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79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79화
열대 기후인 태국의 1월은 지독한 추위에 떨어야 하는 여느 나라들과는 다르게 후텁지근하다.
심지어 툭하면 쏟아지는 스콜도 물러난 시기라, 관광객들이 방문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로 손꼽힌다. 정보 부장 윤성길의 충실한 부하였던 조진민 역시 그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직장, 백우에 겨울 휴가계를 내고 이곳에 방문했다. 그 역시 이번이 첫 태국 방문이었는데, 여행 이튿날까지는 화창한 날씨와 이국적인 분위기를 즐기며 휴가를 즐겼다.
유감스럽게도 사흘째의 밤이 된 지금은 낯선 정원의 화단에 머리만 내놓고 파묻힌 채이지만.
“허억……. 컥, 흐악!”
머리 위로 가볍게 뿌려진 흙에 기겁해서 고개를 휘젓다가 외려 얼굴 전체가 따가워졌다. 조진민은 눈물인지, 침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것을 질질 흘리며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를 말을 계속했다.
“팀장, 이교한, 팀장님. 켁, 살려, 주십쇼.”
“…….”
“저는, 진짜, 더는…… 몰라요. 정말입니다. ―흐이익!”
무딘 삽이 귀를 아슬아슬하게 빗겨가 흙 위로 콱 박혔다.
아주 살짝만 조준이 틀어졌더라도 깊게 파인 건 잘 다져진 토양이 아니라 그 자신의 귀였을 것이다. 움직일 수 있는 단 몇 센티나마 옆으로 머리를 튼 진민이 옅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교한은 그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사실 지금 같은 광경은 처음이 아니었다. 애초에 교한을 인간 아닌 것으로 분류했던 최초의 사건이 벌어지던 순간 역시 이랬으니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장소와 소재 정도일까?
……그리고 아마, 결말도.
“조진민 씨.”
체육 창고의 공 무더기 앞이 아닌 먼 이국의 폐가 정원에 선 교한의 입이 열렸다. 일상적이다 못해 나긋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예, 예에! 예, 팀장님!”
“제가 형이랑 같이 제주도 여행 갔던 얘기 했던가요?”
“……예?”
“어디든 놀러 가자고 계속 졸랐었거든요. 그래서 같이 제주도에 갔던 게 작년……. 아니. 재작년 겨울이었는데.”
흙과 눈물이 범벅되어 시린 눈을 멍청하게 끔벅거리던 진민은, 한발 늦게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 것으로 오해하고도 남을 정도로, 미친 듯이.
“아! 압니다, 알아요! 휴가 일정이 기밀 작전이랑 겹쳐서―”
‘군수 업체 회장을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납치했었죠?’
차마 완성하지 못한 문장은 꼴딱거리는 마른침과 함께 뭉개졌다.
그것이 진민에게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문을 연 당사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시선은 여전히 진민을 향해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덩달아 검게 물든 눈동자는 과거를 헤아리는 듯 아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까짓 게 뭐라고 형을 귀찮게 했는지 몰라.”
“……예? 아, 아뇨, 좋아하셨을 겁니다! 엄청…… 많이, 준비해 가셨으니까요.”
“그럴까요?”
“그, 그럼요!”
이교한의 요란한 연애는 조진민 역시도 잘 알았다.
그걸 모르기에는 애인과 고작 여행을 가겠답시고 저지른 사고의 스케일이 너무 컸다. 같은 부서가 아닌 사람들은 ‘특수2팀 이교한, 좀 똘끼가 있다더라’ 하던 평가에서 ‘미친. 저거 제정신이 아니네’로 일정해진 것도 1년 전을 기점으로 했으니까.
특히 그놈의 수현이는 가끔 업무 지원을 나갔을 때마다 무전으로 꼭 듣는 이름이었다.
“휴가 내내 바람이 엄청 심하게 불었거든요. 심지어 중간에는 눈인지, 비인지 모를 것까지 엄청 와서 기껏 준비해 간 일정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어.”
“아아……. 그러셨구나아…….”
“네. 그래서 이번 휴가 완전 망했다, 생각했었는데.”
교한이 살풋 눈을 접어 웃었다.
마치 그의 뒤로 보이는 가느다란 초승달 같은 미소였다. 쏟아질 것 같은 별빛 역시 그를 치장하듯 반짝였다. 낯선 폐가의 정원에 머리만 내놓고 묻힌 채가 아니었다면 감탄하고도 남을 모습이었다.
“형은 그것마저 재미있어했어요. 엉망진창인 날씨마저.”
“예에…….”
“추워서 뺨이며 코끝이 빨개졌는데도 눈이 너무 반짝반짝한 거야. 쓰고 있던 모자가 날아가려는 걸 동시에 잡았을 땐…… 정말 활짝 웃었고.”
“조, 좋으셨겠습니다.”
“맞아. 좋았죠.”
