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69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69화
꼬박꼬박 대답하던 황경민이 처음으로 침묵했다.
교한은 기꺼이 그가 대답할 시간을 주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경민은, 잠시 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타공인 으뜸가는 다혈질로 손꼽히는 사람답지 않게 차분한 어조였다.
“……우선 사람의 숫자를 줄여야 합니다.”
“무슨 핑계로?”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서너 명 모여서 근처를 시찰하자고 하는 게 좋습니다. 같이 움직이다가 한 번 더 쪼개지면 되니까요. 짧은 텀으로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고 다시 모이자고 하면 의심을 살 일 없이 자연스럽습니다.”
여느 임무와 다름없는 브리핑이었다. 교한은 제 부하 직원의 계획이 썩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럼, 지금 해 볼까요.”
“…….”
“아무래도 관리 대상인 내가 제안하는 것보다 황경민 씨가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아닌가?”
사실 이교한의 제안은 틀린 게 없었다.
애초에, 지금 교한은 말이 팀장이지 다른 요원들에게 무언가를 명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도 했다. 당장 경민 역시도 남기중의 명령을 따라 교한을 감시하기 위해 붙어 있는 것이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대치 아닌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마침내 경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교한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제 귀의 이어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이쪽은 수상한 게 보이지 않습니다.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혹시 같이 이동하실 분 계십니까?”
잠시 뒤 여기저기서 대답이 돌아왔다.
어렵잖게 동료를 얻은 경민은 “가시죠, 팀장님!” 하고 여느 때처럼 깍듯하게 말했다. 교한은 주위를 잠시 둘러본 다음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황경민은 그의 표현을 빌려 매우 ‘자연스러웠다’.
만약 지금이 함께하는 임무 도중이었다면 저조차도 의심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치 빠르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백우 요원들이 천연덕스러운 장난과 배려로 위장한 유도 앞에서 한 명, 한 명 떨어져 나갔다. 덕분에 이교한은 황경민이 이런 행동을 한 게 처음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이 단둘만 남아 향한 곳은 공교롭게도 성당 근처. 유독 새파란 바다를 옆으로 낀 인적 없는 공터였다.
마지막 요원을 ‘30분 뒤에 커피숍 앞에서 보자’며 떨구어 냈을 때부터 손을 가만히 두지 못했던 경민은, 그제야 남은 한 꺼풀의 위장을 집어 던졌다.
“솔직히……. 먼저 이렇게 말씀 걸어 주실 줄 몰랐습니다.”
교한은 대답 대신 묘하게 격앙된 얼굴을 물끄러미 뜯어 살폈다.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들뜬 것처럼도 보이는 저 가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굳이 뭐라 추궁하기도 전에 허둥지둥 변명 같은 말이 뒤따른 탓이었다.
“아! 물론, 팀장님이라면 알아보실 줄 알았지만. 그래도요.”
“내가 알아본다? ……뭘?”
“네? 아. 그거야, 당연히.”
배시시 웃으며 손까지 내젓는 모습은 건장한 몸과는 어울리지 않게 살짝 수줍은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어진 문장은 그런 순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시건방진 년들이요.”
* * *
5년 전.
봄이라 이름 붙여졌지만 실상 겨울에 가까웠던 그 시기.
김수현에게 처음 다가갔던 이유는 호기심이라는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어쩌면 갈증이라고 명명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일찍이 사회적 동물임을 부정당한 주제에 꼴에 짐승이기는 해서, 일말의 소속감이 필요했던 걸까. 저와 같은 이유로 보호소를 찾았다던 수현이 동류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걸 보면.
“원래는 노인네를 먼저 잡으려고 했는데. 일부러 저만치에 두고 온 경호원 년이 개지랄을 떨고 달려들어서…….”
“…….”
“씨발, 진짜 몇 년 만에 칼이 눈앞까지 왔는지! 등줄기가 싸늘했다니까요.”
이교한은 철 지난 모험담을 말하듯 웃는 경민을 지켜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7월 18일. 그것도 관련 있는 일인가요?”
“어, 7월 18일요? 씁, 그때가 언제더라.”
“뉴욕, 해변 근처의 회색 건물.”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이자 잠시 뒤 경민이 크게 아아, 하고 탄성을 내며 “맞습니다, 제가 직접 안 가서. 거기 말씀하시는 줄 몰랐습니다” 했다. 깍듯한 태도와는 정반대의 대답이었지만, 교한은 놀라는 대신 차분히 질문을 이어 갔다. 아직 그는 발톱을 내밀기 전에 얻어야 할 것이 많았다.
“그곳 위치는 어떻게 알았는데?”
“김수현이요.”
“……김수현?”
“뉴욕에 오자마자 제 권총을 가져갔거든요. 왜, 초소형 발신기 붙은 거요. 지금은 배터리가 다 됐는지, 망가졌는지……. 씹. 그것만 잘 작동했어도!”
퍽 공손하게 말을 잇던 경민이 별안간 작게 욕을 짓씹으며 콘크리트 바닥을 탕, 찼다. 하지만 교한이 무표정하게 바라보자 얼른 자세를 고치고 입꼬리를 잡아 올렸다.
“대표 옆에 늘 따라다니는 비서 새끼 있잖습니까? 그거 끽해야 커피 타고 서류나 정리하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 재주가 있더라고요.”
“…….”
“슬쩍 장소 흘리면서 고급 정보는 적극적으로 수집해야 하지 않겠냐고 바람 좀 넣으니까, 전화 한 통에 두 개 분대 뚝딱 데려오던데요.”
