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73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73화
“……비켜.”
“설마 저딴 말에 휘둘릴 거 아니지.”
그 순간 습관처럼 입술 끝을 말아 올린 건 제 이 얼굴을 김수현이 가장 좋아해서였다. 제일 예뻐했던 모습으로 웃으면, 그러면. 조금이라도 저를 돌아봐 줄 것 같아서.
하지만 돌아온 건 의미를 묻고 싶지 않은 심호흡이었다.
“여전히 단순한 산수잖아, 이교한.”
백 명, 아니 만 명이 있어도 곧장 찾아낼 수 있는 목소리가 뜨겁게 고동치는 귀를 할퀴고 지나갔다. 단순한 산수. 분명 일전에 뉴욕에서도 들었던 표현이다. 새파란 지붕과 아담한 마당이 있는 집에서.
‘형을 거기에 내버려 둬야 했다는 소리야?’
‘단순한 산수야. 2를 잃느니, 1로 끝나는 게 낫잖아. 그게 어려워?’
‘그럼 나는 이제 단순한 산수는커녕 셈조차 못 하나 보네. 1 다음은 영 챙기기가 싫은 거 보니까.’
아. 역시 저 모자를 벗겼어야 했어. 교한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내 대답은 그대로인데. 형은 어때?”
“마찬가지야.”
이교한은 어쩌면 언제나 현장에서 혼자 움직이던 김수현의 ‘실질적인 능력’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오랜 시간 일을 중개했던 여사나 든든히 뒤를 지켜 주는 다운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김수현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을 함께 보았을 때 더 흠잡을 데 없다는 것을 시애틀의 호텔에서 몸소 체험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그 정보에 한 가지 더하자면.
“하아, 후……. 인정할게. ―형도 정말 나 봐줬던 거 맞네.”
“이교한, 시간 없다고!”
말 그대로 붕 떠올라 부서진 잔해에 처박혔던 교한은, 한 손에는 가방을, 또 다른 손에는 요트의 열쇠를 쥐고 떠나려던 수현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걸 비틀어 꺾어 버리려던 순간, 곧장 역으로 팔이 제압당했다.
“하, 아야. 아픈데?”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에 수현이 잠시 멈칫했다.
얼굴을 가리던 모자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인 터라, 짙은 눈썹이 움찔하는 순간을 생생히 잡아 낼 수 있었다. 교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어이 수현을 제가 쓰러진 건물 잔해 위로 집어 던졌다.
“씹…….”
“형이, 나 먼저 때렸잖아. 아파도 참아.”
분명 충격이 상당했을 텐데도, 수현은 짤막하게 욕을 삼킨 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그대로 기절이라도 하지.
교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실은 발목을 곧장 부러트리는 게 맞았을지도 모르지만― 수현이 제 약한 소리에 멈칫했듯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키라고 했어.”
“싫어.”
아니, 사실 이교한은 이제껏 살며 단 한 번도 이런 전투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죽이려는 것도, 신체 일부를 박살 내 버리려는 것도 아닌 온전히 지키기 위한 싸움이라니.
목을 비틀 수도, 허리춤의 총을 꺼내 쏠 수도 없다.
이건 지극히 실전에 가까운 대련이다. 걷어차고, 주먹을 날리고, 또 다시 반대로 역공을 당하며 온몸이 너덜너덜해진다. 단 하나 연습과 다른 게 있다면 심판 따위 없이 상대가 먼저 나가떨어지기만을 고대해야 한다는 것 정도일까.
근 5년을 사귀면서 설거지 한 번 하게 한 적 없던 애인이다.
그런 남자를 무너진 건물 잔해로 내던지는 이유가 외려 상대를 위해서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찾으면―, 되잖아, 같이 살아 나갈 방법을!”
“30분 동안? 난 그딴 도박 못 해. 안 해!”
김수현의 외침엔 생략된 단서가 있었다. ‘네 목숨을 걸고’.
물론 이교한 역시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못 찾으면, 같이 죽으면 그만이고’. 두 사람은 함께한 시간만큼 서로가 남긴 빈칸을 너무나 잘 채웠다.
그 틈을 끼어든 건 내내 잠잠하던 유희였다.
―아니죠, 이제. 20분입니다.
검은 눈동자 위로 이름 모를 안개가 낀 건 그때였다. 교한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만은 알아볼 수 있던 빛이 흐려져서다.
하지만 덕분에 직감할 수 있었던 건, 5년간 제 연인이었던 남자가 무언가를 기어코 결심했다는 거였다. 홀로 죽는 것, 그다음에야 간신히 마음먹을 수 있는 최악의 선택지를.
김수현은 그 사실이 이교한을 얼마나 두렵게 했는지 모를 거다. 어쩌면 이교한 자신조차도 제가 겁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까.
저를 무너진 벽으로 재차 걷어차려던 것을 피한 다음 외려 팔을 붙잡은 건 그래서였다. 그가 택할 가장 나쁜 것이 상상도 되지 않아서.
“…….”
누군가의 뼈를 부러트리며 눈을 질끈 감은 건 처음이었다.
이제껏 타인의 머리 정중앙에 수없이 많은 구멍을 내면서도 안색조차 변하지 않았던 것이 무색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제가 저지른 짓을 견딜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김수현을, 형을 다치게 하다니.
