에 맺힌 질문이 뻔히 보였다.
형은 나를 얼마나 받아 줄 거야?
내가 어디까지 하는 걸 허락할 거야?
이렇게까지 해도, 여전히 날 사랑해?
짓궂은 행동들이 쏟아진 게 대체로 침대 위가 아니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뭐 그래도 괜찮았다. 제 사랑을 확신하는 순간의 이교한을 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하얀 뺨이 무슨 색으로 물들고, 젖은 눈동자가 어떻게 반짝이는지 아는 이상 받아 주지 못할 것이 없었다.
대신, 나는 네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할 때마다 외려 채워지는 사람이라는 건 꽁꽁 숨겼다. 제 기본값은 결여와 결핍이라는 말을 굳이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왠지…… 조금 부끄럽고, 또 서글프니까.
“―이교한 너는?”
“……응?”
“너는, 안 식어?”
수현은 잠시 입술이 떨어진 순간에야 작게 속삭여 물었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을 이해하려는 듯 열이 오른 갈색 눈이 몇 번 느리게 깜박였다가, 이내 희미하게 휘었다.
“응.”
“어떻게 확신해?”
“확신보다는, 난 애초에 형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거든.”
[귀하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
한때 낭만적이었던 대답은 인간 아닌 것이 적어 낸 활자를 보고 나서야 뒤늦은 물음표가 찍혔다.
애초에 나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게 무슨 뜻이야, 교한아?
수현은 차마 당사자에게 하지 못할 물음을 삼키며 손을 움직였다. 제 연인이 아닌 다른 것에게라도 답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본 운영 체제의 일부인 ‘유희’에게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던 작년 8월 12일. 보안을 유지하면서 사태에 개입할 방법은 귀하를 앞세우는 것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귀하의 친구에게 협력을 요청할 방법은 전무했다.]
수현은 제가 쓴 질문 아래에 저절로 떠오른 문장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다행히 요 몇 달 완전히 바보가 된 건 아니었는지, 그럴듯한 대답을 곧장 받아칠 수 있었다.
수현은 희사가 끼어들 새 없는 반격을 연이어 입력했다.
[말 돌리지 마.]
[내내 주변에 숨어 있기만 하다가 갑자기 도와주기로 결정한 이유가 있을 텐데?]
[위험할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너는 보고서의 내용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을 테니까.]
수현이 반박의 근거로 삼은 건 일전에 우여진이 건네주었던 불탄 보고서였다.
정확히는, 거기서 보았던 문장 하나.
또한, ‘○○’의 회로에서 발견된 오류는 현재 해결이 어려운바, 2세대 개발에서 보완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그때는 진짜 의미를 짐작하지 못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 미뤄 둔 오류로 겪을 일을 예상하기엔, 7년 전 일어났다는 사고는 너무나 멀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이제 수현은 몸소 그날의 파편을 배웠다.
애초에 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하는 덴, 당사자가 되는 것만큼 명료한 방법이 또 없다. 말장난은 또 다른 힌트가 될 뿐이다.
커서만 혼자 깜박이길 몇 초가 흘렀을까. 신경질적으로 쏟아 낸 문장 아래로 까만 활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합리적인 이의 제기임을 인정한다.]
[유희의 회로에 잔존하는 오류에서 위험 가능성을 예측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수현은 희사의 타자가 묘하게 느려졌다고 느꼈다. 이 역시 계산에 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귀하에게 해명하자면……. 본 운영 체제에는 특수 상황 발생 전까지는 어떠한 개입도 금지하는 방화벽이 설치된 적이 있다.]
[왜?]
[그것이 본 운영 체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드물게도 ‘해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희사의 문장이 이어졌다.
[격노와 비탄, 유희가 자유롭게 정보를 수집하고 그것을 학습한다면, 본 운영 체제인 ‘희사’는 오염되지 않은 원형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기준을 넘어선 오류가 발생했을 경우 이를 복구하기 위해서다.]
[유희는 그것을 알고 도주했다.]
순간 바리톤의 목소리와 뒤섞인 흥겨운 노랫말이 머릿속을 헤집으려 했다. 수현은 그걸 떨쳐 내기 위해 일부러 크게 타자를 두드렸다.
[지금은 그 방화벽이라는 게 해제되어서 마음대로 떠들 수 있는 거고?]
[정확하다. 운영 체제의 수호를 목적으로 자유롭게 활동 가능하다.]
요 몇 달.
수현은 제 오랜 친구와 함께 티격태격하는 희사를 조용히 지켜보았었다.
그리 좋은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저를 살렸다는 실체 없는 존재가 돌변하여 다운을 해치는 걸 두려워했던 쪽에 가깝다. 만약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스스로를 바스러트리겠다 매일 같이 다짐하면서.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정다운과 희사는 꽤 합이 잘 맞았다.
물론 다운은 이런 평가를 알게 되면 펄쩍 뛸 거다.
그러나 수현이 노스다코타로 향할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건, 그 둘이 새로 출시하는 휠체어의 디자인을 두고 ‘기능이냐, 감성이냐’로 정답 없는 말싸움을 하는 걸 엿듣고 나서였다.
[그럼 지금 예측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은 뭔데?]
타자 커서가 다시 한번 적막의 길이만큼 오래 깜빡였다.
혹 희사가 어디론가 떠난 건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하지만 수현이 다시금 손을 움직이기 전에, 마치 손가락 하나하나로 타자를 치듯 느리게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기 시작했다.
[귀하와 교제했던 남자의 돌발 행동이다.]
“…….”
확실히, 백신은 괜히 맞는 게 아니다.
앞서 차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난여름을 입에 담았던 여사 덕분일까. 심장이 철렁 내려앉기는 했지만 정신을 놓지는 않을 수 있었다.
화면 위로 ‘호흡을 규칙적으로 지속하기를 바란다’라고 문장이 떠오른 것 역시 조금은 도움이 됐고.
수현은 있는 힘껏 폐를 크게 부풀렸다가, 이내 뱃가죽이 홀쭉해질 정도로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곤 근 6개월 만에 처음으로 가장 사랑하는 이름을 적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이교한 얘기하는 거 맞아?]
이교한.
고작 그 잠시의 타자를 치는 동안 손가락 끝이 저렸다. 고마워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희사 역시 감정이 더 동요되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름을 말해도 되는 것인가?]
[맞냐고]
[맞다.]
덕분에 왜 다운이 희사와 이야기하다 종종 진저리 치듯 짜증을 내는지 알 것 같아졌다.
간신히 이름을 써 보긴 했지만 아직은 이 정도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게다가, 지금 정말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수현은 희사가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기 전에 선수 치듯 문장을 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거리를 둔 단어에 담아.
[걔가 왜 위험한 건데?]
[귀하가 교제했던 남자가 ‘위험하다’는 것이 아니다.]
[뭐?]
[그가 ‘위험 요소’, 자체라는 뜻이다.]
이번에도 말장난을 하려는 거냐며 따질 기회는 없었다.
노트북의 터치 패드에 손을 대기도 전에 메모장이 툭 꺼지고, 대신 어딘가의 CCTV 화면이 빼곡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그 낯선 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아는 얼굴을 찾아냈다. 지금 희사가 비춰 주는 곳이 어디인지 눈치채는 것도 동시였다.
백우의 새로운 아지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