“남기중은 모르는 일인가 보네요.”
“어휴, 그 인간이 알면 곤란하죠! 몇 명 죽은 거 가지고 거품 물 거 뻔하잖습니까.”
‘난 그게 꼭, 나한테 네 곁을 떠나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떻게 생각해?’
문득, 헤어진 연인의 물음이 떠올랐다.
덕분에 처음으로 그가 저와 떨어져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한은 손가락 관절 하나하나를 천천히 움직여 풀면서 전보다 훨씬 나긋한 어조로 이어 물었다.
“김수현에 대한 정보는 왜 가져갔고요?”
“사사건건 방해가 되잖습니까!”
“…….”
“팀장님은 이깟 멍청한 일에 시간을 쓰실 분이 아닌데. 지금도 그래요. 연금술사니, 뭐니. 이런, 개, 씨발!”
‘사시사철 99℃’.
일찍이 팀장으로서 황경민을 평가했을 때 썼던 표현은 지금도 유효했다. 경민은 끓는점을 두고 오락가락했다. 울컥해서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가, 숨 고르기를 하듯 말을 다듬는 것이 몇 번이나 반복됐다.
“이거 다 대표가 미쳐 날뛰어서 매달리는 거 아닙니까? 고작 7년 전에 꼰대 새끼들 몇 명 뒈진 일 때문이라면서요! ……후우, 걱정 마십쇼. 제가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나 대신 정리를 하겠다?”
“―네!”
마지막 대답은 거의 포효에 가까웠다. 경민이 거의 으르렁대듯 외쳤다.
“‘우리’는 원래 하던 걸 해야 하니까요, 팀장님. 특수2팀의 일을요!”
백우의 ‘특수 활동 부서’.
탄생과 목적 그 모두가 일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곳에서 굳이 한 번 더 특수라는 단어로 둘러쌌다는 건 사실 여러 의미를 내포한다.
특별이 아닌 특수.
그건 매우 목적 지향적이다.
다시 말해, 하나같이 사연을 가지고 들어와 보통의 범주에서 한참 먼 백우에서조차 마다하는 일들을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을 거다.
교한은 순간 경민의 모습에서 과거의 저를 투영해 보았다.
저와 같은 이유로 보호소에 왔다는 말 한 마디에 낯선 이방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순간을. 제게는 그 대상이 김수현이었다면 황경민은 백우, ‘특수2팀’ 자체인 듯했다.
백우는, 정확히는 특수2팀은 가장 표준이 되어야 할 집단에서 영구적으로 추방된 자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일까.
대답 대신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고 있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팀장님! 팀장님은, 저를 이해하실 겁니다.”
“……내가 왜.”
“―그야 저는 바로 알아봤거든요!”
“…….”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만큼은― 팀장님이 말단으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총을 쏠 때부터 곧장 눈치챘습니다.”
잔뜩 상기된 목소리가 횡설수설 이어졌다. 심지어 과거를 회상할 땐 꿈을 꾸는 듯한 들뜸마저 섞였다.
“같은 자리에 세 발. 팀장님은 우릴 공습했던 녀석들의 이마에 한 가운데, 이미 뚫린 곳에 거듭 쏘셨죠. 아직도 분명히 기억합니다.”
황경민은 이교한 자신조차도 기억 저편으로 밀쳐 두었던 일들을 어제처럼 늘어놓았다.
어딘가의 마피아를 상대하며 사흘 밤낮을 샜던 순간. 기밀을 훔쳐 달아난 배신자를 추적하던 어느 깊은 밤. 하다못해 백우 단련실에서 누군가의 뼈를 부러트렸을 때까지.
목소리로 박제된 일화는 하나같이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 순간들이었다. 물론, 쏟아 내는 당사자는 눈이 마주치자 씨익 미소 지었을 뿐이다.
황경민은 마치 엄청난 말을 고백하기 전 준비라도 하는 듯 후우, 긴 소리를 내어 한숨 쉰 다음, 이내 힘주어 말을 이었다.
“우리는 같아요, 팀장님.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습니까?”
“…….”
“―저는, 팀장님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한때, 이교한은 자신과 같은 것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게 많았었다.
대체 당신은 이 끔찍한 매일을 어떻게 살고 있냐는 질문부터 시작해서, 스스로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 차라리 어디선가 빨리 끝이 날 수 있다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이 무엇일 것 같은지 따위의 자문을 구하고도 싶었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교한은 그렇게나 염원했던 상대를 눈앞에 두고 어떤 해묵은 질문도 하지 않았다. 과거의 그라면 상상하지 못할 다른 미래를 꿈꿔 봤던 탓이다.
예컨대 볕이 아주 잘 드는 새파란 지붕 아래서의 삶 같은 것. 바보 같은 선인장이 팔을 올린 채 일광욕하고, 어쩌면 그렇게나 싫어하는 개 한 마리쯤은 키워도 좋을 막연한 미래 따위를.
“……황경민. 나를 이해한다고 했지.”
“네, 그럼요!”
드디어 말이 통했다는 듯, 경민의 얼굴엔 후련하다는 듯한 미소가 걸렸다. 잔뜩 격앙된 상대의 어깨에 올라간 교한의 손이 짐짓 지난 외로운 시간을 격려하는 양 움직였다.
동료들에게 어떤 의심도 사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빠져나와, 어느 누가 죽어도 모를 곳에서 이교한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럼 내가 지금 너를 어떻게 할 생각인지도 알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