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70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70화
표정을 꾸미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동종의 것들이 시선을 주고받은 건 아주 찰나였다.
그들은 서로의 눈과 입에 걸린 곡선이 흐려지기도 전에 움직였다. 생각이나 의식 따위보다 더 빨리, 수많은 위협에서 살아 돌아왔던 때처럼.
하지만 경쟁에는 언제나 승자와 패자가 있는 법이다.
그 승패에 걸린 것이 목숨이라면 더욱더 명확하게.
“―크, 아악!”
곧장 총을 뽑으려 시도했던 황경민의 오른쪽 손목과 어깨는 순식간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뒤틀렸다. 경민은 몸을 크게 밀치며 교한과 거리를 뒀다. 하지만 그의 팔 하나는 이미 관절을 기준으로 엇갈린 시계추처럼 덜렁거렸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낯에서 거친 욕이 쏟아져 나왔다.
“아, 씨발, 씨발, 악! ……대체, 왜요?!”
“날 이해한다며. 그럼 이유도 말해 주기 전에 알아야지, 황경민.”
흰자위까지 시뻘겋게 변한 경민이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확대된 동공만큼은 주어진 질문의 답을 찾는 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잠시 뒤 경민은 동족상잔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애초에 이교한이 달라진 건, 망할 경기도 외곽의 폐건물에서 실재조차 의심했던 누군가와 마주친 때부터였다.
늘 믿음직스럽다 못해 감탄마저 자아냈던 나이 어린 팀장은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이상해졌다. 기이한 표정과 행동을 하더니― 백우를 그만두려고 했다는 말까지 지껄여 댔다.
헤어진 연인이 안가에서 미래를 속삭이던 장면을 회상한 경민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김수현. 그게…… 당신을 망쳤어.”
“그래. 맞아.”
교한은 순순히 인정했다.
경민의 허리춤에서 빼낸 권총을 저만치로 던진 그는 저와 같은 것만이 뒷면을 상상할 수 있는 감정 없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소리를 내지 않는 죽음처럼.
“세상은 우리가 얼마나―, 대체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무도 몰라요. 다들 소름 끼쳐 하고, 징그러워하지! 씨발, 삐끗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인간으로도 안 보겠지.”
“그걸 알면서,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잔뜩 일그러진 채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얼굴이 된 경민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팀장님은 아시잖습니까. 네? 당신만은, 이 모든 게 얼마나 개 같은지 아는데……. 고작, 대단한 거 하나 없는 청부업자 하나 때문에.”
“…….”
“그 개버러지 같은 고아 새끼 때문에!”
오염된 신뢰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할 중추다.
지금, 황경민은 그 뼈가 부러진 셈이었다.
중심을 잃은 채 휘두르는 주먹이 위협적일 리가 없다. 제게 달려드는 경민을 가볍게 흘려낸 교한은 곧장 빈틈투성이인 뒤로 향해 목을 조였다.
아무리 팔 하나가 뒤틀렸다고 한들 전직 경찰 출신에, 몇 년이나 요원으로 굴렀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채 1분이 되지 않아 기절했을 힘 앞에서도 경민은 아득바득 몸부림쳤다.
“김, 수현, 그 새끼는, 절대―, 팀장님을, 이해 못 할 겁니다.”
“……이해 같은 건, 필요 없어.”
“컥, 끄윽……!”
“그리고 노력은, 한 사람에게만 하면 되니까 상관없고.”
어떻게든 제압에서 벗어나려고 발악하던 황경민의 움직임이 잦아든 건 그때였다.
정확히는, 다르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경민은 동족의 말을 듣고 반항 대신 끽끽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마치 지금 들은 말을 비웃는 것이 제 목숨보다 급한 일이라는 양.
목이 졸리는 채로 터트리는 웃음은 낡은 마룻바닥이 내지르는 단말마 같았다.
“알게 되실, 겁니다. 아무리, 큭, 노력해 봤자,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분명, 제 말이, 맞―!”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와 의식으로도 한 땀씩 이어지던 저주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그 지루한 소리를 다 들어 줄 아량이 다한 그가 시뻘게진 얼굴을 짓이겨 비틀어 버린 탓이다.
이교한은 움직임을 멈추고 늘어진 몸을 먼지를 털 듯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고운 눈썹도 곧장 찌푸려졌다.
“아. 진짜.”
수현이 사 준 셔츠 소매에 살짝 밴 붉은 얼룩은 황경민이 이를 악문 채 바둥대다 남긴 흔적이었다.
확인 사살이 아닌 이상 죽은 사람에 대고 ‘뭔가’를 하는 건 개인적인 기호에서 먼 터라, 교한은 대신 흐리멍덩하게 뜨인 눈을 신경질적으로 내려다보았다.
지잉, 하고 짧은 진동이 두 번 울린 건 그때였다.
경민의 바지 주머니에서 들린 소리다.
