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75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75화
이교한이 백우의 사람을 만난 건 ‘그 날’ 이후 지금이 처음이었다.
내내 찾아왔던 건 슈트나 군복을 입은 낯선 사람들뿐. 무표정한 이방인들은 교한을 정말 불의의 사고를 대한 군인으로 대했다. 당연히 백우라는 단체는 지난 인생 어디에도 없었던 것처럼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고.
소위, 유사시에는 어떤 것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걸 맛보기로나마 확인한 셈이었다.
“……뭐. 서류상으로는 변함없어. 그냥, 휴직 처리를 해 뒀을 뿐.”
신 부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턱을 몇 번 쓴 다음, 씁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과는 못 해. 조직이 외부로 노출되지 않았는지 지켜볼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4개월 동안?”
교한은 적대감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으르렁대듯 물었다.
“8월 12일, 그날부터 내내 지켜본 소감은 어떤가요.”
“…….”
“대단한 조직은 여전히 안녕한가요? 왜, 종로에 있던 건물로 찾아가 보니까 텅 비었던데. 망할 ‘나래 아트센터’는 폐업했다 하고, 휴대폰에 있던 어떤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도 모두 없는 번호던데요.”
성태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하루아침에 모두 증발한 연락처 중에는 허성태 그의 것도 있던 탓이다. 영국의 한 병원에서 눈을 뜬 이후부터 교한은 직책이 무색하게 특수2팀 누구의 안부 인사도 듣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신 부장은 누구보다 그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때문에 자신의 부하 직원을 언제나처럼 노련하게 대하지 못했다.
“……조직의 내부망 어디에 구멍이 난 건지 알기 어려운 상황이었어. 모든 기반을 버리고 이주한 것 역시, 그래서―”
“그래서, 구멍은 찾으셨나?”
“…….”
“분명히 못 찾았을 거야. 이제야 날 찾아온 건, 갈피를 잡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일 거고.”
아니라는 말을 하기엔 이교한은 너무나 유능한 부품이었다.
자신이 속했던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신과 마찬가지인 부품들을 어떻게 대하고 사용하는지 훤히 알았다. 신 부장은 차마 말을 받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간신히, 그답지 않은 어조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팀장은…… 여전히 특수2팀 소속이야.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도 좋아.”
나름대로는 힘겹게 표현을 고른 것이었겠으나, 그건 이교한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데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교한을 근 몇 달간 처음으로 웃게 했다.
교한은 쓰지 않은 지 오래되어 뻣뻣한 얼굴 근육을 일그러트리며 소리 내 키득거렸다. 끝내는 숨을 작게 헐떡이기까지 하는 웃음은 그렇지 않아도 스산한 집 안의 온도를 더욱 떨어트렸다.
질문이야 이미 수없이 했다.
처음엔 눈을 뜬 희멀건 병실 안에서. 그다음은 저를 비행기로 옮기던 사람에게. 한국에서 만난 정복 차림의 사람들에게…….
눈이 마주친 사람들을 붙잡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횟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형은요?
김수현은요?
그 사람은요?
어떻게 됐나요?
죽었나요?
살았나요?
시신이라도 발견했나요?
손가락 하나, 내가 부러트린 뼛조각 하나라도 좋아. 그러니까 제발, 그 사람에 대해 뭐라도 말해 줘. 갈라진 목소리로 묻고,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냉담한 시선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
“재밌는 소릴 하시네.”
이교한이 답을 들은 건 한국으로 돌아와 제 가족들을 만난 다음이었다.
정확히는 동생이 병실에 휴대폰을 두고 잠시 물을 뜨러 간 사이, 허공을 향해 입을 열었을 때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절대로 도움을 구하고 싶지 않았던 것에게, ‘형은 어디 있어?’라고 기어이 물음을 토해 낸 순간에야.
‘정말로……, 미안해요. 김수현 씨의 생존 징후를 찾을 수 없어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처음 사과해 준 것의 이름이 비탄인 건 기묘한 위로가 됐다. 인간에게도 얻지 못하는 마음을, 제 노력을 짓밟은 파편에게서 얻다니. 모순됐다는 걸 알지만 그 덕분에 버틴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백우가 파악하고 있는 현황 정도는 곧장 손에 들어왔다.
심지어 백우가 비밀리에 이전한 본부의 위치조차도. 그러니 한낱 ‘정보’ 따위를 앞장세워 말하는 꼴이 우스울 수밖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왔나 했더니. 나가세요.”
“이 팀장. 아니, ―후우, 교한아.”
“꺼지라고. 신형철!”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는 건 그의 옆에 딸려 온 허성태와 박혜리였다.
