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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5
“아니에요! 이안 님의 죄라니요, 말도 안 돼요! 제가 어리석어 신께서 보낸 사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어요. 이 자비로움…. 저의 허물을 도리어 감싸 주시는 넓은 마음…. 아아! 제가 너무도 부끄러워요.”
인어 공주가 흐느꼈다.
이안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아바마마가 이미 돌아가셨으며, 이제는 제가 왕좌에 올라 이 해저 도시를 책임져야 한다는 걸 저는 알고 있었어요. 그것을 인정하는 게 두려웠을 뿐이죠. 저는 이토록 어리석은 사람인데, 제가 잘못된 판단을 내려 이 땅에 영원한 어둠을 가져오면 어떻게 하나요? 저처럼 용기 없는 사람이, 결단이라는 걸 내릴 수 있을까요?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그리고 형제들처럼 현명하게 이 땅의 백성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요?”
‘내가 대답해야 하는 건가?’
이안이 입을 열기 전에 다행히 인어 공주는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요. 전 그럴 수 없을 거예요. 그런 제가 어떻게 왕좌에 오르겠어요? 문무백관들은 저의 결단을 재촉했지만, 저는 망설이며 피해 오기만 했던 거예요. 고무덤의 마물은 저희가 처치해야 했던 괴물. 제가 진작 마음을 먹고 용사들을 모아 잡으려 했다면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화산으로 인해 백성들이 피해를 볼 일도 없었겠지요.”
인어 공주의 눈물 젖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덕분에 이안은 ‘아니, 그러면 해저 도시 몰살인데’라는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설령 캬라쿠스를 물리쳤대도 그 사체의 마기가 해저 도시를 물들였을 터다.
인어 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 저를, 한 마디 꾸짖음도 없이 깨우쳐 주시니…. 이 한량없는 은혜를 제가 어찌 갚아야 할까요?”
인어 공주는 이안이라는 용사가 틀림없이 키이스와 같이 미친 인간이리라고 믿었다. 키이스의 협박 이후 뜬눈으로 새벽을 새우다가, 아침이 되자마자 이안 일행을 부른 참이었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이들 일행이 아무 탈 없이 도시를 나가 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이안은 저 무서운 키이스 경을 나무라듯 쳐다보더니 오히려 공주를 위로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인어 공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왕족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안이 보여 준 행동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녀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안의 말에 따르면, 그가 해저 도시에 들어온 이유는 애초에 캬라쿠스를 잡기 위해서인 듯했다. 대륙에서는 들어올 길을 찾기도 힘든 해저 도시까지 무리해서 들어와, 괴물을 잡아 주기 위해서만 움직였던 셈이다.
그는 인간족을 외면하는 어인을 아무나 붙잡고 협박할 수 있었음에도, 호구 같은 가격으로 캬라쿠스의 돌을 구매해서 마물의 흔적을 입수했다. 그러고는 성안 사람들의 거친 태도에도 반발 없이 끌려왔다.
이후 공주를 대하는 태도는 어땠는가? 몹시 용감하고 정중했다. 공주의 주변 사람들마저 ‘폐하께서 아직 살아 계시겠느냐’, ‘어리석은 미몽에서 깨어나셔라’고 그녀를 질책했음에도 이안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캬라쿠스가 강대한 마물임을 이미 짐작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공주의 믿음을 무시하지 않고, 아바마마를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으나, 사실 그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공주는 아바마마와 형제들을 찾게 될 터였다. 고무덤은 용사들의 무덤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 그 무덤에서, 그녀는 가족들의 유해를 수습할 수 있을 터였다.
이 모든 판단을 마치고 나니 인어 공주는 감격이 북받쳐 올랐다. 전날의 미친 살인마 같은 키이스의 태도가 이안과 대비되어, 그는 거의 천사처럼 보였다.
본래 수면이 부족하면 사람의 판단력은 떨어지기 마련이어서, 인어 공주의 눈에는 이안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모습마저 보이는 듯했다….
사실 그것은 이안 뒤에 있는 키이스의 갑주가 어전의 조명을 반사하며 생긴 빛이었으나.
인어 공주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주먹을 꼭 쥐었다.
“이제 제가 할 일을 깨달았어요. 저는 왕위에 오를 거예요.”
“드디어! 공주님!”
“아아! 여왕 폐하 만세!”
어인들이 감격했다.
이안은 알아서 진행되는 이벤트를 일단 놔뒀다.
“고무덤에서 용사들의 유해를 수습한 다음에는, 그곳에 신전을 세우겠어요. 그리고 신께 이안 님의 무사를 매일 기도하겠어요.”