교한은 구두 굽 끝으로 늘어진 몸을 툭툭 밀어 돌아간 몸통만 바로 눕힌 뒤 그곳에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잠금을 풀기 위해선 다시 한번 뒤집어 반대편을 바라보는 벌건 얼굴을 인식시켜야 했다.
LET.v.PLAY
▶충실한 조수가 떠났군요. ;(
“…….”
경민의 SNS에는 백우의 그 누구도 연락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던 계정으로부터 DM이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처음 보는 계정 하나가 온종일 가득 쌓아 둔 메시지도.
이교한은 황경민의 지난 대화 내역을 무표정하게 훑기 시작했다.
유희의 SNS 라이브 방송 시간까지는, 어느새 딱 30분 남았다.
* * *
해안가의 작은 마을은 축제를 앞두고 평소보다 북적였다.
유독 깊게 모자를 눌러쓴 남자와 얼굴의 반을 가린 선글라스를 낀 여자― 다시 말해 김수현과 우여진은 덕분에 소란한 인파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와. 방금 지나간 사람, 유희 SNS를 보고 있던 거 봤어?”
“애나 찾아.”
“아잇! 진짜. 벌써 몇 시간을 뒤졌는데도 안 보이니까 하는 소리지.”
유독 무뚝뚝하게 돌아온 대답 앞에서 여진이 작게 투덜거렸다.
하지만 수현 역시 문제의 SNS 팔로워들을 벌써 서너 명은 지나친 게 사실이긴 했다.
누군지도 모를 ‘인간도 아닌 것’의 SNS를 팔로잉하고, 그가 라이브 방송을 하겠다고 떠드는 곳까지 찾아오는 행동력이라니. 솔직히 수현으로선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라면 그 시간에 책 한 권을 더 읽고, 운동이라도 조금 더 할 텐데.
“이미 여기 뜬 거 아닐까?”
“카운트다운 시작 전에 갔을 리가 없어.”
사람이 많이 몰렸다는 건 양날의 검이었다. 같은 장소를 빙빙 도는 것을 수상쩍게 여길 현지인의 눈을 피할 수 있지만, 정작 표적을 발견하기는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눈에 띄지 않는 건 확실히 의아했다.
쉬어니스는 아담한 곳이다.
항구부터 중심가까지 도보로 20분이 조금 넘고, 길도 단순하다.
심지어 꼬맹이네 요트가 있는 곳은 더더욱 가까워서 수현처럼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10분 안팎으로 주파할 수 있을 정도다. 이 손바닥만 한 마을을 뒤지는 동안 SNS를 들여다보는 팔로워들은 심심찮게 눈에 띄는데 정작 ‘스태프’는 보이지 않는다니.
다시 한번 휴대폰을 확인하던 수현은 벌써 오늘만 몇 번을 들른 장소를 다시금 입에 담았다.
“시계탑. 거기로 다시 가자.”
“또?”
“곧 6시 30분이야. 다른 곳에서 안 보인다면, 스태프 구인 글이랑 같이 올라온 장소가 제일 확률이 높겠지.”
“그건 그렇지만……. 어휴, 망할 꼬맹이.”
여진이 쯧, 혀를 찼다.
하지만 다행히 이번엔 허탕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방통행만 가능한 좁디좁은 골목 끄트머리, 시계탑을 중심으로 모이는 삼거리에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문제의 청소년을 발견했다.
닉 테일러는 프랜차이즈 샌드위치 전문점에서 막 봉투 하나를 들고나오는 중이었다.
“……찾았다.”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뭐라 말 붙일 새도 없이 먼저 달린 건 우여진이었다.
솔직히 타깃을 발견하면 대상은 물론 주변 환경 파악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수현으로서는 낯설고 거북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우여진의 판단이 옳았다.
열다섯 살의 발칙한 꼬마는, 전직 요원과 은거 중인 정원사를 상대로 샌드위치를 집어 던지는 도주극을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씨발, 뭐야!”
물론, 그건 시계탑 앞을 벗어나기도 전에 맥없이 붙잡힐 허튼짓이었지만.
“뭐긴 뭐야. 이게 미쳤나, 쪼끄만 게 어딜.”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이건 반칙이지!”
“반칙은 무슨.”
빽빽 소리를 치는 닉 테일러를 향해 여진이 코웃음 쳤다.
하지만 수현이 집중한 건 다른 것이었다.
닉은 좋은 집 도련님답지 않게 옷 여기저기는 물론이고 손톱 밑까지 흙투성이였고, 짊어진 가방은 크기에 비해 묘하게 가벼워 보였다.
하여, 이번에 말보다 먼저 행동한 건 수현이었다.
“악, 하지 말라고!”
소리치는 닉을 고작 냉랭한 눈빛 하나로 제압한 수현은, 곧장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고 네모난 가방 안에 있는 것은 심히 단출했다.
좀 더 정확히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무언가를 겹겹이 싼 까만 케이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