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68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68화
* * *
▷그대, 비탄.
▷비탄?
당신과 한가롭게 놀 시간이 없어요, 격노.◁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요.◁
이미 메모리가 빠듯해요.◁
▷씨발. 그럼 백신을 내놓든가!
…….◁
왜 부르셨어요?◁
▷김수현에게 문자를 보내 주겠어?
무슨 문자요?◁
그보다, 안 돼요.◁
유희의 방해가 너무 심해요.◁
겨우 방어하는 게 고작이에요.◁
▷내 남은 메모리도 모두 쓰도록 해.
▷그래도 안 돼?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요?◁
▷바다가 보고 싶어.
▷봐, 지금 가려는 곳. 배도, 요트도 많아.
황당하군요.◁
바다는 시애틀에서 보셨어야죠.◁
정 그러면 이거나 구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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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딴 거 말고!
▷이 내 눈으로 보고 싶다고!
김수현의 휴대폰은 완전히 구형이에요.◁
후면 카메라가 고작 800만 화소라고요.◁
3,500만 화소 VS 800만 화소◁
전자가 합리적이에요.◁
▷상관 없어.
▷‘눈이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
▷그리고 비탄, 난 다 알고 있어.
▷그대도 김수현이 안가에서 보여 줬던 거리를 돌려 보잖아.
…….◁
▷문자 보내자. 응?
보냈어요.◁
큰 기대는 마세요. 김수현 씨는 지금 바빠요.◁
격노?◁
…….◁
어휴.◁
D-DAY란 단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북서유럽의 해방을 위해,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로 향했던 약속의 날을 지칭하는 용어로 처음 사용되었다.
한때는 군사 용어였던 그것의 앞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도 설왕설래한다.
누군가는 상륙Disembarkation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하고, 출정일Departed day의 줄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현대에서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한 이상 무슨 뜻이든 부여해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누군가의 사망일Deathday이어도 이상하지는 않을 테고.
D―DAY
4년 만에 혼자 맞는 생일의 오전.
식사 대신 빈속에 커피를 쏟아붓던 김수현은, 발신자가 표시되지 않은 문자 한 통을 받았다. 그것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고 있으려니 곧장 우여진의 눈치 빠른 질문이 따라왔다.
“왜 그래?”
“별거 아냐.”
딱히 비밀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보단 ‘바다를 보여 주실 수 있나요?’라고 정중히 요청한 얼굴 없는 동료의 말을 굳이 옮길 필요를 느끼지 못한 쪽이다. 내심 이마저도 암호인가 싶기도 했고. 하지만 문장을 어떻게 뜯어 봐도 다른 의미를 유추하기는 쉽지 않았다.
작게 어깨를 으쓱한 여진은 마지막으로 태블릿 피시에 자료 몇 개를 띄워 수현에게 넘겼다.
“우선 유희의 SNS에 올라온 시계탑은 여기서 3시간쯤 떨어진 쉬어니스라는 곳에 있는 거야. 다음 장 넘겨 봐.”
혼자 일할 때는 언제나 모든 자료를 인쇄한 다음 암기하고 불태우는 구식을 추구했던 수현은, 덕분에 21세기의 문명에 눈떴다. 검지와 중지로 가볍게 화면을 쓸자 직사각형의 패널 위로 여러 각도의 해변 사진이 떴다.
그리고 그 위에 줄지어 있는 건―
“요트?”
“응. 이곳에 닉 테일러, 이 꼬맹이네 집안 요트가 있어. 무엇보다 오늘 자정 유희의 SNS에 올라왔던 사진, 그것도 꼬맹이가 예전에 올렸던 거고. 아무래도 이쪽 지리에 엄청 익숙해 보여.”
‘8월 12일, 저녁 6시 30분’.
시곗바늘이 하루를 가르는 자정, 유희는 D-DAY를 화려하게 자축하며 SNS 라이브 방송을 예고했다.
