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 - 100
사랑하는 나의 악인에게 100화
수현이 제 마음을 쏟아 내고 말았던 분홍빛 여름과 지금엔 공통점이 몇 개 있다.
점점 피가 몰리는 귀 끝과 사랑을 숨기는 덴 도통 재능이 없는 검고 뜨거운 눈동자. 다른 건 몰라도 이 두 가지만큼은 여전하다. 덕분에 교한은 대답이 곧장 돌아오지 않아도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현이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에는 제아무리 그라도 살짝 놀라고 말았다. 무작정 팔을 붙들고 일으켜 세운다면 더더욱.
“……형?”
“따라 와.”
이유를 물을 기회도 없었다. 대신 저를 잡아당기며 앞장선 수현의 목뒤마저 아주 붉어졌다는 것만 새삼 확인했을 뿐이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열이 눈을 통해 옮을 듯한 색이었다.
수현이 교한을 데려간 곳은 안방 침실에 딸린 욕실이었다.
“여긴 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세모난 욕조 안으로 묵묵히 물을 받기 시작했을 뿐이다. 덕분에 식사 중에 끌려 나온 이유를 더욱 가늠하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사실 물이라는 존재는 둘 모두에게 그리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아직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라고 칭하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교한은 찬물로 손을 씻다가도 등골이 서늘해져서 강박적으로 제 연인을 찾아다닌다. 김수현 역시 다를 건 없다. 상대적으로 더 안전할 예전 집 대신 굳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 것부터가 재회한 순간을 채 떨쳐 내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내내 조용하던 수현이 입을 연 건, 욕조 안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를 어떤 의식의 전조처럼 듣고 있을 때였다.
“―우리 이제 새로 사귀는 거라며.”
욕조에 잠겨 듣는 것처럼 먹먹했던 문장은, 중간부터 선명해졌다. 교한은 기계적으로 입꼬리를 잡아 올렸다.
“어, 으응. 그렇지?”
“그럼 이것도 순서 바꿔.”
낮은 목소리에 감겨 나온 말은 군더더기가 없는 정도를 넘어서 불친절했다.
뭉뚱그린 단어에 담긴 의미는 자꾸 멈춰서는 사고를 기민하게 회전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웠다. 교한은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고 들은 말을 겨우 해석했다.
방금 식탁에서 한 대화를 미루어 보자면 ‘순서’는 사귀기 시작한 타임라인을 고치는 걸 의미할 테고.
또, 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한 수현의 행동을 미루어 봤을 때 ‘이것’은―
“……설마 이번엔 사귀는 것보다 섹스가 먼저야?”
“어.”
돌아온 대답은 발갛게 물든 뺨이 아니었다면 심드렁하게 들렸을 정도로 짤막했다.
덕분에 교한은 대뜸 욕실로 끌려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꾸미지 않은 한숨을 작게 터트렸다. 아직 망할 선인장에 숨겨진 비밀조차 말하지 못했는데. 밥을 먹다가도 불이 붙는다는 신혼 초 흉내부터 내게 생겼다.
물론 갑작스러운 섹스가 싫다는 건 절대 아니다. 애초에 김수현과의 섹스를 싫어하는 것 따위가 가능할 리가 없다. 지금도 당장 저 발갛게 익은 피부의 감촉을 느끼고 싶은걸.
하지만…….
“음. 물론 난 너무 좋은데. 그래도 형이 이렇게 적극적일 건 예상 못 했―”
반 음절 높은 목소리로 짜냈던 작위적인 들뜸은 미처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기어이 단추를 다 푼 셔츠를 확 잡아당기더니 곧장 아랫입술을 깨물어 입 맞춘 수현 때문이었다. 연하고 부드러운 살점 위로 따끔한 통증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물 먹은 듯 멍했던 정신에 불이 들어왔다.
살짝 열린 입 안을 따뜻하고 습한 살덩이가 몹시 정중히 파고들었다. 교한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그 입맞춤을 받았다. 이내 맞닿은 곳에서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하아, 음…….”
사실 이교한은 다시 만난 이후로 제 연인이 씻고 나온 직후를 의도적으로 피했었다.
좀 더 정확히는 ‘젖은’ 김수현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유는 간단하다. 물기 가득한 머리카락과 피부를 보며 멀쩡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지, 스스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꼴사나움을 솔직히 털어놓을 생각도 못 했었다.
수현이 ‘그런 모습인’ 저를 발견했었기에 더더욱.
그래서 매번 핑계를 대며 슬슬 피했었는데, 보아하니 진작 들켰던 게 분명하다. 욕조에 채워지는 물이 제 경험과는 다르게 따뜻하다는 것도 그즈음 깨달았다.
왠지 속이 후텁지근해진 이유가 옅은 수증기 때문인지, 바보 같음을 들킨 부끄러움 때문인지― 아니면 온기와 숨이 뒤섞인 가벼운 키스 때문인지도 헷갈렸다.
