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77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77화
노스다코타는 미국 본토에서 가장 추운 주로 유명하다.
그 안에서도 월시 카운티는 서울 면적의 3배를 훌쩍 넘으면서도 인구는 1만 명 남짓인 한적한 동네다. 이 조용한 곳에서는 이방인이 금방 눈에 띄지만, 정작 관심을 쏟기에는 터무니없이 광활해 잊히는 것 역시 빨랐다. 나름의 장점을 지닌 곳이었다.
“어우, 진짜. 여긴 건물이 없으니까 열 배는 더 추워.”
정다운은 고용인의 도움을 받아 헬기에서 내리면서 작게 투덜거렸다. 폭설로 내내 하늘길이 막혔다가 겨우 날씨가 풀린 이곳은, 공기부터가 도시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 다운이 착용한 작은 이어폰으로 무뚝뚝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귀하의 계산식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 노스다코타 월시 카운티의 12월 평균 기온은 최저 온도 -16°/3.2℉, 최고 온도 -6°/21.2℉다. 반면 뉴욕의 12월 평균 기온은 최저 온도 0°/32℉, 최고 온도 7°/44.6℉이므로, ‘열 배’라는 결괏값은 불가능하다.
“안 그래도 좆같이 추운데 짜증 나게!”
다운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이어폰을 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껏 좁아진 미간 사이가 펴진 건 아니다. 표정이 더욱 안 좋아진 건 짧은 나무 슬로프를 지나 현관문을 연 직후였다.
“진심 이게 사람 사는 곳이냐…….”
기록적인 한파로 연일 기사가 나왔던 노스다코타. 그곳에서도 유독 외떨어진 작은 집은, 문을 열자 햇빛이 쏟아지는 바깥보다 스산한 기운이 흘렀다. 다운은 고용인들에게 살짝 눈짓했다.
그들은 긴말 없이도 언제 마지막으로 타올랐을지 모를 난로에 불을 피우고, 챙겨 온 식재료를 정리하며 삭막한 집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다운이 움직인 건 가장 안쪽의 침실에 있는 ‘누군가’가 인기척을 짚어 내고도 남았을 때였다.
오래된 나무 바닥은 휠체어가 움직일 때마다 발자국 같은 소리를 남겼다.
다운은 일부러 침실 문 앞에서 노크를 한 번 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기다리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 왔어.”
아담한 침실은 옅은 아이보리빛 커튼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빛이 아니었다면 밤낮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어둑했다. 다운은 불부터 켠 다음, 이어서 창가로 향하며 씩씩한 목소리를 내었다.
“무슨 잠을 그렇게 자? 그래도 집 주변은 내가 사람 불러다 눈 쌓인 거 싹 정리했다. ―추워도 잠깐 환기 좀 하자. 아직 식사 안 했을 거 같아서 이것저것 사 왔어. 너 좋아하는 토마토수프 하려고. ……재활은 잘하고 있었고? 뼈 붙었다고 끝나는 거 아닌 거 알지.”
햇볕과 함께 쏟아진 쾌청한 공기가 침실의 혼탁함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이 환해진 만큼 뒤늦게 눈에 들어오는 것들도 있었다. 바닥에 대충 던져진 채로 방전된 지 오래인 휴대폰. 물 한 방울 없이 말라붙은 컵. 지난번에 두고 간 모습 그대로 미이라가 되어 말라비틀어진 빵까지.
어울리지도 않게 쾌활하게 굴었던 입에서 기어이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야. 김수현.”
결국, 얼마 안 가 터진 건 평소 같은 삐죽한 말투였다.
“너 이따위로 지내면 여기 처박히는 거 밀어준 내가 뭐가 돼. 오늘도 여사님이 직접 오시겠다는 거 어떻게 말렸는데.”
두꺼운 이불을 두른 외딴섬이 처음으로 작게 움찔했다.
다운은 지체 없이 침대 가로 향해 그 연약한 외피를 벗겨 내었다. 고작 이불 한 겹의 보호가 사라지고 나자 모습을 드러낸 건, 뉴욕 본사에 있는 누구도 믿지 않을 몰골을 한 친구였다.
눈을 가릴 만큼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에, 동사하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빈약한 옷차림 사이로 도드라진 빗장뼈가 보였다.
“어휴 진짜…….”
“…….”
“기껏 살려 놨더니 굶어 죽을래? 어?!”
다운은 대답 없는 수현에게 급한 대로 제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칭칭 동여맸다. 실내복에 목도리라니. 우습기 그지없는 차림이지만, 저 비쩍 마른 목덜미를 보느니 이게 나았다.
어느덧 달력이 다섯 장이나 넘어간 그 날.
그러니까, 김수현의 생일에― 정다운은 ‘희사’의 연락을 받았다.
쉬어니스에서 약속된 라이브 방송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을 즈음. 정다운은 입을 삐죽이며 살짝 늦은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엄밀히는 수현에게 서운해하던 참이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젠 하다 하다 생일에도 연락을 씹으시겠다. ……하, 참! 나도 바쁜 몸이거든?!”
다운은 쉼 없이 구시렁대며 접시 위로 샐러드를 쌓았다. 사실, 먹을 양은 한참 전에 초과했지만 자각은 없었다.
생일은 그들이 스스로를 기념할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다.
물론, 영민한 머리 한구석으로는 네 자리의 숫자가 실은 원장이 아무렇게나 적은 조합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알았다. 하지만, 1년 중 스스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단 하루가 있다면, 그건 생일뿐이었다.
그래서 수현과 다운은 아무리 바빠도 서로가 이 엿같은 세상에 던져진 날을 격려했다. 대단한 건 필요 없다. ‘생일 축하해. 오늘 하루 잘 보내라’, 하는 문자나 전화 한 통이면 충분했다.
