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78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78화
다운은 순간 제 등줄기를 타고 오른 소름이 열린 창문에서 들어온 바람 때문이 아님을 확신했다.
이건, 단 한 줌의 감정 없이 흘러나온 주소 앞에서 밀랍 인형 같았던 수현이 달라져서다. 물론 그 변화에는 생기를 되찾았다거나 하는 인간적인 표현을 쓸 수 없다. 차라리 동물적인 경계라고 말하는 게 잘 어울릴 거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으로 눈이 보이지 않아도 팽팽한 긴장이 훤히 느껴졌다. 저 낡은 라디오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도.
그것을 알 리 없는, 어쩌면 알더라도 무관심할 존재의 말이 계속됐다.
―비탄은 정다운 귀하의 폐쇄된 연락망을 확인하였다.
“뭐, 뭐라고? 나?”
―그렇다. 지금은 귀하에 대한 정보를 수집 중이다. 하지만 본 운영체제는 대륙 간 전송 속도 차이에서 우위에 있으므로, 한발 앞서 방어하고 있다.
마냥 고마워하기에는 영 떨떠름했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추적자와 수호자가 같은 셈이었으니. 정다운은 껄끄러움을 다 떨치지 못한 표정으로 이어 물었다.
“갑자기…… 나는 갑자기 왜?”
원하지 않는 의견마저 줄줄 늘어놓던 희사가 처음으로 짧게 침묵했다.
만약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이 공백을 신중함으로 해석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 순간, 그들의 옆에 현현한 존재는 그런 인간적인 요소와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 김수현 귀하의 교제 상대였던 남자가 32일간의 정신 건강 의학과 병동 생활을 마치고 퇴원한 것이 주요한 이유로 예상된다.
다운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희사의 말을 끊었다.
“야!”
―……이번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냥 닥치고 있어!”
라디오에서 나는 잡음이 볼륨을 조절하듯 줄어들었다.
다운이 온갖 욕을 쏟아 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은 건 수현의 생환만큼이나 기적적인 일이었다.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다룰 땐 누구보다 신속했던 두뇌가 변명 몇 줄을 두고 삐걱거렸다. 미동 없는 수현을 향해 흘러나온 목소리 역시, 잔뜩 녹슨 채였고.
“수현―, 수현아. 그러니까. 저건 그렇게 심각한 게 아니었어. 응?”
“…….”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을 겪었으니까. 그래서 간 거라고 생각했거든. 정말로 그냥…….”
‘이교한’.
김수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음률은 이제 허울뿐인 평화를 단번에 무너트린다.
애초에 수현은 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에 소스라쳤다. 몸 여기저기 박힌 요트 파편을 겨우 다 빼내고 눈을 떴을 때조차 연인의 안위부터 발작하듯 물었다.
이교한이 무사하다는 걸 안 뒤로는 감히 근황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마치 입술 위로 그 이름을 올릴 자격조차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지만 아주 가끔씩.
수현은 그의 팔처럼 부러진 영혼 저 안쪽부터 울었다.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홀린 듯 비행기 표를 끊었던 여름처럼, 제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눈에 담고 싶어서.
다운은 그런 친구를 다독이는 어느 깊은 밤에만 속삭였었다.
‘저번 주에 한국으로 갔어. 잘 도착해서 거기에서 마저 치료받는대’.
‘다행히 아무런 후유증이나 이상 없이 건강하다더라’.
‘가족들이랑 같이 잘 지내고 있다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아, 수현아……’.
너무 아껴서. 상처받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서, 모든 걸 말하지 않은 것이 죄가 될까?
누군가는 답을 고민할 질문이지만 김수현은 아니다. 하지만 희뿌옇게 변한 시야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메마른 뺨을 타고 마음이 넘쳐흘렀다.
“미안……. 미안해.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
덩달아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답하는 것 대신 손톱 근처가 살짝 부르튼 다운의 손을 잡았다. 눈꺼풀 역시, 할 수 있는 한 꽉 감았다. 이건 이제 연인을 보고 싶을 때마다 하는 습관이 됐다.
시야가 어두워지면 기다렸다는 듯 그날의 기억이 반복된다.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 따위 없다. 곱고 예쁜 기억을 열어 볼 권리 같은 건, 저 바다 밑에 두고 왔다.
부러진 팔과 폭탄이 든 가방 모두를 흔들리지 않게 붙잡고 달린 지 몇 분.
수현은 타오르는 석양을 뒤로 한 정박지에서 자신의 관을 곧장 발견해 냈다. 애초에 닉 테일러를 찾아 헤매면서 거듭 향했던 곳이었다. 한 번 가 봤던 길은 곧장 외우는 그에게, 제 마지막을 향한 여정은 지나치게 쉬웠다.
움직일 수 있는 한쪽 팔로 시동을 걸고 확인한 휴대폰 속 타이머는 8분 32초.
