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71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71화
수현은 개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케이스 안에 있는 건 멀리서 보면 골프공 정도로 착각하기 쉬운 불투명한 흰색 구체였다. 한 케이스당 들어가는 구체는 열 개. 확인한 것에만 빠진 이가 네 개였고, 남은 케이스들은 보지 않아도 텅 비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별안간 확성기라도 댄 것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너, 대체 이거 어디서 났어?!”
순식간에 마른 열다섯 아이의 멱살을 번쩍 들어 올린 여진은, 뭐라 막을 새도 없는 외침을 이어 갔다.
“미친 새끼야! 이게 뭔지는 알아?! 이거 나머지 어디에 있어, 당장 말해.”
“으, 우왓!”
광장이라고 하기도 뭐한 작은 마을의 시계탑 주변의 이목이 순간 기묘한 조합을 향해 쏠렸다.
후텁지근한 계절과도, 해안과 맞닿은 마을과도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의 칙칙한 10대와, 그 곁에서 떠나가라 소리치는 체격 좋은 여자.
거기에 모자를 푹 눌러 쓰기는 했지만 마찬가지로 심상찮은 몸을 자랑하는 남자까지. 수현은 더 큰 소란이 일기 전에 그들을 도로 한복판에서 광장 방향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각양각색의 조합에 호기심을 느낀 몇 명인가가 휴대폰을 들어 그들을 몰래 화각에 담기 시작했다.
그걸 눈치챈 수현은 몸에 밴 습관처럼 그들을 등졌다. 와중에 다행스러운 건 잠시 뒤 휴대폰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뭐야. 왜 이래. 고장 났나?” 하고 의아해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거다.
……CCTV에 얼굴이 흐릿하게 찍히고, 말소리조차 왜곡되어 들린다고 했던가.
시애틀에서 탔던 리무진 안에서 격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분명 비탄이 노력해 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쪽도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수현은 빠른 어조로 속삭였다. 일부러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이게 뭔데?”
“……돌아 버리겠네. 백우에서 만든 개조 폭탄이야. 씨발, 대체 이게 왜 열다섯 살짜리 애 손에 있는 거냐고?!”
산 넘어 산이었다.
아이를 찾았더니 이제는 폭탄이라. 수현은 기세 좋게 소리치던 것과는 달리 잔뜩 두려움이 어린 앳된 얼굴을 일별하고 여진에게 살짝 고갯짓했다.
여진은 다시 한번 짧은 욕을 토해 내며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도 모르는 얼빠진 청소년을 내동댕이쳤다.
줄 끊어진 목각인형처럼 크게 휘청거리는 닉을 붙든 수현은, 주근깨 가득한 얼굴과 제 시선을 같게 했다.
“내 눈 똑바로 봐.”
“이게 다 무슨…….”
“닉 테일러!”
“으…….”
“이건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야. 너도, 다른 사람도 다칠 수 있어.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 ―그래야, 어른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거니까.”
“…….”
“이해했어?”
지난 인생의 절반을 보육원에서 보낸 것이 처음으로 도움이 되는 순간이었다.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 역시 잔뜩 겁에 질린 도련님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거다.
옅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고개를 확인한 수현이 차분한 어조로 이어 물었다.
“너. 이 계정의 ‘스태프’로 선발된 거, 맞지?”
“……네, 네에.”
“저것들은 누가 준 거야?”
“어떤, 남자가, 요.”
“어떤 남자?”
“아시안이었는데.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근육질이요. 아! 꼭 머리가 군인 같은…….”
마지막에 덧붙인 설명 앞에서 세 후보 중에서 순식간에 둘이 지워졌다. 하지만 수현은 제가 깨달은 답을 내색하지 않은 채 옅게 떨리는 목소리를 경청했다.
“그, 그 사람이, 자기는 ‘조수’라고 하면서……. 홈즈한테는 왓슨이 있고, 배트맨에게는 로빈이 있는 것처럼. 자기도 그런 거라고…….”
“진짜 씨발, 개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젠 영어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국어로 욕을 쏘아붙이며 달려들려는 여진을 몸으로 막은 수현은, 다시금 닉과 시선을 마주했다.
“계속 말해.”
“……혀, 현장 참여자들을 위한 선물을, 숨겨 둬야 한다고. 중간에, ‘방해꾼’이 있을 수도 있지만. 들키지 않으면…… 모두를 놀라게 할 수 있다고 해서.”
바들바들 떨면서 잇던 목소리는 끝에 다다라서는 숫제 울음에 가까워졌다.
“저, 정말 이상한 것인 줄은 몰랐어요. 정말로……. 그냥 장난 같은 건 줄 알고.”
“괜찮아. 하나하나 해결하면 돼.”
수현은 그것이 흐느낌으로 바뀌지 않도록 다독이며 나직하지만 지체 없이 물었다.
“어디에 설치했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설령, 무언가 말했다고 하더라도 듣지 못했을 거다.
부르튼 입술이 열리기도 전에 고작 몇백 미터 떨어진 식당의 야외 테라스에서 바람을 꽉 채운 풍선 수십 개가 동시에 터지는 소리가 났다.
성별과 높낮이가 다른 비명이 그 굉음을 뒤따랐고, 폭발 역시 일종의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건물 구석과 화단, 주차된 차.
하다못해 누군가 먹다 버린 쓰레기처럼 보였던 종이컵조차 순식간에 일상성을 떨치고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누군가의 몸을 도륙 냈다.