‘아니, 그건 필요 없고.’
인어 공주의 말을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안 님을 저희의 영원한 친구이자 동맹으로 모시겠어요. 이안 님의 위험이 저희의 위험이며, 이안 님의 적이 저희의 적입니다.”
“영웅 이안 님을 위하여!”
“와아아!”
인어 공주의 결연한 연설에 어전이 달아올랐다.
띠링!
[동맹 세력]
– 배반자 마을
– 요정 여왕의 섬
– 해저 도시(+NEW)
‘좋아.’
뭔가 쓸데없는 보상이 끼었으나, 어쨌든 이 도시에서 받아야 할 건 다 받았다.
이안은 웃으며 맞장구쳐 줬다.
“여왕 폐하 만세.”
박수 치는 이안을 키이스는 무심코 쳐다봤다.
‘너무 관대하신 게 아닌가.’
볼 때마다 움츠러들어 있어서 몰랐는데, 인어 공주는 외견만 보면 상당한 미인이었다. 당당히 선언하는 모습이 매력적이다. 저 물고기 하체를 무시할 수 있을 때의 얘기였지만.
그러나 키이스는 이안이 이종족이라고 차별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므로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저 훌륭하신 관대함에, 설마 인어 공주가 미인이라는 점이 긍정 요소로 반영된 것이 아닌가….
‘자비는 훌륭한 덕목이지만, 상대의 외모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충언을 꼭 드려야겠군.’
키이스는 생각했다.
그들은 인어 공주에게서 거대 거북이를 한 마리씩 받아 뭍으로 올라갔다. 거북이는 넓은 등껍질에 그들을 태우고 안정적으로 솟아올랐다.
“푸하!”
그들은 순식간에 뭍에 도착했다.
이안은 가장 먼저 이동 내내 울려 대던 알림을 확인했다.
‘뭔데?’
띠링!
[‘인어 공주’ 모엘이 당신을 신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띠링!
[‘경비대장’ 옥투스가 당신을 신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띠링!
[‘시종장’ 포리티스가 당신을 신의 사도라고 생각합니다!]
“……!”
미친 듯이 구원자 평판이 오르고 있다.
원래 이렇게까지 오를 게 아닌데?
“너 진짜 무슨 짓 했냐?”
이안은 키이스를 돌아봤다.
키이스는 잡아떼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성격이 아니다.
“당신께서는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저의 역할은 당신을 보호하는 것. 당신께서 사소한 일에 심력을 소모하지 않도록 돕는 것도 저의 역할일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래서 무슨 짓을 했다는 거야?”
“간밤에 공주와 대화를 했습니다.”
“아, 대화를 했어?”
“예. 그 외에 그녀와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키이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이안을 응시하는 눈이 순수했다. 그의 얼굴을 보면 거짓말이라고는 평생 해 본 적 없는 사람 같다.
‘그야 그렇겠지….’
스스로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터였다. 인어 공주의 신변에는 이상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인어 공주가 키이스의 개소리에 동의할 것 같진 않았다. 이안은 그녀가 키이스와 눈도 마주치기 싫어하는 꼴을 방금 보고 왔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키이스가 성호를 긋고 짧게 기도했다. 그 꼴을 본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이 광신도와 왜 말을 섞으려 했을까? 자신에겐 더 좋은 수단이 있는데.
어쨌든 키이스에게 자신은 신의 사도가 아닌가?
이안은 명령했다.
“너는 앞으로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은 대화하지 마라.”
“예?”
“내 옆에만 딱 붙어 있어.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가지 말고.”
키이스의 눈이 커졌다.
“오오….”
어째서인지 엘프 상인이 눈을 빛내며 심장에 손을 올렸다.
‘이 자식, 왜 짜증 나게 구냐.’
이안은 상인의 오금을 걷어찼다. 그리고 키이스를 봤다.
“왜 대답이 없어?”
“예. 그러겠습니다. 이안 님께서 명하신다면. 당신 외에 어떤 사람과도 말을 섞지 않고, 당신 곁에만 있겠습니다.”
키이스가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맹세했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
이안은 왠지 기분이 찜찜해졌다.
그가 원한 건 키이스가 퀘스트 진행에 훼방을 놓지 않는 것이었는데, 무언가 이상한 것 같다.
애초에 하루 종일 입 닥치라는 말을 듣고 저 녀석은 왜 웃는단 말인가?
“…….”
아무튼 마지막 행선지가 남았다.
서부 사막의 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