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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
키이스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생각엔 그랬는데, 그는 해야 할 일만 했기 때문이다.
어인 병사들이 격전지로 와서 그들을 모셔 갔을 때, 그는 이안이 혼자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상 현상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 정도밖에 없었다.
이안이 귀를 만지작거리는 단순한 행동에도 시선이 쏠린다거나, 그가 별 부끄러움도 없이 병사 위에 올라탄 채 환호성을 받는 모습에 자신이 기분 좋아진다거나 하는 게 이상 현상의 세부 사항이었다.
이것은 저주의 영향일 테니 오늘 밤을 기약하면 금방 풀릴 일이다.
키이스의 마음은 평온했다.
그런데 어전에서 어인족들이 감히 이안을 쏘아붙였다. 키이스는 피가 식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깨달았다.
키이스는 이전에 어인 따위는 구해 본 적이 없었다. 해저에 사는 종족이라 만날 일도 없었을 뿐더러, 만났더라도 구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키이스에게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배반자 일족처럼 만나자마자 베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결국 저들도 마족과의 전쟁에서 자기 종족만 살겠다고 몸을 뺀 비겁자들 아닌가?
키이스는 비겁자들에게는 용무가 없었다. 그가 가는 길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지나치면 될 일이다. 그들은 스스로 없는 자가 되기를 택했으니, 그렇게 취급해 줄 뿐이다.
‘역시 감사를 모르는 종족이로군.’
골방에 갇힌 채, 어인 병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키이스는 생각했다.
이안은 신의 뜻을 행하는 분답게 그들을 용서했으나, 키이스는 용서할 수 없었다. 이안에게 한없는 존경을 품게 된 것과 별개로, 용서를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과 벌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키이스는 동족을 팔아넘기고 제 살길만 도모하는 자는 신도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베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인간의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으나, 속은 마물과도 같이 사특하기 때문이다. 살려 두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만 끼칠 족속이다. 미리 싹을 잘라 두어야 한다.
‘신탁에서는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야만 마족을 몰아낼 수 있다고 했다. 이안 님께서는 스스로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시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신의 말씀을 실천하고 계시는 거로군.’
교황청의 생각 얕은 자들은 마치 전쟁이 끝난 것처럼 신도들을 가르쳐 왔다. 이미 마족이 중간계를 지배하는 걸 막아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이 전쟁에서 졌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은 서로만을 도우며 각자도생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정확히 그런 표현을 하지는 않았으나, 성기사로 육성되는 종자들에게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뿐’이라고 가르친 것이 그것과 뭐가 다른가?
키이스도 한때는 교황청의 말이 모두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마족은 중간계를 침범했으나, 중간계의 원주민들을 몰살하지 못했다. 인간과 이종족들은 살아서 각자의 영역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살아남았고, 언제든 마족에 대항할 수 있었다.
키이스는 이안이 ‘세상에 퍼진 마기를 줄여야 한다’며 라이프베슬을 파괴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안이 하는 행동을 곁에서 보니 느끼는 바가 많았다. 이안은 라이프베슬을 파괴하며 동시에 이종족들을 구원하고 있었다.
이안은 여전히 신탁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종족을 괴롭히는 마물을 없애 그들을 마족의 마수로부터 구하고 있다. 이는 모든 종족이 힘을 합치라는 신의 말씀에 부합하는 바였다.
이안은 이런 얘기까지 키이스에게 해 주지 않았으나.
‘속내를 전부 보여 주시는 분은 아니지.’
외부로 알려진 것과도 크게 다른 분이다. 저 쓸모없는 엘프 상인을 아끼는 모습을 보면 미인을 좋아한다는 건 사실인 듯하지만, 그렇다고 엘프에게 억지로 수청을 들라고 하지는 않는다. 천천히 엘프의 마음을 사려고 할 뿐이다. 그건 키이스가 알기로 올바른 연애의 과정이었지 ‘난봉꾼’ 같은 평판이 붙을 만한 나쁜 짓은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키이스는 어쩐지 불쾌해졌다.
그는 엘프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자신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이안은 잠들었다. 밤이 늦었고, 성은 고요했다.
키이스는 높게 달린 창에 손을 얹었다. 철로 만든 창살이 막고 있어 사람은 물론 작은 새도 드나들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 해저에 새는 없었지만.
