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76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76화
수없이 많은 편지를 보냈지만 이제껏 김수현은 한 번도 답장을 써 준 적 없었다.
물론, 애초에 그런 걸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형편이 좋을 때면 침대 위에서 밤을 보냈지만 차 안에서 구겨져 잠들거나 노숙도 예사였다. 한가하게 주소 따위를 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교한은 그 확정적인 일방 소통을 좋아했다.
낯선 타지에서 보내는 편지야말로 김수현이 늘 같은 곳에 있다는 증거 같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제 좁은 우주의 단일한 항성으로 돌아가는 날을 생각하며 버티면 됐다.
그 까맣고 열렬한 시선이 저를 바라볼 것을 상상하면서.
“……후우.”
고작 봉투 안에서 곱게 접힌 종잇조각들을 꺼내는 일이 이렇게나 입을 바짝 마르게 할 줄은 몰랐다. 새하얀 편지지는 꼼꼼한 성격답게 비틀어진 곳 하나 없이 두 번 접혔다.
교한은 제 손이 옅게 떨린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로 그걸 천천히 펼쳤다.
마치 영어 필기체를 쓰듯 살짝 기울여 적은 독특한 형태. 못 알아볼 수 없는 연인의 글씨였다.
퇴근하는 너를 기다리면서 서점에서 처음으로 책이 아니라 편지지를 샀어. 처음에는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어려울 것 같았는데, 만년필을 사용할 거라고 하니까 종류가 확 줄었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낡고 오래된 것들을 좋아하던 연인은 대체로 연필을 손수 깎아 썼다.
하지만, 때로 흑연을 사용하기 어려운 글을 남길 때면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색의 농담이 선명한 남색 잉크가 물결처럼 이어졌다.
전형적인 문장으로 시작하자. 네가 이걸 발견했다는 건, 내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일 거야. 짧은 여행이든 외출이든…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일에서. 너는 내 친인척의 연락처를 뭐든 찾으려고 했을 테고, 이 편지도 아마 그렇게 발견하지 않았을까.
아니, 자기야. 우리는 그것보다 훨씬 극적이었지.
교한은 속으로나마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달콤한 동행은 이어진 문단을 읽는 순간 곧장 깨져 버렸다.
사람은 자기만 읽고 쓰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한대.
하지만 이번만큼은 마지막 문장까지 솔직해지려고. 유서마저 거짓말로 채우는 사람이 되는 건 내키지 않으니까.
다음 문장을 읽어 버리기 전에 편지를 얼른 내린 건, 이미 충분히 버거워서다.
교한은 편지지 몇 장을 심장께에 댄 채로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이 얼굴을 할퀴도록 했다. 온몸으로 어찌나 열이 올랐는지 춥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애인한테 쓰는 첫 편지가 유서인 사람은 세상에 김수현뿐일 거다.
“진짜…… 너무하네, 김수현.”
교한은 들을 사람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편지를― 아니 유서를 읽는 데는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다짐이 필요했다. 차마 읽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생각지도 못한 채, 한동안 망설이던 그는 이내 다시 천천히 흰 종이를 시야 안에 뒀다.
왜 돌아오지 못하는 걸 전제로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그걸 설명하지는 않을게. 그건 편지 몇 장에 담기 어려운 일이야. 무엇보다 나는, 이기적이게도 네가 날 나쁜 사람으로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그러니까 여기엔 너에게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적으려고 해.
아마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교한 널 만나기 전까지는 잠을 잘 못 잤어. 하루에 단 세 시간이라도 이어 자면 그날은 성공이라고 자축했을 만큼.
“…….”
김수현은 제 유서에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글쎄. 교한은 제가 읽은 문단에서 쉽게 전진하지 못하며 진위를 의심했다. 만약 이것을 비탄이 보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들이 아는 김수현은 아주 잠이 많았다.
걸핏하면 ‘자다 깼어’라고 답장했고, 퇴근하고 돌아온 집에서 책을 안고 잠든 모습을 만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고작 세 시간을 이어 자는 것조차 힘들었다니. 5년을 같이 지내면서 그조차 몰랐던 애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어진 문장을 읽은 순간엔, 차라리 제가 그렇게나 둔감한 남자인 게 나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예전에 어떤 일을 겪었고… 아니. 저질렀고.
반듯하던 수현의 글씨가 처음으로 삐끗했다.
그 이후로 눈을 감으면 자꾸 누군가 꿈에 나왔어. 나를 이름 대신 벌레라고 부르는 사람이. 매번 거기서 도망치려고 칼을 휘두르지만, 결국 끝은 항상 같아. 찌그러지고 녹슨 양동이를 머리에 쓴 채로 천천히 숨이 막히다가, 도저히 못 견딜 때쯤이 되어서야 눈을 떠.
하지만 이제 나는 그 꿈을 꾸지 않아.
대신 혼자 있는 게 무서워진 거 같아.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야.
이교한은 제 연인이 여기까지 쓰고 나서 아주 오랫동안 펜을 들지 못했음을 확신했다.
휘갈기듯 획이 진하고 날카로워졌던 필체와 다음 문단의 글씨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마치 폭풍 친 마음을 달래고 돌아와 이은 것처럼.