평화로웠던 거리가 아비규환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저, 전화가 안 돼!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여기 사람이 다쳤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의 지독하게 꼼꼼한 설계 때문일까.
발을 디디는 족족 새로운 폭발이 일어났다. 사방에서 비명과 앓는 소리가 교차했고,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작은 시계탑 아래로 몰리기 시작했다.
정작, 그곳이야말로 남은 폭탄이 있는 장소인데.
반사적으로 닉을 감싸 안았던 수현은, 울고 비명 지르며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부연 먼지와 깨진 유리 조각이 흩날리는 일방통행 도로 저편에서 눈이 마주친 건, 일주일을 조금 넘겨 재회한 헤어진 연인이었다.
“…….”
수현은 제가 보고 있는 것이 순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건 지독한 미래를 앞둔 단 몇 초의 꿈에 가까웠다.
love, love, love……
love, love, love……
완전히 고장 나지 않는 한 강제로 작동하는 휴대폰에서 다른 높낮이로 시작된 합창은, 김수현과 이교한을 순식간에 매캐한 현실로 끌어올렸다.
* * *
첫 폭발음이 들리는 순간, 이교한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백우 본부에서의 기억이었다.
시뻘건 화염과 연기 속에서 늘어져 있던 몸.
그 몸을 업고 달려 나오는 내내 중얼거렸던 단어는 ‘제발’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라도 생기면 무언가 달라질까 싶어 갖은 종교 단체에 끌려다녔을 때조차 단 한 번 기도해 본 적 없었는데.
도망치는 사람들을 역으로 헤치고 폭발음이 집중된 곳으로 미친 듯 달려가는 도중엔, 놀란 표정을 한 백우 요원 몇 명도 스치며 보았다. 자신을 향해 무언가 외치는 소리도 들렸으나 그뿐이다.
―머릿속에 있는 건, 단 하나.
“하아…….”
김수현.
모자를 눌러 깊게 눌러 쓰기는 했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불가능했다.
감히 자신하건대, 이교한은 김수현이 어떤 모습으로 가장하든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함께 기념일을 보내 주지 않은 무심한 남자는 다행히 그의 생일엔 돌아와 주었다. 교한은 정작 달려온 건 저 자신이면서도 그렇게 관대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했다.
혹시라도 다친 곳이 있을까 싶어 급히 훑은 시야에서 예상치 못한 얼굴이 들어왔다.
얼빠진 낯짝이었지만 곧장 알아볼 수 있다. 황경민의 SNS에 메시지를 가득 쌓아 두었던 어린애다.
……다 끝났는데 이제 뭐 해요, 라고 했었지.
파편처럼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를 시선조차 주지 않고 지나쳐 곧장 한 점으로 달려가는 이교한의 눈이 서늘하게 식었다. 덕분에 다른 때라면 조금쯤 달콤하고, 또 투정이 섞였을지도 모를 재회는 곤두선 의문문으로 시작됐다.
“―왜 이거랑 같이 있어?”
순간 교한은 수현의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벗겨 저를 살짝 올려다보는 이목구비를 꼼꼼하게 살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당장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진 않았다.
“……뭐?”
“―황경민이었어. 밤에 습격한 것도, 여사를 해친 것도 모두 다. 심지어 며칠 전부터는 유희와도 내통 중이었고.”
20세기 문화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밴드의 노래가 이 순간처럼 거슬리던 때가 있었을까. 고통에 찬 신음과 눈물 위에서 시작된 사랑의 찬가는 점점 기괴하게 커지며 말을 전하는 걸 방해했다.
“이 멍청한 건 황경민이랑 온종일 떠들던 새끼인데, 왜 형이랑 같이―”
빠르게 말을 잇던 교한의 시선이 닿은 건 수현이 들고 있는 가방 안이었다.
특수2팀장의 현직 리더인 그는 이름표 하나 없는 케이스의 정체를 보자마자 눈치채었다. 가장 먼저 교한은 여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의 눈썹이 결백을 증명하듯 곧장 찌푸려진 채로 다른 쪽을 노려보았기에, 교한의 시선 역시 함께 움직였다.
수현의 뒤에서 창백하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떠는 닉 테일러에게로.
“믿을 수가 없네.”
“……교한아.”
“―차라리 제일 먼저 죽었어야지.”
교한은 기꺼이 언어를 바꾸어 말하는 친절까지 베풀었다.
“장난삼아 설치한 본인은 살아남고, 다른 사람 팔다리는 날려 버렸다는 거야? 뭘 잘했다고 옆에 붙어 있는데?”
“그건 이따 이야기해. 지금은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영어로 쏘아붙이는 한국인 대신, 정작 미국 국적인 남자가 한국어를 쓰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잠시. 크게 한숨을 삼킨 교한은 다시 한번 수현을 살폈다. 다행히 어디도 다친 것 같지 않았다. 고작 그 사실만으로도 터무니없는 안도가 들었다.
또, 수현의 말이 맞았다. 이 불쾌한 장소에 더 있는 건 교한 역시 사절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한 번의 완창을 마친 노래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 트럼펫 전주가 시작됐다. 익히 잘 알고 있는 바리톤의 목소리가 온갖 휴대폰과 스피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온 건 그때였다.
―나의 친구들, 오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각기 휴대폰의 주인이 쓰는 언어로 번역된 유희의 SNS 라이브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