“교한아.”
교한은 그제야 살풋 감았던 눈을 떴다.
저 낮은 목소리에 제 이름이 담겨 나오는 건 정말 몇 번을 들어도 등줄기가 짜릿했다. 약간 도톰해진 아랫입술에 가볍게 쪽, 다시 입 맞춘 수현이 욕조의 물을 잠갔다. 교한은 몽롱해진 눈으로 연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쫓았다.
물소리가 사라진 욕실은 그 반동만큼 고요하게 느껴졌다.
셔츠를 잡아 내리는 일상적인 마찰음과 짧게 숨을 들이켜는 사소한 열렬함마저 크게 들릴 정도로.
“…….”
수현의 손이 희고 부드러운 피부 위를 따라 움직였다. 서늘한 손가락이 지나가는 곳마다 열꽃이 피는 듯한 감각이 생경했다.
늘씬하게 뻗은 어깨에서 가슴으로, 그 아래로. 천천히 보이지 않는 자국을 남기고 이동하던 손은, 이내 오른쪽 복부에 다다랐다. 작지만 선명하게 남은 흉터를 차마 건드리지 못하고 겨우 그 주변만 쓰다듬는 감촉이 애틋했다.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해야 할까.
교한은 내리깐 짙은 속눈썹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선수를 빼앗겼다.
“예전에 한 약속은 무효로 해 줘.”
“……응?”
“지금부터 보게 될 건, 나랑 막 사귀기 시작한 이교한 너는 모르는 일인 거야.”
오늘따라 수현의 말은 여러 번 곱씹어야 했다. 언제나 간결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성격답지 않은 일이다. 그 이유를 되짚어 볼 새도 없이, 아주 드문 호칭이 이어 들렸다.
“그러니까, 자기야. 너무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직이 덧붙인 수현이 천천히 자신의 까만 티셔츠를 잡아 올렸다.
이걸 보면, 이교한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김수현은 거울을 볼 때마다 수없이 상상했었다.
처음으로 같은 침대 위에 올랐을 때, 더는 흉터를 늘리지 않기로 했던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했으니까. 벗은 티셔츠를 툭 떨어트리면서 마주 본 교한의 얼굴 역시, 얼마 안 가 믿을 수 없게 무표정해졌다.
신기한 건, 그런데도 생각과 기분을 읽는 건 너무 쉬웠다는 거지.
“……이럴 때만 자기야라고 하는 거 너무한데, 김수현.”
“미안.”
속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아예 감정을 숨겨 버린 어린 연인은, 실은 이제껏 함께하면서 보았던 그 어떤 때보다 들끓고 있다. 사랑스럽게 흐려졌던 갈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라앉은 게 그 증거다.
병실에서 겨우 가슴께만 볼 수 있도록 허락했던 이유 역시 막 깨달았을 거다. 그 아래로 온갖 파편이 박히고, 또 헤집고 지나간 흔적으로 가득하니까.
“지금도 아파?”
“아니.”
“그럼, 많이 아팠어?”
이교한의 긴 목과 선명한 목울대는 분노를 삼키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선명하게 보였다. 수현은 제 연인이 물음을 연달아 내뱉으며 주먹을 말아 쥔 것 역시 모른 척했다.
아프지 않았다고 말하는 건 너무 성의 없는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하는 쪽도 싫었다. 교한을 괴롭힐 생각 같은 건 없었으니까.
결국 짧은 고민 끝에 선택한 건 다정한 듯 현실적인 분담이었다.
“헤어진 애인 칼로 찌른 다음 두고 온 것보다는, 뭐. 견딜 만했던 거 같아.”
“…….”
그게 이교한에게 위로가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애써 감췄던 마음 한 자락이 기어이 비집고 나와 버렸으면 모를까. 수현은 떨리는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제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고개를 깊게 파묻는 남자의 등을 다독였다.
교한이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연 건, 큰 심호흡이 몇 번이나 반복된 뒤였다.
“……솔직히, 형은 걔랑 헤어지길 잘한 거였어.”
“왜?”
“평범한 대학원생인 줄 알았다가 사기당한 거나 다름없잖아. 별 거지 같은 직장 다니는 사이코패스한테 완전 잘못 걸렸어.”
들은 말에 담긴 진심 혹은 진실의 농도를 모두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거기에 이질적인 단어 하나쯤 끼어 있다 하더라도 괜찮다. 획 하나하나가 사랑에 푹 절여져 나온 문장이라는 것 정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전해지니까.
수현은 이번만큼은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말을 받았다.
“난 걔가 정말 좋았는데.”
“…….”
“정말이야.”
혀 밑으로 사탕을 숨긴 것처럼 자꾸 침이 고였다. 이런 달콤한 말은 늘 교한의 몫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그 애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아끼는 거였으니까” 하고 속삭인 문장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맞닿은 입술 덕분에, 잔뜩 고인 타액을 나눠 삼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