뼈를 부러트린 사람과 부러진 사람의 반응은 서로 같았다.
그저 잠깐 날 선 숨을 들이마셨다가 토해 내는 것.
욕이라도 해. 아프다고, 말 한 마디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교한은 꿈쩍도 하지 않는 수현의 몸을 가까이 안아 붙인 채로 초조하게 생각했다. 간신히 숨소리만 내던 수현의 입이 열린 건, 잠시 뒤였다.
“―사랑해.”
태어나 처음으로 듣기 좋다 생각했던 목소리로 내내 목말랐던 단어를 들은 건 망상과 소망의 합작이었을까?
교한은 원망도, 비난도 아닌 그 짤막한 단어를 믿을 수 없어서 제게 기대 안긴 남자의 얼굴을 한발 늦게 살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고백이, 가장 바랐던 말이― 낮은 목소리에 감겨 거듭 흘러나왔다.
“이교한. 알고 있지?”
“……뭘?”
“사랑해. 다른 건, 사랑해 본 적 없어. 그러니까 제발―”
“…….”
“제발……. 움직이지 마. 응?”
이교한은 그제야 깨달았다.
기대 안겨 있던 건, 수현이 아니라 제 쪽이었다.
오른쪽 복부에서부터 시작된 뜨거운 감각을 자각하고 나자 곧장 움직임이 불편해졌다. 그건 살면서 처음 느껴 보는 종류의 고통이기도 했다. 누군가 이쪽을 보며 높은 소리를 질렀고, 여진조차도 무어라 외쳐 댔다.
하지만 교한은 제게 꽂힌 작은 단검을 내려다보지도, 경악한 시선들을 마주 보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헷갈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현은 사랑을 고백하는 내내 잘게 떨었다.
찔린 건 제 쪽인데, 꼭 죽을 것 같은 건 그였다. 하긴. 손바닥에 난 작은 상처에도 창백하게 변해선 소리치던 사람인데. 이를 세게 악문 턱에서부터 뺨까지 가볍게 어루만지자 그가 아끼는 검은 하늘에서 빗줄기 하나가 기어이 툭 떨어졌다.
“……그럼 안, 가면, 되잖아.”
“…….”
“응? 수현 형. 자기야. 나만 두고, 가지 마.”
수현이 다시 한번 날 선 숨을 삼켰다.
이내 이마 위로 닿은 건 눈을 감고도 형태를 상상할 수 있는 입술이었다.
그 순간 온갖 총탄이 빗발치는 건물 뒤에서 키스하던 영화 속 연인들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무너지는 건물 뒤에 숨어 입 맞추면서 사랑을 말하던 그들과, 영화를 보며 눈을 반짝이던 수현이 기억과 현실 속에서 멋대로 교차했다.
김수현 역시 영화 속 연인들과 마찬가지였다.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이번에는 바꾸어 말한 시제다. ‘사랑했어.’
수현을 움켜쥐려던 손에서 힘이 빠진 건, 저를 조심스럽게 땅에 눕힌 남자가 한 팔만을 간신히 운신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남은 폭탄이 든 가방과 요트의 열쇠를 챙긴 수현은 지독하리만큼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표정을 상상할 수는 있었다. 김수현이 지난 5년 동안 제게만 허락한 얼굴들 덕분이었다.
실은 뒷모습이나마 끝까지 보고 싶었다.
유독 붉게 타오르는 노을 때문인지 자꾸 시야가 부옇게 흐려졌다. 회갈색 땅 밑에서 손이 뻗어져 나와 몸을 휘감는 것 같기도 했다.
―나의 친구. 저 남자와 그리는 미래가 당신을 즐겁게 했나요?
각양각색의 스피커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물음이 수십 개의 칼날처럼 의식을 파고들었다. 이교한은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꿰뚫린 채 숨을 헐떡였다.
―보세요. 당신이 꿈꾸던 욕망의 실체를요. 행복이란 이토록 연약한 허상입니다. 특히 타인에게 기대는 미래란…… 그저 공허할 뿐이지요.
그랬나?
하지만, 김수현은 제가 어떤 것을 상상했었는지 듣고 싶다고 했었다.
기껏해야 선인장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었던 그와 나의 내일을 듣고 칭찬도 해 줬고, 오래된 집에서 함께 사는 순간을 입에 담으며 장난도 쳤었는데…….
―하지만, 나의 친구. 이제 당신은 온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이 땅엔 더는 당신을 얽맬 허울도, 욕망도 없어요. 아! 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교한이 정신을 놓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마음 없는 존재의 축하와 필요한 건 사랑뿐이라고 울부짖는 노랫말, 그리고 저를 ‘이 팀장’이라고 부르는 목소리였다.
D-DAY라는 단어가 처음 쓰였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공식 명칭은 해왕성 작전Operation Neptune이다. 태양과는 가장 멀리 떨어진 외로운 얼음별이 하필 김수현의 D-DAY를 명명하는 날임은, 꽤 얄궂은 우연일 것이다.
새하얀 요트는 밤하늘을 닮은 바다를 망설임 없이 갈랐다.
노을이 번진 하늘은 어찌 보면 검푸른 대양 위로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 한 사람만을 싣고 그 가운데로 쉼 없이 나아가던 요트는, 이내 저만치 아주 작아졌을 때 아무도 듣지 못할 비명을 지르며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