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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
이안은 귀를 의심했다.
“뭘 하겠다고?”
그가 뭘 생각했는지 깨달은 듯 키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께 경의를 표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지면 당신께서 당황하실 듯하여….”
‘아. 그거.’
이안은 키이스가 말한 게 뭔지 알아차렸다. 서양 역사물을 볼 때면 종종 나오는 장면 있지 않은가? 상대의 손등에 입을 맞추는 장면.
문화 생활을 거의 하지 않은 이안이라도 게임 정도는 했기 때문에, 트레일러 영상 등에서 나오는 그 장면을 종종 봤다.
그런데 키이스가 만진다고 이안이 당황한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이안은 그런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안이 말을 끊었다.
“그럼. 당연히 되지. 마음껏 경의를 표해.”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왜 경의를 표하는 거지?’
영문은 알 수 없었으나 키이스는 이안의 손을 자신에게로 가져가고 있었다. 그가 이안의 장갑 낀 손등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댄 채로 잠시 움직이지 않아서, 이안도 숨을 쉴 수 없었다. 숨을 쉬면 몸이 들썩일 것 같다. 자신이 긴장한 걸 키이스에게 알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긴장은 안 했지만.’
이안은 자기 세뇌를 마쳤다. 키이스가 자신의 손등에 입을 맞춘다고 그가 긴장할 까닭이 뭐가 있단 말인가.
키이스는 광신도에 기사 캐릭터였고 이안을 ‘신의 사자’라며 따르고 있었다. 손등에 입맞춤 같은 건 밥 먹듯이 받아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고 보니 이안은 왜 키이스에게 그런 경의 표현을 한 번도 못 받았는지 의아해졌다.
‘이 녀석 설마 지금 처음으로 날 존경한 건가?’
그건 그것대로 떨떠름해진다.
아무튼 키이스의 충성도가 올라갈 만한 선택지라면 알아 두고 싶었기 때문에, 이안은 최대한 별것 아니라는 태도로 물었다.
“근데 왜 날 존경할 마음이 들었어?”
키이스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여전히 몸을 낮춘 채 그는 눈만 들어서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가 진실된 어조로 말했다.
“저는 처음부터 이안 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너 처음에 내 목 졸랐잖아, 새끼야.’
이안은 성기사가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었다.
“물론 그렇겠지. 그런데 갑자기 마음 깊숙한 곳에서 존경심이 우러나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이안 님께서는 배은망덕한 어인 일족 역시 진실로 용서하시고 너그럽게 품어 주시지 않습니까. 하늘에 계신 그분의 가르침인 자애를 몸으로 실천하시는 분이시니 제가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역시 달래 주는 게 정답이었군.’
본인은 인간 외 종족을 벌레 취급하는 주제에 그들을 또 용서하는 건 훌륭한 일이라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이안은 키이스의 판단 기준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계속 착한 척을 하며 키이스를 정의의 편에 세우는 게 바른 루트가 맞다. 확인까지 받아서 이안은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이안 님. 저들이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든다면 어찌해야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저 밖의 어인 병사들이 이안 님을 해치려 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금 저들은 은인인 당신을 감금하고 감시 중이지 않습니까. 무슨 일을 더 벌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이벤트 없고.’
이안은 적당히 대답했다.
“그러면 도망치자. 그럴 실력은 되잖아.”
“저희가 떠나면 저들은 계속 이안 님을 원망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려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라고 해. 그게 저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면.”
키이스는 물끄러미 이안을 쳐다봤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선행에 의미가 있습니까?”
그들이 한 게 선행인가? 키이스는 아무래도 그들이 뭐 하러 이곳에 왔는지 까먹은 모양이었다.
‘아니지. 얜 라이프베슬 터뜨리기가 세상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이안이 그렇게 세뇌시켜 놓지 않았는가?
“너랑 나는 알잖아.”
‘우리가 한 건 선행 맞지’라는 미소로 이안은 키이스의 멘탈을 달래 줬다.
남의 원망을 받으면서도 선행을 멈추지 않던 기사는 쉽게 넘어왔다.
키이스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예. 저희가 알지요.”
그가 미소 지었다.
이안은 키이스가 좀 자주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 나이처럼 어려 보이고 좋지 않은가.
뭐, 사실 두 사람이 아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말은 효과가 있어서 이안의 눈앞에 상태창이 떴다.
띠링!
[‘신의 대리인’ 키이스가 당신을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띠링!
[‘????’ ???가 당신의 정신력에 감탄합니다!]
‘???’?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 침대 위에 엘프 상인이 걸터앉아 있었다.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내 단골들은 정의롭고 강인하구나. 정말 좋다.”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같이 끌려와 놓고 존재 자체를 잊었다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키이스의 존재감이 너무 큰 탓이었다. 애가 멘탈이 나가서 이상한 루트로 들어서려 드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신경 쓴단 말인가?
아무튼 이안은 키이스와의 대화를 돌이켜 봤다. 손등에 입을 맞추고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낯간지러운 대사를 잘도 치지 않았나?
지금만 해도 그랬다. 키이스는 이안이 앉은 침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안은 귀가 달아올랐다.
“왜 계속 그러고 있어? 일어나.”
“예, 이안 님.”
