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81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81화
기억 속 여사의 마지막 모습은 산소마스크와 붕대에 휘감긴 채였다. 그건 어디를 봐도 삶보다는 죽음보다 가까운 광경이었다.
수현은 짧은 복도를 달려 그녀에게로 향했다. 몇 달 만에 제대로 움직인 근육이 뻣뻣하게 아우성쳤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었다.
“세상에, 이게 뭐람. 밖에서 봤으면 못 알아볼 뻔했는걸.”
사실 여사는 수현의 소식을 전해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당장 그 자신도 간신히 의식을 회복한 터라 부러 주변에서 쉬쉬한 탓이다. 하지만 자신의 회복기 내내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수현을 예사롭게 여길 여사가 아니었다.
결국, 그녀가 모든 걸 알게 된 건 수현이 노스다코타로 떠난 뒤였다.
반사적으로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수현에게서 꽉 막힌 탄식이 터져 나왔다. 분명 턱밑까지 온갖 문장이 치받건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그 파편조차 되지 못하는 소리였다.
“무리하지는 말고. ……자, 같이 가자.”
여사는 자연스럽게 수현의 팔짱을 끼고 이끌었다.
발을 옮길 때마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경호원들이 함께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병원 밖의 리무진까지 누구도 마주치지 않고 내려간 그들은, 이내 도시의 밤거리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수현은 촘촘하게 붙은 마천루들을 지나 향하는 곳이 다운의 새로운 거처임을 머잖아 눈치챘다.
가는 데는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하지만 수현은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건 어쩌면 너무도 해야 할 말이 많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뭉치고 뭉쳐 목구멍을 틀어막았을지도. 대신 입을 연 것은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띤 여사였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할 방심이야. 이 늙은이를 지키려다 죽은 아이까지, 모두 다. ……그래도 아쉬운 게 있다면 되돌려 줄 기회를 빼앗겼다는 것 정도지.”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여사의 말을 듣던 수현은, 마지막에 붙은 문장에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 반응에 여사는 의외라는 듯 말을 이었다.
“몰랐던 모양이구나. 누가 먼저 선수를 친 모양이던데? 수현이 네 생일에.”
생일.
그 단어는 요 몇 달 마치 금기나 다름없었다.
다운은 아예 작년 여름이 없었던 것처럼 굴었고, 가끔 집이나 마당을 관리해 주러 오는 고용인들은 웬만해서는 말을 걸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단지, 여사가 혼자만의 바다에 잠겼던 수현의 곁으로 너무 쉽게 다가왔다는 뜻이다.
일상적인 어조는 끔찍한 순간들을 연화시켰다.
수현은 이미 제 일부가 된 비관이 옅어지는 감각을 낯설어하며 어찌할 바 몰라 하다가,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한참이나 만지작거린 끝에 완성된 문장은 단출했다. 실은 김수현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음?”
감히 떠올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질문 위에 쌓인 먼지를 훑어 낼 수 있었던 건, 작년 여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여사 덕분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조심스럽기도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막 의식을 찾은 여사가 혼몽한 와중에 했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왜 자꾸 여사님이 약 기운이 떨어지고 정신을 차리실 때마다 이교한을 네 옆에 두면 안 된다고…… 위험하다는 말만 반복하시는 걸까?’
물론, 떠올린 기억을 꺼낼 용기 같은 건 작년 여름 바다에 모두 묻어 두고 왔다. 거기에 연인의 이름이 끼어 있다면 더더욱 엄두가 나지 않는다.
수현은 첫 번째 질문을 밀어 두었다. 대신 택한 건 그보다 훨씬 이전의 시간표에 찍힌 물음표였다.
[재작년,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중개해 주셨던 의뢰를 기억하세요?]
[어떤 영국 여자의 의뢰였는데요. 혹시 그것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실까 해서요.]
휴대폰을 건네받은 여사는 잠시간 침묵했다. 가늘게 다듬은 눈썹이 살짝 위로 치켜떠진 것 말고는 표정 역시 특정한 이름표를 붙이기 모호했고.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흘러나온 목소리는 엄격한 중개인의 것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구나.”
“…….”
“해선 안 되는 질문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소위 높으신 분들이 중개인을 낀 회사 소속 정원사를 선호하는 것 역시 의뢰인의 정보가 철저히 보호되기 때문이다.
수현의 질문은 그 모든 약속을 배반하는 것이었다. 입에 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아침에 평판이 달라질 수 있을 만큼. 수현 역시 그걸 잘 알기에 눈만 느리게 깜박였다.
잠시 뒤, 여사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이번에는 규율이 무효가 된 상황인 걸 다행으로 여기렴.”
짙은 눈썹 사이가 희미하게 좁아졌다.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그걸 너무도 잘 이해해서다. 규율의 무효. 그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정원사로 지낸 수현 역시 몇 번 보지 못한 상황이다.
휴대폰 위를 두드리는 손이 드물게 빨라졌다.
[의뢰인이 우리 쪽을 배신했다고요?]
여사는 답을 대신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다. 일정치 못한 회색 잔디 같은 머리카락 너머로 진한 분홍색 흉터가 보였다.
