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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
‘아 역시?’
이안은 예상했던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애초에 키이스 루트의 어려움은 키이스의 육성에 있지 않았다. 그의 확고한 성향이 선택지를 제한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선택지를 잘못 고르면 기껏 고생은 다 해 놓고서 해당 이벤트로 얻어야 할 보상을 날리는 수가 있었다. 지금처럼.
‘아니, 저 인어는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미안해하면서 보상 갖다 바친다고.’
그 전에 다른 모션을 취하면 보상은 없다. 그리고 이 이벤트에서 꼭 얻어야 할 인어 공주의 호감도도 얻을 수 없었다.
키이스를 데리고 다닌 순간부터 이안은 이안 루트의 어려움과 키이스 루트의 어려움이 겹칠 것을 대비했어야 했다. ‘이놈으로 마왕 깨면 쉽겠지’ 하고 희희낙락할 게 아니라.
이안은 일단 침착하게 물었다.
“뭐 어떻게 벌하게?”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깨닫게 하고 참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냥 죽이겠다는 소리 아닌가?
키이스가 이안 앞에서 그나마 멀쩡한 성기사처럼 구는 것은 이안을 ‘신의 대리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 녀석은 ‘이종족=배신자=사형’이 머릿속에 박힌 광신도였다.
그래서 키이스 루트에서는 인간족 외의 다른 세력과 연합할 수 없었다. 물론 인간들이라고 키이스가 함께 잘 지낸 건 아니었지만.
이안의 표정을 보고 키이스가 덧붙였다.
“애초에 어인족은 마계 습격 때 함께 싸우지 않은 비겁자들입니다. 깊은 바닷속에 숨어 비겁하게 위험을 회피하고, 외인들을 배척하고, 저들끼리만 살아남고자 하는 자들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 은인에게는 원망을 돌리지 않습니까. 태생이 비겁하고 남의 탓만 하는 게 저들의 속성이겠지요. 저토록 가치 없는 생명들이 존속하고 있는 것은, 아직도 대륙에 남아 악마의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저런 족속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단 말입니까?”
“아니, 대륙의 생존자들이 어인 살리려고 싸우고 있는 건 아니지. 그냥 각자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는 거잖아?”
이안은 놀라운 논리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키이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저들은 신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신의 사자께서 허름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왔을 때, 선한 이들은 문을 열어 맞이하고 얼마 없는 가산을 모아 손님을 대접했지요. 욕심 많고 악한 자들은 사자의 외양을 보고 박대하고 조롱했습니다. 이안 님을 대하는 저들의 태도가 이와 같습니다.”
이건 또 무슨 비약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안은 신의 사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이안은 다른 논리로 반박했다.
“가족과 친구들을 잃어 슬픔에 잠긴 사람과 그자들을 어떻게 같게 볼 수 있어? 공주가 느끼는 고통은 우리가 모두 아는 감정이잖아.”
“그것은….”
처음으로 키이스의 말문이 막혔다. 키이스 자체가 가족을 잃고 복수심만 남아 이 땅에서 마족을 멸하겠다고 일어난 성기사였으니까.
‘됐나?’
이안은 키이스가 넘어왔나 살폈다. 이 방에서 조금만 버티면 보상이 들어올 텐데 키이스가 날뛰게 둘 수는 없다.
그가 단독으로 어전으로 뛰어 들어가기라도 하면 인어 공주는 겁을 집어먹고 영원히 ‘보상’ 같은 생각은 하지도 못할 터였다.
저 우유부단한 인어 공주에게는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중요했다. 남한테 화낸 뒤 발 뻗고 자는 성격도 못 돼서, 한밤중이면 뒤척이며 ‘내가 잘못했지, 훌쩍훌쩍’ 하고 반성할 캐릭터였으니까.
“이안 님. 어째서 화내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키이스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무슨 화?”
“이안 님께서는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더 이상의 고통이 없도록 막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과정에서 이안 님은 목숨을 잃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당신의 선의와 희생은 보지도 않고 스스로의 슬픔에 취해 오히려 당신을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왜 실망하고 화내지 않으십니까?”
이안은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프로그래밍된 캐릭터인데 뭘 화내고 말고 한단 말인가?
그리고 전제부터 틀렸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저 사람들 도와주려고 내려온 게 아니거든? 마왕의 라이프베슬 파괴하려고 온 거잖아.”