키이스는 맨손으로 창살을 잡았다. 밤에 조용히 움직이기에 갑옷은 너무 무겁다. 키이스는 중갑을 입고도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으나, 갑옷을 갖춰 입는 데 괜히 시간을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무장은 허리에 매달린 검뿐이었다.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철로 만든 창살이 양옆으로 휘었다. 그는 마치 커튼을 치는 것처럼 쉽게 창살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창틀을 이루는 성벽을 쥐어뜯었다.
돌로 만든 성벽이 거짓말처럼 부스러졌다. 기사가 나갈 만한 크기의 틈을 만드는 데까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걸렸다. 키이스는 창틀을 잡고 몸을 띄웠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그의 몸이 솟아올랐다.
다음 순간 키이스는 성 밖에 있었다. 창틀에 손으로 매달린 채, 성벽 외벽의 틈새에 발을 끼워 넣자 자세가 안정됐다. 키이스는 외벽에 몸을 딱 붙였다.
그들이 갇혀 있던 방은 3층이었다. 그의 아래를 어인 병사가 지나갔다. 그러나 외벽에 달라붙은 기사를 병사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림자조차 성벽 그림자에 숨겨 보이지 않았다.
병사가 멀리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키이스는 주변을 확인했다. 그의 눈에 상층 테라스가 들어왔다. 사람이 있는지 불이 새어 나오고 있다.
성에서 저토록 큰 테라스가 달린 방을 사용할 사람이라면 성의 주인 일가밖에 없다. 이 성의 주인 일가 중에 살아남은 사람은 공주뿐이었으므로 불 켜진 방의 주인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키이스는 자신과 공주 방까지의 거리를 재어 보고 훌쩍 도움닫기를 디뎠다. 그의 손이 두부처럼 성벽을 파고들었다. 암벽 등반하듯 가볍게 테라스까지 이동한 그는 레이스 커튼을 살짝 걷었다.
‘방 안의 인기척은 둘.’
둘이 붙어 있다.
방의 주인이 반응할 새도 없이 키이스는 그들에게 접근했다.
“어떻게 하지…? 그분들을 쫓아내면 안 됐던 것 같아. 먼저 감사 인사를 드려야 했어. 이미 몹시 화나셨겠지? 나는 글렀어….”
“아닙니다, 공주님. 아직 늦지 않으셨습니다. 내일 아침에라도 빠르게 잘못을 인정하시고 용사들을 모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야. 용서해 주지 않을 거야. 나는 잘못된 판단만 해. …헉?!”
“쉿.”
키이스는 어인 내관의 미끌거리는 비늘에 검을 겨눴다. 다른 손을 펼쳐 검지를 입술에 대자 인어 공주는 굳어 버렸다.
어인 내관의 아가미가 미친 듯이 헐떡댔다.
“이, 이게 무슨, 당신은, 키이스 경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 방에서 나왔….”
키이스는 그를 무시하고 인어 공주를 봤다. 그녀는 책임감 없이 권력을 휘두르는, 키이스가 벌레처럼 싫어하는 권력자의 전형이었다. 사실 키이스가 마음을 먹으면 이 성내의 모든 어인은 하룻밤 새 시체가 될 수 있었다. 상대는 그 정도의 판단력도 없이 은인을 적대한 것이다.
“캬라쿠스는 당신의 가족들을 죽이고 또 어인들을 죽인 이 도시의 큰 재앙이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인어 공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키이스는 그녀의 의견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예, 아니요로만 대답해 주십시오.”
“…예….”
“이안 님은 목숨을 걸고 해저 도시의 재앙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맞습니까?”
“예….”
“당신의 가족들을 죽인 분이 이안 님이십니까?”
“아니요….”
인어 공주가 부르르 떨었다.
“이안 님을 원망하십니까?”
“아니요…. 흑….”
“캬라쿠스를 죽인 이안 님을 정말로 철창 따위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당신들은 그분이 선량하고 관대한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원망을 듣고도 화내지 않는 것을 보고 알아챘겠지요.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화를 내고 탓하고, 또 박대해도 무사하리라 여긴 것이 아닙니까?”
인어 공주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어전에서 울었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백색 성기사는 살아 움직이는 게 신기할 정도로 신성하고 냉엄했다. 신전에서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하늘에 봉헌한 예술품 같았고, 그가 하는 말은 옳을 수밖에 없다고 느껴졌다.
“저는 당신들처럼 역겨운 생명이 왜 살아 숨 쉬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키이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어진 것은 순수한 의문이었다.
“당신들이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저에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