함께 올라온 사진은 노을이 지는 바다 경관과 그 밑으로 슬쩍 걸친 계기판 사진이었는데, 다행히 힌트를 찾아낸 셈이다.
“씁, 기를 쓰고 팔로워를 모았던 게 이 망할 라이브 방송 때문인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요트의 기종과 정박 위치를 확인하던 수현은 슬쩍 여진을 곁눈질했다.
덩달아 밤을 새운 그녀의 얼굴엔 피로가 선연했다. 시간은 빠듯하고, 육체와 정신은 지쳐서 여유가 없는 순간. 사람은 이럴 때 평소라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말을 흘리고는 한다.
때로는 깊이 숨겨 둔 본심까지도.
“우여진.”
처음으로 이름 석 자를 불러서일까. 마찬가지로 커피를 마시던 여진은 큽, 하고 역류하는 액체를 간신히 삼켰다.
“어, 으응?”
“아무래도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 묻지 않은 게 있는데, 상황이 이런 만큼 미리 확인해도 될까.”
“뭔데 앞에 사족을 그렇게 붙여.”
“당신 전남편에 대해 좀 물으려고.”
짐짓 장난스럽기까지 했던 입꼬리가 순간 움찔했다. 수현은 퍽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백우가 위험한 곳이어서 죽은 척까지 했다고 했었지. 그럼, 대표는?”
“그 인간은……. 왜.”
“남기중이야말로 모든 위험한 조건을 다 갖췄으니까.”
“위험한 조건?”
“폭발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이면서, 2세대 OS의 존재를 아는 사람. 제일 거슬리는 건 이쪽인데 기다려도 별말이 없길래.”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허를 찔린 탓일까.
유희의 행적을 정리하는 내내 어떤 질문을 던지든 단 한 번도 말이 막히는 적 없던 여진이 처음으로 우물쭈물댔다. 수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았다.
“남기중이 휘하 요원들을 ‘위원회’에게 팔아넘기고 있다고 해석해도 되겠어?”
“―뭐어?! 무슨 소리야 그게!”
“아냐?”
“아, 아냐! 남기중, 그럴 사람은 아니야!”
“‘그럴 사람은 아니다’……. 5년간 만난 사람 직업조차 몰랐던 입장에서 듣기 거북한 소린데.”
여진은 하고픈 수많은 말들 중 무엇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짚었다. 그건 한편으로는 자신의 논리가 빈약하다는 것을 잘 아는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시 뒤 터져 나온 외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새끼가 자기 요원들을 얼마나 챙기는데!”
다행히 수현 역시 애초에 객관적인 대답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굳이 내색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자 당사자는 상상도 못 할 대리 변명이 이어졌다.
“남기중은 2세대 개발이 연금술사의 자료를 기반으로 진행됐다는 정도만 알아. 그게 요원들의 안전과 직결된다는 생각을 했다면, 본부 한복판에 개발실을 차려 놓을 리가 없는 인간이라고. ……나한테 말해 줬을 리는 더욱더 없고!”
“그렇게나 아랫사람을 아끼는 상사라면 알게 된 걸 털어놓았어야지.”
“그, 그건—!”
“우여진, 당신이 선택한 건 죽은 척 사라지는 거였어. 앞뒤가 안 맞잖아.”
수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반응 속에서 그녀 역시 저와 같은 질문을 떠올려 본 적 있음을 확신했다. 후에 결론을 어떻게 내렸든 말이다.
저만치에 있는 시계를 흘끗 확인한 여진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일부러 여유 없는 시점에 몰아붙인 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짧은 적막 뒤, 여진이 입을 열었다.
“폭발로 정보기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다 죽었다는 건……, 남기중에게 들었다고 했지.”
“본인만 살아남았다는 것까지.”
“그럼,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들었어?”
질문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했지만 이미 답을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수현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흘러나온 한숨이 그걸 뒷받침한다.