하지만 그 잔해를 읽는 교한은 잠시도 숨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망망대해에서 길 잃은 남루한 배의 하나뿐인 선원이자 선장이다. 최후에는 검은 바다에 삼켜질 걸 알면서도 바닥없는 심해와 눈을 마주쳐야 한다.
조금 전 너와 전화 통화를 했어. 넌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의 한 호텔에서 보름달을 올려다보고 있다고 했지. 길거리의 노점상에서 작은 탁상시계도 샀대. 믿거나 말거나지만, 우리의 나이를 더한 것보다도 오래된 것으로. 선물을 들고 돌아갈 테니까 씩씩하게 기다리라고 했어.
교한은 제대로 회전하지 않는 머리로나마 시기를 추측했다.
막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다.
저는 함께 침대에서 눈을 뜨는 매일에 마냥 즐거워하고 있을 때, 수현은 이걸 썼다. 자신의 죽음을 상정한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를.
그걸 깨닫자 요동치는 심장을 뜯어내 씹어 삼키고 싶어졌다.
이교한.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모든 순간이 좋아.
하지만 미안한 게 있다면 너는 나한테 깊은 밤도, 이름도 돌려주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반대는 떠오르질 않는다는 거야. 네가 이걸 발견했을 때쯤엔 나도 너에게 뭔가를 주었을까… 그래야 할 텐데.
“……아.”
저도 모르게 새어나간 쉰 목소리가 낯설었다.
분명 제 성대에서 만들어 낸 것인데도 살며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 이상한 소리는 어떻게 참거나 막을 수도 없었다. 한번 터져 나온 뒤부터는 숨을 멋대로 가지고 놀았을 뿐이다.
너에게 돌아가지는 못했지만, 교한아. 나는 분명 마지막까지 너와 같이 있고 싶었어.
내 결말을 알지 못하는 지금도 그것만은 확신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서운해 하지는 말아줄래. 차라리 배신감에 화를 내거나 마음껏 싫어해도 좋아. 그걸로 네가 괜찮아진다면.
낯선 번호로 연락이 올 거야. 아마 내 사후 정리를 맡아줄 친구일 텐데 괜찮다면 전화를 받아 줘.
뺨 위로 마음의 부산물이 흐르는 감촉이 시리고 생경했다.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 것 역시, 답답했다. 교한은 헐떡대면서도 자꾸만 흐려지는 마지막 문장을 눈에 새겨 박았다.
다시 읽어보니, 나는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나 했어. 이것도 미안해.
잘게 부서진 호흡만큼 쪼개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어이 유서에까지 거짓말을 적은 제 연인이 사과한 구절을 찾는 건 터무니없이 쉬운 일이었다. ‘마음껏 싫어해도 좋아’ 터무니없이 사랑을 좋아하는 남자가 이런 걸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지. 교한은 종잇조각을 안은 채로 울고, 또 웃었다.
사이코패스를 절망하게 하다니. 형은,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당사자에게는 닿지 않을 질문 앞에서 이교한의 배는 난파됐다.
그는 검은 바다 아래로 침몰하는 동안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이유 역시 두 개나 더 찾았다.
저 때문에 혼자 있는 걸 두려워하게 됐다는 남자를 혼자 죽도록 내버려 뒀다. 김수현은 마지막까지 거듭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말해 줬는데. 언제나 잘 흉내 냈던 문장을 하필 그 순간에만 되돌려주지 못했다.
이제는 형이 나를 보던 눈빛을 이해하는데.
지금은 나도 내 목소리와 언어로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데…….
어둡게 변한 교한의 시선이 방울진 자국이 남은 편지지 위로 머물렀다. 그는 조금 전 ‘다 긁어모아도 고작 15%밖에 안 되던 마음’을 모두 흘려 냈다. 빈자리에 밀려든 건 제 사랑을 목 조른 바닷물뿐이다. 창백하게 질린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부표 없는 어둠 속에서 지금 막 나아갈 항로가 정해졌다.
그는 김수현을 홀로 떠나게 한 모든 것들에게 아주 길고, 끔찍한 밤을 줄 거다. 제가 추락한 심해보다 시린.
스스로 목소리를 낸 건, 연인의 유서를 몇 번이나 다시 읽은 다음의 일이었다.
“……정다운.”
짤막하게 튀어나온 이름은 연금술사의 유산조차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여, 돌아온 대답 역시 이례적으로 제가 들은 것을 의심하듯 자신 없었다.
―……네?
“정다운. 김수현의 친구, 정다운. 그 사람은, 어디서 뭘 하고 있어?”
한때 두 사람의 온기로 충만했던 집 안은 열린 창을 통해 부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로만 가득 찼다. 다행히 비탄은 오래 시간을 끌지 않고 돌아왔다.
―이상한 일이네요. 통신 회선이…… 사라졌어요.
“찾아봐.”
―…….
“전화가 오지 않았어.”
전화는, 안 왔어…….
마지막에 속삭이듯 덧붙인 문장은 꽁꽁 얼어붙은 땅을 긁는 것처럼 쉬고 갈라진 채였다.
이교한은 그 뒤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작은 상자에서 차마 손도 대지 못했던 작은 선인장과 단검을 꺼냈다. 열어 둔 창문 역시 모두 닫았다. 하늘을 향해 손 뻗은 식물이 죽지 않도록.
제 사랑은 기뻐하겠지만, 실은 그가 있는 곳과 한 발짝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