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x - 79
#079
그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잖아, 나도 방해하고 싶지 않은데. 누가 오는 것 같거든.”
엘프 상인이 말했다.
이안은 깜짝 놀랐는데 엘프 상인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놀란 건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정화>!”
이안은 스킬을 사용하고 키이스를 확 밀어 버렸다. 이안의 힘에 밀릴 키이스가 아니었으나, 그는 순순히 몸을 물려 주었다.
머리끝까지 새빨개진 이안이 로브를 여미며 물었다.
“너 안 죽었어?”
“멋대로 죽이지 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수백 년을 살아온 몸이라고. 설마 마물에게 죽겠어?”
“근데 왜 안 나타났어?”
“잘못해서 죽을까 봐 숨어 있었지.”
‘이건 무슨 개소리야?’
잠깐, 엘프가 살아 있다는 건….
이안은 설마 싶어 들어온 경험치를 확인해 봤다. 그리고 극도의 분노를 느꼈다. 예상한 것보다 경험치 습득량이 적다. 게임 시스템이 저 엘프의 활약도 활약이랍시고 경험치를 배분한 것이다!
‘이 트롤 새끼가…!’
안 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놈은 내가 갖는다.
이안은 손톱만큼의 손해도 감수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말뚝 박고 경험치작을 하려던 계획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뒤틀려서 심기가 불편한 마당이다.
현실이었다면 게임사에 오류 제보라도 넣었을 텐데, 여기선 보상받을 방법도 없다.
“왜, 왜 그렇게 봐?”
엘프가 놀라서 눈치를 봤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키이스가 그를 부른 탓이다.
“이안 님.”
이안은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봤다.
멀리서 갑주를 입은 어인 병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을 통솔하는 기사는 극도로 조심하는 태도였다. 주변을 연신 살피며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 있나 찾고 있다.
화산이 폭발한 여파로 흩날리던 재와 먼지가 조금 걷히자, 어인 기사는 이안 일행을 발견한 듯했다. 그쪽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더니 병사들이 멈춰 섰다.
어인 기사가 겁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거기! 살아 있는 인간인가?”
저건 또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으로 키이스가 이안을 돌아봤다.
이안은 인어 공주가 다스리는 어인들이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용감한 어인들은 이미 국왕과 함께 고무덤의 일부가 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이안이 캬라쿠스를 물리치면 저들은 원래 저렇게 와서 캐릭터의 생사를 확인한다.
그는 해야 할 대사를 했다.
“살아 있어요. 그리고 괴물은 죽였습니다.”
“뭐?! 말도 안 되는!”
“무슨 짓을 한 건가?”
기사는 아무리 봐도 이안 일행 외의 생명체가 없는 듯하자, 그제야 용기를 내서 그들에게 달려왔다. 병사들이 뒤를 따랐다.
“이럴 수가! 정말로 괴물이 죽었군!”
“어떻게 외지인들이 괴물을 물리칠 수가…?”
어인들은 캬라쿠스의 거대한 사체를 확인한 뒤에야 사태를 받아들였다. 이안 일행을 고무덤에 처넣자마자 문을 잠가 버렸던 어인들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두 팔 벌려 영웅들을 칭송했다.
“인간 기사 만세! 엘프 마법사 만세!”
“외지에서 영웅이 와서 괴물을 물리쳤다!”
그들은 환성과 함께 성으로 귀환했다. 고무덤에서 나는 괴성과 폭음에 잠 못 이루고 있던 어인들은 병사들에게서 영웅담을 전해 들었다.
그들이 만세 행렬에 동참했다. 이안은 어인 병사 하나의 어깨 위에 올라탄 채 두 손을 흔들어 환호에 답해 줬다. 안 그래도 피곤하던 차다. 제 발로 자동차가 되어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가 있겠는가?
키이스는 목마를 태워 주겠다는 다른 병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이안의 뒤를 따랐다.
‘이상하군.’
이안을 안고 싶은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그가 품속에 있을 때는 완벽한 순간이라고 느껴졌는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허전했다.
‘중간에 정화를 방해받은 탓일 테지.’
키이스는 이런 공허감이 달갑지 않았다. 이안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돌리면 그가 어디로 사라질 것도 아닌데, 자신은 왜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는지 알 수 없었다.
격렬한 전투의 후유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한순간 신을 잃은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으니까.
이안이 그를 다시 빛의 세계로 불러 주었으나, 자신이 계속 불안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정도 감정은 스스로 다스릴 수 있을 터였다.
이안은 자신을 매일 밤 정화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여러 가지 이유로 정말 ‘매일’ 정화받지는 못했으나, 오늘 밤은 다를 터였다. 그들은 이 해저 도시의 문제를 해결했으니까. 그들에겐 만족스러운 침대와 시간이 주어질 터였다. 그때까지 정도야, 기다릴 수 있다.
병사들이 어깨 위에 올린 건 이안만이 아니었다. 캬라쿠스의 거대한 목도 있었다.