“의뢰인의 이름은 불명. 하지만, 발신처는 이상할 정도로 또박또박 쓰여 있었단다.”
놀란 눈이 된 수현을 똑바로 바라본 여사의 입이 열렸다.
“‘나래 아트 센터’. 수현이 너도 잘 알고 있는 곳이지?”
만약 이 순간 수현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차마 곧장 대답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정작 질문을 던진 여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상상해 온 사람처럼 여상한 표정이었다.
“미국 전역을 뒤져도 유일한 한국계 중개인을 나를 통해 ‘유령’ 앞으로 온 의뢰라니. 그것도, 하필 네가 막 서울로 피신한 상황에서.”
“…….”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위협이었어. 난 곧장 사람을 꾸려 ‘나래 아트 센터’로 향했고―”
오히려 말을 이을수록 내용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난기가 섞이더니, 종래에는 코를 찡긋하기까지 했다.
“거기서 아주 의외의 광경을 만났지.”
작년 여름 이후, 단 한 번도 해빙된 적 없던 바다에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수현은 덧없이 입술을 달싹대기도 하고, 한참이나 휴대폰 위로 무언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여사는 그 드물게도 선명한 당혹을 음미하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한참 뒤에야 완성된 문장은 들인 공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았다.
[전부 다 알고 계셨어요?]
흐흥, 하고 여사가 작게 코웃음 쳤다.
“참 여러모로 실망했었다는 말을 꼭 해야겠구나.”
“…….”
“아무리 우리 쪽 사람들이어도 그래. 어떻게 몇 날 며칠을 감시하는 걸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니? 남자 고르는 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레이스 벨이라는 이름으로 꾸며진 우여진의 의뢰를 주선했을 때가 재작년. 그 전부터 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면, 발뺌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애가 무르익었을 때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즈음에는 이교한이 ‘길거리에서 자연스럽게 손잡는 법 연구’ 따위를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렇담, 뉴욕에서 제 딴에는 의뢰인인 척 거리를 뒀던 순간조차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단 뜻인가?
일찍이 ‘대화 대신 잠수, 세상 대신 동굴’을 택하는 회피성을 인정받은 수현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어 여사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리무진이 넓어 봤자 차 안이다. 몇 뼘 떨어진 간격 속에서 영영 모르는 척하는 건 불가능하다.
수현은 당혹만큼 찌푸려진 얼굴로 여사를 다시 바라보았다. 혈색 없던 뺨도 슬쩍 붉어졌다. 여사가 다시 한번 소리 내 웃었다.
“처음에는 우리와 같은 부류인가 싶었는데, 나랏밥을 먹는 사람들과 곧잘 접촉하는 걸 보고 정보기관이라는 걸 깨달았지. 하지만 거기까지 쫓고 나니 더 아리송해지더구나.”
여사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던 장난기가 희미해지고, 그만큼의 의문이 실렸다.
“수현이 너의 생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든, 구성원의 배신 여부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든……. 굳이 주소를 노출해서 미리 경계하게끔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당혹을 뒤로 제쳐 두고 생각해 보면 하나같이 반박할 여지가 없는 추론이었다.
심지어, 여사는 “혹 네가 무언가 아는 게 있을까 싶어서 의뢰서를 보여 주기까지 해 봤지만, 몇 분 훑어보고 그 자리에서 거절했잖니?”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이기까지 했다.
어느새 도심을 빠져나온 차창 밖은 건물들의 키가 급격히 낮아졌다.
리무진 안을 다시금 채운 적막 속에서 간신히 평정을 찾은 수현은, 차마 떠올리지 못했던 다른 의문의 답까지 찾아냈다.
여사가 저와 이교한의 관계를 다 알고 있었다면― 동물 보호소 근처에서 잡힌 수상한 약속을 차마 무시하지 못한 이유 역시 분명해진다.
내내 그녀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니 정말 의뢰를 수락해 주길 바라고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아.”
수현은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을 흘린 여사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도 시큰해지는 눈을 달래려 얼마나 노력해야 했는지 모른다. 요 몇 달, 수현의 눈물샘은 평생 기능하지 못했던 걸 한 번에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제멋대로다.
다행히도 여사는 창문 밖의 어두운 거리에 시선을 둔 채였다.
“그저 누군가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지. 수현이 너와 그 반반하고 건방진 남자에 대해.”
“…….”
여사는 ‘그레이스 벨’ 역시 백우의 일원이라는 것까지는 캐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다운에게 한 이상한 경고의 의미는 더욱 물어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괜찮다. 저 자신의 생일 이후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생긴 참이었으니까.
다운의 집에 도착해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은 수현은, 유독 밤하늘이 잘 보이는 손님용 침실로―표현만 이렇지, 결국엔 단 한 사람을 위해 마련된― 곧장 향했다.
어둠 속에서 불을 켜는 것보다 먼저 한 일은 책상 한편에 있던 노트북을 여는 거였다. 수현은 메모장을 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물음을 던졌다.
[너]
[날 살린 이유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