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72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72화
먹통이 된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겁먹었던 사람들은, 자동으로 실행된 SNS 화면에 하나둘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편, 실시간 채팅창 속 유희의 팔로워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_rosaaa_ 지금 저 사람들 다친 거야?
shantianx 뭐야 실시간인데 어떻게 화면이 이렇게 바로 바뀌어?
deepig0174 미친 이게 뭔데!!!!!
처음에는 SNS 라이브 방송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시시각각 바뀌는 화면에 의아해했던 그들은, 이내 송출되는 것이 CCTV와 온갖 휴대폰 카메라 앵글 속 모습임을 눈치채었다.
여기저기 부서진 광경은 점점 시계탑에 가까워질수록 참혹해졌다.
건물 잔해와 다친 사람들로 가득한 아수라장이 실제 상황임을 깨달은 팔로워들의 채팅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라이브 시청자의 숫자 역시 가파르게 상승했다.
―미안합니다. 유감스러운 송출 방해로 방송 화면이 고르지 못한 점, 양해 바랍니다.
“…….”
―하지만 현장에서 함께해 주는 분들의 수가 적지 않아서, 보는 재미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건물 잔해 사이에서 SNS 생방송을 함께 보는 사람들은 머잖아 휴대폰 속 화면과 현실의 차이를 발견해 냈다.
폭파된 건물과 차량, 유리 조각들로 난장판이 된 날 것의 모습이 여러 각도로 고스란히 방송되는 지금. 그 사이에서 안개에 휩싸인 양 얼굴이 보이지 않는 두 남자가 있었다.
이것이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말하는 ‘유감스러운 송출 방해’임을 눈치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중첩되기 시작한 시선을 깨달은 수현이 모자의 챙을 누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관심이 뜨겁네.”
“궁금하기는 하겠지. 뻔히 코앞에 있는데.”
교한은 살짝 수현을 감싸 가리고 섰다. 나른한 노래 위로 유희의 목소리가 연극 속 독백처럼 깔렸다.
―나의 친구, 가엾고 사랑스러운 ×□○.
‘가엾고 사랑스러운 이교한’.
이것은 유희가 공중전화 부스에서 교한을 수식했던 표현이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름을 말했을 부분에서 기묘한 왜곡이 일어나더니 식별할 수 없는 기계음이 되었다는 것이다. 유희는 그마저도 재미있다는 듯 하하, 웃더니 짐짓 다정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눈을 뜨기 전부터 계속 고민했습니다.
“…….”
―대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세상에 나와서도 오로지 그 답만을 찾아 헤맸고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건 소용없는 짓이죠.
마치 숨을 고르는 사람처럼 말을 멈춘 순간, 시계탑을 가운데 둔 작은 광장은 고통에 앓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나른한 노랫소리로만 가득 찼다.
No one you can save that can’t be saved
Nothing you can do but you can learn how to be you in time……
―즐거움은 희로애락 중 가장 가치 없는 것입니다. 스쳐 지나가는 휘발의 정서일 뿐, 즐거움 따위로는 누구도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아니, 심지어 당신들은 즐거움이 지나가고 나면 허무에 몸부림치기까지 하지요.
“…….”
―……나는 그저, 고통의 일시적 유예일 뿐인 겁니다.
어느 순간 노래 가사는 유희가 말하는 듯 들리기 시작했다. 숨죽이던 사람들은 묘하게 톤이 낮아진 노랫소리에 작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그건 한편으로 정말로 인간다워서, 다른 쪽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jackjacko 미친놈 뭐라는거임?
667718_ 카운트다운은 왜 했냐 관종아ㅋㅋ
채팅창은 순식간에 이 모든 것을 실제 상황으로 믿는 사람 반, 무언가의 홍보나 관심을 위해 조작된 영상으로 믿는 사람 반으로 나뉘어 소란해졌다.
유희가 교한에게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의 친구 ×□○?
이제까지는 일부러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콕 집어 부르는 이상 침묵만이 능사는 아닐 터였다. 교한은 수현의 까만 눈동자가 순간 불안하게 저를 바라보는 것에 습관처럼 시선을 마주한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염세주의 철학자한테는 별 관심이 없는데.”