적의 목을 전리품 삼는 건 인간만의 풍습이 아니어서, 어인들은 그들을 오래 괴롭혀 온 괴물의 목을 잘라 전시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쿵!
어전 한가운데에 괴물의 머리가 떨어졌다. 짐을 싣고 온 병사들은 비늘에 맺힌 땀을 훔치며 뒤로 물러났다. 어전에 모인 해저 도시의 유력자들과 궁인들은 캬라쿠스의 흉측한 머리를 보고 몸서리쳤다.
그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안 일행을 돌아보았다. 사체인 채로도 그 위용이 느껴지는 괴물이다. 해저 도시를 오래도록 괴롭혀 온 이 괴물을, 고작 세 명의 외인들이 해결했단 말인가?
내관이 소리쳤다.
“공주님 드십니다!”
웅성거리던 어전이 조용해졌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인어 공주가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몰골로 황급히 어전에 들어섰다.
이안은 그 와중에 소소한 궁금증을 해결했다. 저 인어 꼬리로 물 없는 땅을 어떻게 다니는가 싶었는데, 뱀처럼 꿈틀거리며 앞으로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별로 우아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도 별로 우아하진 않았으니까.
문젯거리를 해결해 줬다고 감사를 받는 건 요정 여왕의 숲에서만이다. 그 외의 장소에서는 대개 욕부터 먹게 되어 있었다.
이런 식이다.
“아아! 이게 우리를 괴롭힌 괴물…! 드디어 끝났군요! 언제 화산이 폭발할까 두려움에 떨던 일도, 용감한 전사들을 고무덤으로 보내 잃게 되는 일도 끝이 났어요. 정말 고마워요. 여러분들이 해내셨군요!”
인어 공주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환호하던 어인들도 함께 울기 시작했다.
“어머, 이렇게 좋은 날에 제가 울면 안 되지요. 다들 울지 말아요.”
눈물을 닦아 낸 인어 공주가 애써 미소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데… 아바마마는 어디에 계신가요? 제 형제들은…? 다른 사람들은….”
인어 공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간절하게 이안을 쳐다봤다.
‘욕먹을 시간이군.’
이안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괴물을 상대하고, 혹시나 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살아 계신 분은 없었습니다.”
“어째서지요…? 여러분이 약속하셨잖아요. 아바마마를 구해 주시겠다고. 저 괴물에게 붙잡혀 못 오시는 거라고. 제 형제들과 병사들을 구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 약속을 했었나?’
인어 공주의 기억에 혼동이 있는 듯했으나 이안은 지적하지 않았다. 그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사실 공주님도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왕좌를 이어받을 분은 이제 공주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요. 나라의 오랜 근심이 해결되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입니다. 왕위에 올라 용사들을 축복하고 또 이 나라를 다스려 주세요. 더 이상 꿈으로 도망치셔서는 안 됩니다.”
처음 인어 공주를 만났을 때부터 그녀의 곁에 있었던 어인 내관이 말했다. 인어 공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싫어!”
그녀가 이안을 가리켰다.
“어째서 아바마마와 형제들을 구해 오지 못한 건가요? 그대들은 괴물을 물리칠 정도로 강맹한 용사들이잖아요!”
“은혜를 모르는 어인족이….”
키이스가 검 자루에 손을 올려서 이안은 당황했다.
‘아니, 이건 정해진 이벤트고.’
그가 검을 잡은 키이스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
키이스는 애초에 인간 외의 종족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그가 얌전히 욕먹어야 끝나는 이벤트를 망치게 둘 순 없었기 때문에, 이안은 인어 공주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죄송합니다. 제 능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요! 당신들의 능력이 부족해서 아바마마가 돌아가신 거예요. 가족들이, 병사들이 내 곁을 떠나간 거야. 이 춥고 외로운 자리에 나를 혼자 두고….”
인어 공주가 이안을 비난했다. 이안은 키이스의 힘줄 돋은 손을 도닥이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 녀석이 사고 치면 안 되는데….
“공주님. 저희가 갔을 때는 이미 살아 있는 생명체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저분들의 탓이 아니라….”
어인 기사가 설명하려고 했다.
“듣기 싫어!”
인어 공주가 울음을 터뜨렸다. 어전의 분위기는 침통해졌다.
어인 내관이 이안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이 이곳에 계시면 저희 공주님께서 더욱 괴로워하실 듯합니다. 방을 안내해 드릴 테니 들어가 쉬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들은 쫓기듯 방을 안내받았다.
문이 쿵 닫혔다. 잠시 침묵이 들었다.
이안은 슬쩍 키이스의 눈치를 봤다.
‘이 새끼 무슨 생각 하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키이스가 새파란 눈을 들어 이안을 봤다. 그는 보석 같은 눈동자가 까맣게 보일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이안 님. 저 은혜도 염치도 모르는 자들을 벌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