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80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80화
작년 여름 이후, 백우의 많은 시스템이 바뀌었다.
백우는 더 이상 주요 정보를 서버에 남겨 두지 않는다.
물론 21세기의 문명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일이니 사내 메신저 따위는 여전히 사용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사안은 무조건 인편을 통한다. 영국에서 앞서 겪은 굴욕적인 경험 때문이다.
이교한이 조진민에게 얻고자 했던 정보 역시 인공 지능이 훔쳐볼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이었다. 제가 수현과 함께 나눴던 작은 노트 속 이야기처럼.
한동안 침묵했던 교한의 입이 열렸다.
“왜 순진한 척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예?”
“죽은 정보 부장이 남기중을 꺼림칙하게 생각했던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데요. 애초에 백우 같은 곳의 대표가 정상일 리도 없고.”
남기중은 백우 내부에서 유독 평가가 좋았다.
물론 일 처리에서는 집요할 만큼 깐깐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건 조직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흉도 아니었다. 기중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으면서도 가장 나이 어린 요원의 말까지 귀 기울여 들었으며, 권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대신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당장 경쟁에서 져도 좋다. 우위에 설 방법 같은 건 살아남은 다음에 생각하면 된다. 선택지가 실적과 본인의 목숨, 둘뿐이라면 무조건 후자를 택해라.’
정보기관의 수장이 내거는 절대명령치고는 꽤 파격적인 언사였다. 또,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백우의 일원이 된 사람들에게는 큰 반향을 주기도 했고.
여기서 조진민의 실수는 하나다.
눈앞의 남자가 대세와는 정반대의 감상을 지녔단 사실을 몰랐다는 것.
“자, 잠깐, 잠깐! 이 팀장님! 흐악!”
진민은 삽을 뽑아 드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혼비백산했다. 이제 저것의 용도는 몇 남지 않았다. 단어 그대로 머리가 두 쪽 나기 전에, 휴가지에서 살아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기어이 그 이름을 입에 담은 건 그래서였다.
“―유희의 행방도!”
순간 이교한의 움직임이 멈췄다. 진민은 그 틈을 타서 말을 쏟아 냈다.
“유희, 유희의 행방도 쫓고 있습니다! 왜, 그날 상황을 중계했던 사람이요! 자길 유희라고 소개했던!”
“…….”
“이건, 어디에도 자료를 남기지 않고 극비리에 추진하는 거라……. 투입된 인원이 아니면 모릅니다. 분명 연금술사 본인이거나 최측근일 테니까요!”
8월 12일.
그날 이후 유희의 SNS는 강제 폐쇄됐다.
잠시나마 현지 언론을 시끄럽게 타기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테러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유럽에서 민간인을 향한 위협이 진행됐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사회적 해커 집단의 소행이라는 말부터 온갖 가설이 난무했다.
하지만 웬 낯선 남자에게 ‘여러 개의 공’을 받아 설치했다는 아이의 증언과 교회 옆에서 당사자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로는 급격히 관심이 식었다. 거기에는 물밑 외교도 있었겠지만 그까짓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이교한을 들끓게 한 건 어느 신문과 언론에서도 단 한 줄의 단락으로도 언급되지 않은 진실이다. ‘남은 공’을 들고 홀로 떠난 누군가.
“여, 여전히 유럽에 있는 것 같습니다.”
“…….”
“워낙 국경을 쉽게 오가는 터라 추적도 어렵고, 모습을 드러내는 간격도 변칙적입니다만……. 연관성 없는 사건들에서 막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유희는, 꼭 ‘노래’를 틀고, 인터넷을 통해 ‘조력자’를 구합니다. 그다음엔―”
진민은 마른침을 한번 꼴깍 삼켰다.
이교한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묘하게 그늘이 진 채라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파악할 수 없었다.
“사건 당사자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고요.”
사실 진민 역시 제일 마지막에야 유희를 언급한 건, 이걸 꺼내 드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그 고고하던 이교한이 어떻게 망가졌는지― 혹은, 망가지는 중인지는, 백우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다못해 조진민 그조차도 희미한 동정을 품었을 지경이다. 휴가지에서 야경을 구경하러 나왔던 늦은 밤, 제 코와 입가를 틀어막은 무언가에 정신을 잃기 전까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우뚝 서 있던 교한에게서 몹시도 낯선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그럼 나도 선택지를 줘 볼까.”
그건 작고, 낮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억양이 아닌 듯 소름 끼쳤다. 순간 얼떨떨해진 진민은 한발 늦게 대답했다.
“예?”
“이건 여기에 둘게.”
목소리에 이어 말투 역시 바뀌었다. 모르는 사람이 대화만 듣는다면 친구 간의 대화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가볍게.
하지만 정작 듣는 당사자는 변화를 자각하고 머리꼭지까지 소름이 돋았다. 말 그대로 ‘눈앞에’ 놓인 삽을 보았을 땐 더욱 그랬다.