신 부장은 할 말이 겹겹이 쌓인 듯한 표정으로 제 부하 직원을 바라보다가, 이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닥에 놓인 상자들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여기서 가져갔던 물건들이다.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짧은 현관 복도를 다 건너 들어오지 못한 백우의 세 사람은 곧장 축객으로 쫓겨났다. 교한은 부러 그들이 현관 문턱을 막 넘음과 동시에 두꺼운 철문을 세게 소리 내어 닫았다.
참 오랫동안 제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이토록 선명하게 심장이 맥동하는 걸 보니 역시 숨이 붙어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괜찮나요?
비탄이 작게 물었다.
교한은 대답하는 것 대신 얼음처럼 차가운 현관문에 기대어 한동안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가까스로 들끓는 속을 달래고 나자 황량한 집 안에 남은 건 그와 겨자색 상자 더미뿐이었다.
김수현과 함께 지내던 이곳의 물건들이 아니었다면, 손조차 대지 않고 내던졌을 텐데.
상자 안을 투시라도 하듯 노려보던 교한은 천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큰 것 두 개와 작은 것 하나. 개중 먼저 고른 건 제일 아담한 쪽이었다.
잠시 뒤, 짧고 날카로운 들숨이 이어졌다.
“…….”
얼핏 정사각형 무덤처럼도 보이는 상자 속에 있는 건 바보 같은 모자를 쓴 선인장과 작은 단검이었다.
교한은 이번엔 둘 중 어느 것에도 먼저 손을 뻗지 못한 채 한참이나 내려다보기만 했다. 제가 그렸던 가장 행복한 미래와 그것을 피 흘리게 했던 존재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작은 상자 속 물건들을 모르는 척 그 옆의 큰 상자 뚜껑을 연 건, 스스로 생각해도 비루한 도망이었다.
하지만 그건 마냥 나쁜 선택만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제가 수현에게 보냈던 편지들이다.
심지어 거기에는 하나하나 숫자 태그까지 붙어 있기까지 했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구긴 교한은, 그걸 곧장 꺼내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을 탔을지 모를 흔적을 하나씩 떼어 냈다.
작은 상자 속 물건들은 차마 만지지도 못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대. 거기에 들어 있는 건 뭐야?
호기심 어린 격노의 물음이 곧장 뒤따랐다.
“알 바 아니잖아.”
―하지만 궁금해. 나도 보여 줘. 여긴 김수현과 그대가 살았던 곳이라고 했잖아. 그럼 그건, 김수현의 물건들이야?
재잘재잘 따라오는 질문에 더 대답하고 싶지도 않아졌다.
교한은 제가 가장 처음 보냈던 연보라색 편지 봉투의 낡은 귀퉁이를 쓸다가, 이내 상자 한쪽에 있던 꽤 큼직한 가방을 발견했다.
처음 보는 물건이다.
하지만 색과 재질은 꽤 익숙했는데, 웬만한 개인 물품을 별 고민 없이 검정으로 사던 누군가의 취향과 방검 원단 특유의 빳빳함 때문이었다.
직전에 들은 격노의 물음이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됐다.
덕분에 꽤 묵직한 그걸 잡아 올리는 순간, 심장이 다시금 빨리 뛰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 있는 건 처음 보는 총과 나이프, 현금. 그리고 온갖 종류의 신분증들이었다.
……이런 걸 집에 두면서도 안 들키고, 대단하네. 우리 형은.
저도 모르게 순수한 탄사가 흘러나왔다.
국적이 각기 다른 여권 다섯 개와, 미국 8개 주의 운전 면허증에는 하나같이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한은 그 안에 담긴 수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엄지손가락 끝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쓸었다.
작은 사진 속 뺨은 따뜻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같이 사진도, 영상도 많이 찍었어야 했는데. 여느 연인들처럼 사소한 것들을 모두 카메라에 담지는 못할망정 왜 같이 있는 것 정도로 충분하다 여겼을까.
남은 게 위조 신분증 속 얼굴뿐이라니. 한심함에 새삼스레 스스로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교한은 그만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생각을 하며 한참이나 작은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가방의 가장 밑바닥에 있던 걸 발견할 수 있기도 했다.
“…….”
밤하늘 같은 짙은 남색 편지 봉투.
자신이 골랐던 편지지를 모두 기억하는 교한은, 이내 그것이 제가 보낸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며 전신의 근육의 팽팽해졌다.
교한은 손가락이 닿는 것만으로도 파스스 부서지는 드라이플라워를 만지듯, 가벼운 편지지를 조심스럽게 잡아 들었다.
#01.
첫 번째 증거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