“통신이 잘 안 터지는 곳에 있으면 나와서라도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맨날 나만 걱정하고, 쩔쩔매고……. 지긋지긋해, 아주.”
역사 깊은 연락 문제까지 섭섭함이 번진 다운은, 전투적으로 풀때기를 씹어 댔다. 내심 ‘이제라도 문자 하면 봐준다, 김수현’ 하면서.
하지만 바빌론의 낭떠러지를 찾아온 건 오랜 친구가 아닌 다른 존재였다.
이중, 삼중의 백업이 실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는 건 물론이고 예비 전력까지 완벽하게 구비된 회색 저택의 전등이 일제히 깜박였다. 이내 저택 여기저기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억양 없는 문장이 흘러나왔다.
―점심 식사를 방해해서 유감이지만, 귀하의 협력을 요청한다.
약간 어색한 구석이 있기는 해도 어디엔가 있을 법한 비탄의 목소리와는 달리, 이번에는 퍽 노골적인 텍스트 음성 변환이었다.
반사적으로 포크의 방향을 바꿔 쥐었던 다운은, “에이 씨!” 하면서 샐러드 보울을 탕 쳤다. 나름 보안 등급을 훨씬 높였다고 생각했는데 ‘망할 AI’가 아무렇지도 않게 저택의 스피커를 쓰는 게 끔찍하게 싫었던 탓이다.
“벌써 짜증 나네. 아, 뭔데! 너도 ‘그거’냐?”
―‘그거’라는 지시 대명사는 추상적이다.
감정 없는 목소리가 무심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귀하가 사전에 습득한 정보를 기반으로 해석하면, 높은 확률로 본 운영 체제의 구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예상된다.
“그래서 넌 뭐냐고!”
―분류명은 ‘희사’. 최초의 사고를 담당한다.
입맛이 싹 사라진 다운은 고개를 저으며 휠체어를 조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했던 차니 차라리 모니터라도 들여다보고 있는 게 마음이 편할 터였다.
“내 협력이 필요하다는 건 무슨 소린데?”
―본 운영 체제는 내외부 오류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현재 51° 26′ 26.08″ N, 0° 45′ 35.27″ E 근방에서 예상되는 위험 등급을 측정한 결과, 강제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아이 씨. 뭐라는 거야!”
2층 관리실에 도달한 다운은 곧장 손짓 하나로 스크린세이버를 물렸다. 하지만 들었던 좌표를 되묻기도 전에, 희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류 상황을 송출하겠다.
‘오류 상황’?
영 일상적이지 않은 단어 조합이었다. 하지만 비탄이 멋대로 화면을 사용했던 때처럼 불만을 제기할 여유 역시 없었다. 강박적으로 모인 창문 같은 모니터들 위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김수현이었다.
다운은 온갖 CCTV와 블랙박스,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의 휴대폰 카메라 등으로 찍히는 듯한 제 친구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 쓴 수현은 어떤 여자와 함께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니, 경계가 아니라.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말보다 행동이 빠른 수현의 속내를 누구보다 빨리 눈치채는 다운이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희사가 말을 이었다.
―약 한 시간 뒤, 해당 좌표를 기점으로 다수의 폭발이 예상된다.
“뭐라고? 포, 폭발?!”
―그렇다.
어찌나 담담하게 흘러나온 대답이던지, 순간 ‘폭발’에 그 어떤 평화로운 의미가 더해졌는지 의심해야 했다. 다운은 황급히 컴퓨터를 조작해 영상이 송신되는 좌표를 추적하면서 벌써 요 며칠 몇 번이나 반복했을지 모를 전화를 다시 걸었다.
―현재 귀하의 통신 수단으로는 경고가 불가능하다.
“씨발, 씨발, 씨발……. 씹! 진짜 이게 뭐냐고!”
―본 운영 체제 중 네 번째 사고를 담당한 ‘유희’의 오류가 심화되었다. 해당 좌표에는 ‘격노’와 ‘비탄’ 역시 표류 중이나, 그들은 아직 오류 해결 프로세스를 학습하지 못했다.
희사의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여, 귀하의 인력망을 통한 인적 자원 투입을 요청한다.
정다운은 뉴욕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유희의 ‘SNS 라이브’ 방송을 모두 보았다.
얼굴이 희뿌옇게 처리되어 있었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 수현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목소리마저 이상하게 변환되어 알아들을 수 없더라도, 그 또한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저렇게 맹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이 세상에 또 있으려고.
“수현아. 씻고, 뭐 좀 먹자. 응?”
“…….”
다운은 제가 그 여름의 바다 위에서 너무 늦지 않게 수현을 찾아냈다는 것만으로도 오래 신봉해 온 무신론을 집어치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5개월이 지난 지금.
문제는 김수현 자체였다. 어떻게 붙인 숨이건만 수현은 삶을 이어 갈 의지가 전혀 없었다. 하다못해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뉴욕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경과 의사가 내린 진단 역시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었다.
실어증이 아니라, 함묵증.
한때는 언어를 옮기는 번역가를 사칭, 혹은 자칭했던 그가 말을 잃었다는 건 참 지독한 결과다. 침실 구석에 있던 라디오에서 별안간 작은 잡음이 들리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다운은 슬쩍 침실 문을 꼼꼼히 닫았는지 확인했다.
―귀하들에게 전달할 사항이 있다. 오늘, 중부 표준시 01시 46분. ‘비탄’의 활동이 포착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폰으로 속 터지는 이야기나 하던 목소리가 지지직대는 노이즈와 함께 흘러나왔다.
―위치는 서울특별시 서초구 자은로 SJ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