사근사근 흘러나온 목소리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달짝지근한 웃음기가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몇 달 전 팀의 막내 최진형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하소연하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 건 왜였을까.
‘와, 진짜. 저 입 털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입 털다가 죽을 뻔해? 누구한테?”
‘특수2팀 이교한 팀장님이요! 아니, 전 그냥 보고도 할 겸, 잠깐 쉬기도 할 겸. 다른 분들한테 김수현 조사한 거 좀 떠들었거든요? 근데 그거 듣고 절 찢어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완전 눈이 맛이 가서, 웃지도 않고……. 으으.’
진민은 압박감에 시달리는 상태로나마 숨을 꼴딱꼴딱 삼켰다.
연인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찢어 죽이고’ 싶어 했던 남자가, 자진해서 그와 함께한 순간을 속삭이는 이유를 상상조차 하기 싫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감성적인 독백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더 어이없는 거지.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걸 빼앗겼는데.”
“아, ―아아악! 컥!”
“누구는 이렇게 속 편하게 놀러 다니고. 불공평하잖아.”
얼굴을 구두 굽으로 꾹 짓이기다가 목울대를 퍽, 치는 통증에 진민이 막힌 숨을 켁켁댔다.
“이, 이 팀장님. 제발요, 제가 아는 건……. 컥, 정말, 다 말했습니다.”
“정보팀 소속이라 현장은 잘 모르시나? 내가 있던 곳에선 아는 걸 다 말했다고 말했을 때부터가 시작이라고 가르치던데.”
“아니,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정말로, 다.”
“정말? 정말, 다 말했어요?”
“예, 예에, 진짭니다!”
마치 유치원생을 어르듯 거듭 묻는 것에 진민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열 살 가까이 많은 나이 같은 건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저를 내려다보는 교한이 무슨 짓을 할지 예상이 안 됐다.
솔직히, 사람을 정원에 파묻어 놓고선 샐쭉 웃으며 죽은 애인 얘길 떠드는 것부터가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다정한 목소릴 내다가도, 귓불에 닿을 만큼 가까이 처박힌 삽을 뽑아 제 머리를 쪼개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이교한의 말은 조진민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럼 B동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불을 지른 게 너라는 이야기는……. 끝까지 할 생각이 없다는 거네?”
목 아래로는 모두 땅에 파묻힌 채인데도, 온몸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진민은 생선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갈라진 물음을 뱉었다.
“그, 그걸, 어떻게……?”
“내가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해? 나라면 네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할 것 같은데.”
확실히, 본부의 그 누구도 추적하지 못했던 제 행적을 알아낸 것에 놀랄 때가 아니었다. 진민은 제대로 숙일 수도 없는 머리를 애써 조아리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진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게, 윤 부장님이……. 큭!”
무릎을 굽힌 교한이 진민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도톰한 입술에 걸려 있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다. 기묘하게 번득이는 눈은 냉혈 동물의 것처럼 무감정했고,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 역시 연인을 회상할 때와는 달리 낮게 꺼져 있었다.
“사과도 할 필요 없고. 이제 들을 사람이 없잖아.”
이대로 가면, 정말로 죽는다.
조진민은 직감했다. 인간은 죽음을 앞둔 순간이 되어서야 절박해진다. 김수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필사적으로 살 방법을 갈구했다. 어쨌거나 그도 백우의 일원이다. 인간적인 결함은 있을지언정, 능력만큼은 평균을 웃돈다는 뜻이다.
“―자, 잠깐만요! 생각난 게 있습니다! 윤 부장님은, 아니, 윤성길은! B동 화재를 계획하면서 유독 이상한 말을 자주 했었습니다!”
숨죽인 폐가에서는 그 흔한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건 언제나처럼 하늘 위에 떠 있는 천체뿐이다. 기이할 정도의 적막이 흐르고 잡힌 머리채 역시 스르륵 풀렸다.
잠시 뒤 돌아온 건 나직한 질문이었다.
“……이상한 말?”
“예, 예에!”
통했다!
반사적으로 미소 지으려던 진민은, 혹 교한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얼른 표정을 고치곤 말을 이어 갔다.
“그전까지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었는데……. 그땐 정말 좀 다른 사람 같았어서. 저한테 틈만 나면 이 소름 끼치는 직장 빨리 때려치우고 한국을 뜨라는 말을 많이 했거든요.”
“…….”
“특히 가장 상종 못 할 건 사람 좋은 얼굴을 한 대표라고요.”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교한은 도저히 속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제 말을 듣고 있기는 한 건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다. 초조해진 진민은 죽은 상사를 기꺼이 헐값에 팔아넘겼다. 약간의 자기변호를 섞어서.
“B동 화재도 무모한 계획이라고 몇 번이나 말렸는데도, 그래야 백우를 빨리 그만둘 수 있다면서. 대표 같은 인간 옆에 있는 건 위험하다고 진행한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