엄밀히 따지면 지금도 바다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손에 든 폭탄과 함께 바다로 향하면 된다’라는 문장이 뜻하는 범위가 모호했다. 아마 그 뜻을 두고 수현이 고민하는 것마저 즐기기 위함일 테다. 도박은 불가능했다. 수현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운전대를 잡았다. 이내 요트는 하얀 포말을 남기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없다.
그저 태양이 떨어지는 곳으로 달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버티던 수현이 인형극 속 버려진 소품처럼 무너진 건, 비로소 눈앞에 넘실대는 물결만 남았을 때였다.
“―흐윽…….”
짓씹고 있던 입술에서 기어이 작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감히 입을 틀어막거나 눈물을 닦을 수는 없었다. 제 손에는 석양보다 붉은 흔적이 너무 많았다. 검은 티셔츠가 미지근하게 젖어 달라붙는 것 역시 여름이 남긴 더위 때문이 아니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고.
‘응? 수현 형. 자기야. 나만 두고, 가지 마.’
어린 연인은 마지막까지도 사랑스러웠다.
고집스레 시선을 마주치려고 들었던 갈색 눈동자는 애틋하리만치 반짝였고, 저를 붙들던 손에 힘이 빠진 순간 역시 부러진 팔을 떨었을 때였다.
그걸 새삼 깨닫고 나자, 이제껏 단 한 번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허락한 적 없던 것들이 아우성쳤다.
17년 전, 소리 내어 울지 못했던 열다섯 살 아이의 몫까지 더해서.
“으, 하아, ……흑.”
태어나 처음 칼로 찔렀던 사람은 제게 삶이란 걸 허락한 공간의 주인이었다. 그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같은 순간으로 몇 번이나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의 선택을 할 거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베어 낸 상대는. 그 사랑스러운 것은.
수현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머리 위에 씌워진 것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무섭고 겁이 났다.
늘 해 왔던 것과 정반대로―급소와 장기를 피해― 움직인 제 손이, 원장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까 봐. 하얗고 부드럽던 이교한은 저와 함께한 이후로 계속 상처만 생길 뿐이었는데, 기어이 이번에는 흉터조차 지우지 못하면 어쩌나.
휴대폰 속 남은 시간은 1분 남짓.
간신히 찾아 누른 건 카메라였다.
얼마 안 가 작은 화면 안에 피 흘리는 바다가 갇혔다. 수현은 그것이 요동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앞은 희뿌옇고 숨은 모자랐으며, 손은 불수의적으로 떨렸다.
“……제발. 제발, 부탁할게.”
필사적으로 그러모은 목소리는 수면 위로 쪼개지는 빛의 파편보다도 더 갈라져 있었다. 몇 번 남지 않은 호흡을 급히 헐떡인 수현은, 모자란 시간만큼 급히 말을 이었다.
“그 애를, 이교한을 지켜 줘.”
나는 이제 그 애 옆에 있을 수 없어.
요트가 폭발하는 순간 미처 내뱉지 못한 문장은 여전히 깊숙이 박혀 있다. 오른쪽 복부. 그가 제 심장을 찌른 위치와 같은 곳에.
* * *
수현 형, 안녕.
난 이제 공식적으로 형과 같은 삼십 대에 진입했어.
조금 전 1월 24일이 막 지났거든. 드디어 서른 살이야.
별로 대단한 기분은 들지 않지만, 마음이 급해지기는 해. 나는 형을 평생 형이라고 부를 생각이니까. 그러려면 시간이 빠듯한 거 같아.
지금은 태국에 와 있어.
여긴 처음인데, 1월에도 한낮엔 30도가 훌쩍 넘어. 이때가 건기라고 하더라고.
하지만 차라리 잘 됐어. 내가 여기 온 건 무른 땅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위해서니까. 참고로 형이 숨겨뒀던 가방도 같이 가지고 왔어.
대체 이 커다란 걸 어디에 뒀던 거야?
창고? 침대 밑?
분명히 청소는 형보다 내가 훨씬 더 많이, 자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본 적 없단 말이지. 여하튼 총은 내가 잘 쓸게. 꼭 형한테 내 목숨을 맡기는 기분이 들어서 마음에 들어.
그런데 이 편지는 이제 어디로 보내야 할까…
이교한은 언제나 즉흥적인 것을 좋아했다.
이건 무계획과 동의어는 아니다. 계획을 믿지 않는 것에 가깝다.
이 불신의 근거는 수많은 현장 경험이었다. 아무리 오래 계획표를 만지작거려 봤자 실전은 변수로 가득했다. ‘특수2팀’이 맡는 직무의 특성상, 아예 시작부터 틀어지는 경우도 많았고.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뉴욕에 막 도착해서 예상치 못한 질주를 마친 제게 원래 일을 이따위로 하느냐고 혼내던 연인을 기억해서다. 자신은 죽을 생각이 없으니 운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했던 말도.
남의 손을 빌릴 순 없다.
그렇다면, 제 사랑이 바랐던 대로 계획적인 인간이 되는 수밖에.
그 맹목적인 신앙 아래 이교한이 가장 먼저 ‘찾아낸 건’, 죽은 정보 부장 윤성길의 오른팔, 조진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