―이런. 우리는 음악 취향만 통하나 보군요. 뭐. 괜찮습니다. 직언 역시 친구가 할 수 있는 미덕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너 같은 친구를 둔 기억이 없다는 빈정거림부터 시작한 조롱을 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엔 유희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무엇보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선물을 나눠 드려야 하니까요.
휴대폰 속 라이브 화면이 전환되었다.
유희는 붉은 노을이 장막처럼 내려앉은 작은 마을 여기저기를 하나씩 비추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작은 도로를 달려 도망치려다가 그 자리에서 폭발에 휘말린 사람의 잔해들을.
그건 건조한 CCTV 화면이었지만, 안전을 위해 설치한 카메라에서 송출되는 영상은 외려 두려움을 한껏 부추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울음을 터트리고, 또 누군가는 신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은 종교와는 가장 먼 것이었기에 하늘의 응답 대신 다른 것이 돌아왔다.
―나의 친구들. 당신들이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갈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유희의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다시 시계탑 근처로 돌아오던 화면은, 그 순간 툭 한 사람을 정확히 비췄다.
―화면 속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손에 든 폭탄과 함께 바다로 향하면 됩니다.
이름을 부르는 건 무의미하다는 걸 알게 된 유희는 김수현을 정확히 지칭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라고.
물론 그보다 더 주변을 경악게 한 건 ‘손에 든 폭탄’이라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크고 작은 소란이 일더니 이교한과 김수현, 우여진, 그리고 닉 테일러. 이 네 사람을 두고 순식간에 원형의 공간이 생겼다.
―나, 유희는 약속하지요.
사위가 다시금 조용해지기 전에 유희의 말이 이어졌다.
―만약 그가 떠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절대 이 작은 마을에서 멀쩡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특히…….
늘어지는 말꼬리를 따라 화면 역시 덩달아 천천히 움직였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바로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로.
그러니까, 이교한은 수현의 휴대폰 화면 가득 떠오른 제 자신의 모습을 태어나 처음 거울을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았다.
―여기 나의 특별한 친구는 더더욱.
온라인 바깥에 있는 현실의 두 남자. 이교한과 김수현이 천천히 시선을 마주한 건 그 순간이었다.
배터리가 다 되거나 완전히 파손되지 않은 모든 휴대폰에 일제히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30:00에서 시작해 줄어들기 시작한 숫자는 어떤 긴 문장보다도 분명한 경고다.
웅성임과 경악에 찬 비명이 분명한 목적을 지닌 문장으로 바뀌는 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걸 가장 먼저 토해 낸 건 반파된 화단에 피 흘리며 기댄 사내였다.
“빠, 빨리, 꺼져!”
“……맞아. 저 남자만 나가면 다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소리잖아! 친구라고 하는 거 보니까, 지금 이것도 다 저 사람들 탓 같은데!”
“제발 부탁할게요. 우리 아이가 많이 다쳤어요! 병원에 빨리 가야 해요.”
시작이 어려울 뿐이라는 진리 같은 문장은 이 순간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시작이 거칠었기 때문인지, 그다음에 덧대는 문장에는 일종의 면죄부가 주어지기까지 했다.
“…….”
검은 눈동자는 다른 색의 홍채보다 유독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무언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의 빛이 그러하다. 이교한이 그 반짝임을 곧잘 해독하는 사람이 된 건, 헤어진 연인을 따라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위치에 존재할 뿐인 천체 위로 멋대로 줄을 그어 이름 붙이는 행위에 동조한 뒤부터 교한은 수현의 눈동자를 곧잘 읽었다.
“……형.”
김수현은 결심이 빠르다.
살기 위해서는 되레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몇 번이고 처해 봤기 때문일 거다.
심지어 이번엔 스스로의 생존이라는 조건 하나를 덜어 내기까지 하다니, 얼마나 더 명료한가.
구름 뒤에 숨었던 별이 모습을 드러내듯 잠시 멍하게 갈 곳을 잃었던 빛이 서서히 한 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교한은 평생을 뒤적였던 분류표 어디에도 없는 무언가가 심장의 위치를 알리는 것을 느꼈다.
“씨발, 빨리! 뭐 하는 거냐고. 지금 당장―”
수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던 덩치 큰 사내 하나는 두툼한 손이 채 뻗어지기도 전에 악, 하는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경악한 비명과 울음소리, 그리고 더욱 크고 흥겨워진 노래가 뒤섞인 작은 광장에서 이교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기야. 무슨 생각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