키이스는 이안이 잡고 일으킨 제 손을 잠시 내려다봤다. 그리고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소중한 걸 품듯이.
침대 위로 파묻힌 이안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호의니 선행이니, 자기도 잘 모르는 걸 열심히 떠들었더니 낯이 다 뜨거웠다.
극도로 피로하기도 했다. 대전투를 치르고 어인 이벤트를 보고 키이스의 멘탈까지 케어했더니 더 이상 눈을 뜰 기운도 없다.
이안이 마지막으로 생각한 건 이런 것이었다.
이 방 조금 춥지 않나? 해저 도시 디테일을 이런 데서 챙길 필요는 없을 텐데.
그보다 방에 침대가 두 개뿐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
이안은 어깨를 움츠린 채 떨었다. 한기가 옷 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곧 품이 따듯해졌다. 무언가가 그를 감싸서 온기를 나눠 주고 있다.
꿈속에서 이원은 중학교 교복을 입은 시절로 돌아갔다.
이원이 자란 고아원은 괜찮은 곳이었다. 물질적으로 대단히 부족하게 자라지는 않았다. 물론 풍족한 적도, 갖고 싶은 물건을 가져 본 적도 없었으나.
선생님들은 최대한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신경 써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모두를 충분히 안아 줄 만큼 넓은 마음을 갖지는 못했다. 정이원처럼 문제가 많은 아이라면 더욱 그랬다.
고아원 원장님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이원의 머리를 누르며 너도 어서 죄송하다고 말하라고 독촉했다.
이원은 생각했다.
– 난 잘못하지 않았어.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았다.
이원은 잘못했고, 그건 부모 없는 고아 새끼가 할 만한 짓이었으며, 누구도 이원의 편이 아니었다.
이원이 구해 준 피해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오한이 들고 추웠다. 이원은 외로웠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로 울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비참해지지 않을 것이다.
– 난 잘못하지 않았어.
그때 누군가 이원에게 대답했다.
– 예. 당신께서는 잘못하시지 않았습니다.
– …난 해야 할 일을 했어.
– 옳은 일을 하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
– 저도 압니다.
그 목소리는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아주 먼 데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사람이 이원을 안아 줬다.
몸의 떨림이 멎었다. 차가운 손과 발까지 온기가 돌았다. 이원은 따듯한 모포에 싸여 아기처럼 안겨 있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다정한 품을 이원은 몰랐다. 그는 조금 울었고,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날이 밝아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푹 쉬었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이다.
이안은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팔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온몸이 꽉 짓눌려 있다. 고개를 돌리니 키이스의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뭐지?
이 녀석이 왜 여기서 자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보다 문제인 건 갑갑함이었다.
감옥에라도 갇힌 기분이었다. 이안을 둘러싸고 있는 건 사람의 팔과 몸이었으나, 이안이 치울 수 없다는 점에서 감옥 창살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없었다.
키이스는 이안과 같은 침대에 낑겨 누워 있었다. 큰 몸을 일인용 침대에 구겨 넣기 위해 그는 이안을 인형처럼 끌어안는 방법을 고안해 낸 모양이었다.
이안은 숨이 턱 막혔다. 몸 위에 얹어진 건 팔다리밖에 없는데, 근육 대신 강철이 들었는지 그 무게가 엄청났다.
“키이스. 일어나.”
뭉개진 발음이 튀어 나갔다.
키이스의 조각 같은 얼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기사라면 예리한 감각으로 수면 중에도 누가 가까이서 움직이면 깨야 하는 거 아닌가? 세계관 최강자 성기사가 이렇게 잘 자도 되는 건가?
이안은 의문이었다.
이 녀석 대체 몇 시에 잠든 거야?
“팔 좀 치워 봐. 아니면 다리라도…. 키이스?”
“당신은 옳은 길을 가고 계십니다….”
키이스가 중얼거렸다.
“……?”
이안은 물론 최적의 루트를 찍고 있었다.
‘걷어차도 안 부러질 것 같은데, 좀 차도 되나?’
그는 키이스의 정강이를 슬쩍 봤다.
‘…내 발이 부러지려나?’
자신감이 사라졌다.
자고 있는 키이스를 보니 그린 듯이 잘생긴 얼굴이라 때릴 마음이 안 들기도 했다. ‘그린 듯이’가 아니라 실제로 누가 그린 외모가 맞았지만.
키이스의 평온한 숨소리가 색색 울렸다. 그럴 때마다 무게가 실려서 이안은 숨이 턱턱 막혔다.
어떻게 해야 무사히 일어날 수 있을까?
이안이 고민하고 있는데 엘프 상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잤어? 우리가 아직 무사히 갇혀 있는 걸 보니 아직 처분이 안 났나 보다, 그치?”
‘음.’
그래. 이 녀석이 있었지.
이안은 최적의 루트를 찍었다고 자신하던 마음을 접었다.
그는 루트를 잘 짰으나 저 변수가 끼어들어 경험치 파밍을 망쳤다. 아마 캬라쿠스가 일찍 깨어난 것도 오류 난 신캐를 데려가서가 아닐까? 그래. 틀림없다.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저 자식만 아니면 최적화 완료였잖아.’
아직도 채집 못 한 5성 신캐가 맞은편 침대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마침 잘됐다.
이안은 안 그래도 진지하게 저 캐릭터를 공략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