“그 괴물이 라이프베슬을 지키고 있던 게 아니라 왕궁을 짓밟고 있었다면, 이안 님께서는 괴물을 잡지 않으셨을 겁니까?”
“잡았겠지.”
이안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키이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궁이 터지면 보상을 못 받잖아.”
무슨 당연한 질문을 한단 말인가?
“예. 당신께서는 그런 분…. 예?”
이안은 저도 모르게 진심을 말했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 신의 대리인 평판.’
“…신께서는 모든 종족이 하나가 되어 마계와 맞서 싸우라고 하셨는데, 어인족이 숨어 버렸다고 해서 우리까지 그들을 외면하면 되겠어? 먼저 손을 내밀어야지.”
키이스는 이안이 방금 했던 말과 뒤에 이어진 말의 괴리 사이에서 혼란에 빠졌다가, 앞선 말을 못 들은 것으로 취급하기로 한 듯했다.
“과연 관대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은혜를 모르고 내민 손을 잡을 줄도 모르는 자들이니,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키이스가 가르침을 청하는 태도로 물었다. 그의 얼굴은 길 잃은 양처럼 선량했다. 이안은 사이비 교주가 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무슨 헛소리를 해도 지금의 키이스라면 다 납득하고 교리로 삼을 것 같다.
이안은 최대한 착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은 은혜를 모르는 게 아냐. 슬퍼하고 있을 뿐이지.”
“하지만 은인인 이안 님을 골방에 가두고 병사들을 내어 감시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아는 처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밖에 병사들도 있냐?’
이안은 그건 몰랐다. 이 방이 골방은 아니었지만.
그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공주도 슬픔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하겠지.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이진 못해.”
“…제가 구한 사람들 중에서도, 왜 더 빨리 와서 가족들을 살려 주지 않았냐고 저를 원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키이스가 고개를 숙였다. 이안은 키이스가 지금의 처우에 예민하게 반응한 이유를 깨달았다. 본인의 경험이 겹쳐서 그랬던 모양이다.
“저는 그들을 이해했습니다. 그렇다고 믿었으나…. 속으로는 원망을 품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키이스는 약자와 인간에게는 관대했으나, 그런 상황에서 속이 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였다.
“…교황청에서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교황의 악행보다도 그들을 지키고 있던 보호막이 사라진 것에 더 큰 동요를 보이더군요. 아마 이안 님께서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이안 님을 원망했을 겁니다. 어쩌면… 사람은 고마움을 모르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키이스가 낙담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신이 빚은 조각 같은 외모라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는데, 이안은 그 얼굴에서 앳된 면을 발견한 듯했다. 그는 다시금 키이스의 나이를 떠올렸다.
‘어린 녀석.’
원래 세상은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안도 괴롭힘당하는 애를 도와주려고 싸웠다가 자신이 학폭 가해자로 몰려서 위원회에 회부된 적이 있었다. 이안이 도와줬던 상대는 그를 위해 증언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런 법이다. 이안은 사람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키이스는 도움을 베풀면 감사가 돌아오는 상황을 기대할 만큼 세상을 믿는 모양이다. 그러나 선의가 선의로 돌아오는 건 게임에서나 있는 일이었다. 호감도작을 하면 정말 호감도가 오르다니, 놀라운 일 아닌가.
‘아, 여기 게임 속이지.’
이안은 문득 자각했다. 여기 너무 오래 들어와 있었던 모양이다. 현실과 혼동하다니. 이안은 키이스에게 충고할 뻔했던 말을 삼켰다.
키이스는 바뀔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인어 공주는 곧 감사를 전하러 올 터였다. 이 게임 세상은, 선의를 베풀면 보통은 상대방의 호감도가 오르는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니까.
‘아니, 그보다 얘가 인간 불신에 걸리면 곤란하잖아.’
이안은 식은땀이 났다.
인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녀석이 인간 불신에 빠지면 뭘 위해 싸우려 들겠는가?
“힘이 없어서 그래. 너처럼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경우는 보통 드물지. 같은 처지라면 우리도 그랬을걸.”
이안은 어린 녀석의 어깨를 툭툭 쳐 줬다. 키이스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이안을 봤다.
푸른 눈동자는 본래의 맑은 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물었다.
“이안 님. 입 맞춰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