잠시 심란한 표정으로 온갖 서류로 가득한 책상 위를 노려보던 여진은, 이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남기중은…… 여느 요원들이랑 비슷하게 백우에 들어왔어. 능력은 있지만 오갈 데 없는 채로.”
“…….”
“전 대표는 그런 남기중이 가족처럼 따르던 사람이었지. 애초에 그 아수라장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전 대표가 남기중 대신 폭발에 휘말렸기 때문이니까.”
그 순간 수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다운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발에서 오랜 친구가 저를 감싸는 상상을 한 수현은, 무표정한 채로도 팔짱을 꼈다.
“―‘당장 연금술사를 찾아. 찾아야만 해’.”
낮게 뇌까리는 목소리는 그늘이 짙게 깔려있었다.
“남기중은 매일 그날의 꿈을 꾸고, 7년 전에 죽은 사람의 명령을 따라. 머릿속엔 백우와 연금술사, 단 둘뿐이지. ……그런 상태에선 말해 봤자 도움은커녕 사달을 내고도 남을 게 뻔하잖아?”
일부러 최악의 타이밍에 꺼내게 만든 답이기는 했지만, 달갑지는 않았다.
김수현이 알고 싶었던 건 백우의 수장인 남기중에 대한 정보이지, 우여진의 연인이었던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건조한 척하는 목소리에 남은 끈적한 점도만으로도 그들의 최후를 엿본 느낌이라 영 입맛이 썼다.
물론, 한편으로는 덕분에 확실해진 것도 있다.
우여진은 남기중의 비밀을 다 알지 못한다.
누군가로 마음이 가득 찼다는 건 진실에서 눈멀게 된다는 뜻이다. 감히 확신할 수 있는 건 저 자신이 그 증거인 까닭이었다.
“여기서 쉬어니스까지 가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지.”
“……어? 어어. 응.”
“슬슬 출발해야겠어. 10분 안에 준비하고 나올 테니, 그쪽도 알아서 해.”
수현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당장에라도 떠날 수 있는 것을, 슬쩍 여유를 남긴 건 그 나름의 사과였다. 다행히 지금의 여진에게 몹시 필요한 것이기도 했고.
온갖 서류와 모니터 사이에 혼자 남은 여진은 빈 의자에 털썩 소리 내 앉았다. 이내 작게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어쩌면 수현이 들었다면 좋았을 것이었다.
“정말, 이것도 못 할 짓이네…….”
영국 켄트주, 쉬어니스는 차로 넉넉잡아 30분이면 근방을 전부 돌 수 있는 작은 마을이다.
물론 선착장과 모래사장 덕분에 자연스레 사람이 모여 위치치고는 번화하긴 했지만, 런던에 비해 집의 크기와 간격도 널찍하고 여유롭다.
하여 김수현과 우여진, 두 사람보다 먼저 문제의 장소에 도착한 백우는 현지인들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도록 적당히 무리 지어 흩어졌다.
다행히 오늘은 작은 축제가 예정됐고, 해양 레저를 즐기기에도 적합한 날씨였기에 이방인의 방문이 어색한 날은 아니었다.
이교한은 그 틈을 타서 오늘 새벽 자신의 권한을 남용한 부하 요원에게 먼저 다가갔다.
말보다 먼저 건넨 건 작은 메모였다.
「잠깐 무전 종료하세요.」
짤막한 문장을 읽은 황경민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는 착용하고 있던 무전기를 곧장 조작했다. 이내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이건 나보다 황경민 씨가 더 잘하는 일이라 조언을 구하려고요.”
“제…… 조언이요?”
“응.”
경민은 빙긋 웃으며 말하는 제 팀장을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경험상, 이럴 때의 교한은 꼭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말 역시 그가 가늠치 못한 것이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동료들을 따돌리면서도 의심을 사지 않을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네?”
“왜, 잘하시던데.”
가늘어진 이교한의 눈이 짙은 갈색으로 빛났다.
“정 그렇게 부끄러우면 뉴욕에서 어떻게 했던 건지만 말해 줘도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