진민의 시야로는 이제 저를 파묻은 삽과 흙으로 얼룩진 구두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억 속에 있는 특수2팀 이교한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던 거다. 이어진 문장 역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렀다.
“30분 뒤에 여기에 불이 날 거야.”
“―아, 안 돼, 안 돼, 잠시만요, 제발!”
“그래도 형보다는 조건이 낫잖아? 형은 열쇠도 없이 갇혀 있었는데, 너는 도구도 있고.”
“이교한 팀장님, 잠깐만요, 제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십쇼. 제가, 뭐든지 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백우에서 필요하신 게 있다면, 뭐든지요. 정말입니다! 예?!”
횡설수설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는 갈수록 절박해졌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의 유일한 청중은 감정적인 호소에 흔들릴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저 위에서 짧고 날 선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꼴을 하고?”
“……이 씨발 새끼가!”
내내 착실히 저자세를 취했던 진민의 첫 반항이었다. 기세에 비해 위협은 되지 않긴 했지만, 그 나름은 절박했을.
“너, 내가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씨발, 죽여 버릴 거라고!”
“…….”
“야. 이교한. 너 좋은 말로 할 때 여기서 나 꺼내라. 어?! 혹시라도 내가 어떻게 되면, 백우에서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교한은 대답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시뻘겋게 변한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저를 향해 쏟아지는 으름장을 듣고 있자니, 문득 같은 순간 제 연인은 어떠했을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날 원망했었을까? 경기도의 폐건물에서도, 화염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았을 때에도, ……혼자 바다로 향했을 때에도?
답은 오래지 않아 나왔다. 김수현은 그런 당연한 것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했다.
그래서 잃게 될 줄도 모르고.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날씨 때문일까. 온몸에 바늘을 꽂은 듯한 환통이 유독 선명해졌다. 교한은 더 시간을 끌지 않기로 했다.
“안 돼, 가지 마, 가지 말라고! 이교한! ―야!”
버려진 조진민의 외침은 여러 형태로 변모했다. 저주에서 애원으로, 또다시 막연한 욕설로. 다음은 비명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로. 교한은 그걸 마지막까지 모두 새겨들었다. 이것마저도 제가 연인 대신 해야 할 의무였기 때문이다.
누구도 찾지 않는 폐가는 얼마 안 가 시뻘건 화염으로 둘러싸였다.
* * *
김수현은 한 달에 한 번, 뉴욕으로 돌아온다.
이건 노스다코타의 외딴집에 처박히는 것을 본사와 합의한 첫 번째 조건이었다. 수현은 늦은 밤, 최소한의 의료진만 남은 작은 병원에 도착했다. 당연히 가장 먼저 뒤따른 건 따끔한 잔소리였다.
“한적한 곳에서 요양하신다면서요!”
오늘 밤의 당직은 여사의 비밀스러운 암호를 몰래 옮겨 주었던 의사였다.
수현은 대답 대신 슬쩍 시선을 피하는 쪽을 택했다. 원래도 과묵한 편이긴 했지만, 아예 입을 닫고 사는 건 놀라울 만큼 적성에 잘 맞았다. 정확히는, 침묵하는 것만으로 벅찬 현실을 유예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는 쪽에 가까울 거다.
물론 그를 대하는 사람들은 속이 타지만.
“이제 제일 중요한 건 잘 챙겨 먹고 몸 챙기시는 거예요. 잘 아시는 분이 왜 이러세요?”
“…….”
“예전엔 뼈 붙기도 전에 돌아다녀서 사람 미치게 하시더니. 진짜 너무 극단적이시네요.”
하지만 답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혼나는 건 쉽지 않다.
수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쪽도 약속하지 않는 제스처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의사는 한 달만의 진찰을 흐지부지 종료했다.
기다렸다는 듯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듬성듬성 불이 켜진 깜깜한 병원 복도에서는 묘한 한기가 돌았다. 물론, 아무리 서늘하다고 한들 노스다코타의 공기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하지만 수현은 걸핏하면 눈이 쌓이는 마을에 있을 때보다 더한 막막함을 느꼈다.
“…….”
다운은 진료가 끝나자마자 곧장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사실 마음 같아서는 외딴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제 뉴욕은 그의 고향이 아니다.
그저 곳곳에 이교한과 함께했던 기억이 가득한 도시일 뿐이다. 여기에 있으면 저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했다는 어리고 사랑스러운 남자가 떠오른다. 제 손에 뺨을 기댄 채로 속삭이던 다디단 문장들도.
그때였다.
“나도 안 보고 돌아갈 셈이었니?”
복도 저 끝에서 익히 잘 아는 목소리가 물었다. 초점이 희미했던 수현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밝은 크림색 앙고라 모자를 쓴 여사가 눈가에 희미한 주름이 질 정도로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